역대 국사교과서Ⅶ. 개화와 자주 운동3.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1] 농민들의 생활은 개항 이후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방곡령

갑신정변으로 조선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은 일본은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쌀과 콩 등의 곡식을 많이 사 가고 영국제 면제품을 팔았다. 가뜩이나 흉년이 잦은 상태에서 일본으로 곡식이 유출되어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더욱이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의 상인들이 몰려와 일본 상인들과 경쟁적으로 활동을 넓혀 감으로써 조선의 농촌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하여 일부 지방에서는 방곡령을 내려 일본 상인들이 곡식을 사 가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방곡령으로 손해를 보게 되었다며 조선 정부에 배상을 강요하였고, 정부는 이에 굴복하여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농민들은 소작료를 바치고 각종 세금을 빼고 나면 항상 빚에 쪼들리며 생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농민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여 농민들 사이에는 일본을 배척하는 기운이 널리 퍼졌다. 게다가 정부가 외세의 침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자 정부에 대한 불신도 높아져 갔다. 이러한 농촌의 분위기는 동학이 널리 보급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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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곡령

1889년 9월에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그 해에 흉년이 들어 곡식이 부족하게 되자,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들에게 10월부터 콩과 쌀의 수출을 금지한다는 방곡령을 내렸다.
콩은 일본인들의 중요한 식료품인 간장과 된장의 원료로 쓰이는데, 이의 상당 부분을 조선에서 수입하였다. 그러므로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들은 콩 무역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에, 일본측은 방곡령을 해제하고 조병식을 해임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아울러 방곡령으로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를 조선 정부가 배상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대로 손해의 일부를 갚아 주었다.
열강의 대립과 청⋅일의 경제적 침투
개항 후의 대일 무역
1893년의 무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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