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단군(檀君)의 건국과 그 자손의 쇠약
우리나라의 상고 시대는 고증(考證)할 만한 문헌이 없다. 지금으로부터【융희(隆熙) 4년(1910)부터 계산한다.】 4243년 전인 무진(戊辰, 서기전 2333년)년에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창건하였는데, 단군은 곧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신시 천왕(神市天王) 환웅(桓雄)의 아들이다. 단군은 태백산(太白山)에서 탄생하였는데, 그에게 성인의 덕[聖德]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 사람의 추대를 받았다. ‘단군’이라고 한 것은 박달나무[檀木]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혹은 ‘단(檀)’이 나라 이름이라고도 하며, 혹은 우리 말[方言]의 소리를 따라 쓴 것이라고도 하지만 어느 설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나라 이름[國號]을 조선(朝鮮)이라고 정하였는데, ‘조선’이라는 것은 아침 해[朝日]가 솟아나면 만물(萬物)이 선명해진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혹은 조수(潮水)라는 강과 산수(汕水)라는 강의 음을 따른 것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러한 설들은 지나(支那)1)의 역사 기록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한문(漢文)의 의미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깊이 믿을 바가 되지 못한다. 아마도 당시의 우리말 소리를 따라 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나라의 경계는 북쪽으로 만주(滿洲)의 흑룡강(黑龍江)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조령(鳥嶺)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지나(支那) 직례성(直隷省)과 접하였다.
나라의 도읍[國都]을 평양(平壤)에 정하고 하백(河伯) 비서갑(非西岬)의 딸을 왕후(王后)로 삼았으며, 나라 사람들에게 머리카락을 땋아 머리를 덮게 하고, 군신(君臣)과 남녀 사이의 도리 및 음식과 거처에 관련된 제도를 가르치시고, 팽오(彭吳)에게 명령을 내려 나라 안의 산과 강을 다스리게 하였다. 단군 기원후2) 59년(서기전 2275)에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에 3층으로 된 단(壇)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왕자 3명을 보내 강화도 전등산(傳燈山)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게 하였다. 또 단기 109년(서기전 2225)에 태자(太子) 부루(扶屢)를 지나(支那)의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즉위 후 도산(塗山)에서 개최한 만국회(萬國會)에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3)】로 옮긴 후에 그 후손이 쇠약해져서 단기 1212년(서기전 1122)에 지나(支那) 사람인 기자(箕子)에게 쫓겨 북부여(北扶餘)【지금의 만주】로 도읍을 옮겼다. 이 당시의 영토는 2천여 리(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