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1808)1)에 대간(大諫) 이심도(李審度)가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근원이 김귀주(金龜柱), 홍봉한(洪鳳漢)에게서 일어났다고 상소하여 진달하였다가 왕형(王刑)을 당하였다.
다음 해에 황해 감사[海伯] 이희갑(李羲甲)이 올린 말에 따라 곡산(谷山) 가람산(岢嵐山)에 있는 태조(太祖)의 치마기(馳馬基, 태조가 말을 타고 무술을 익히던 곳)와 수자천(水刺泉, 태조가 마시던 물)에 정조(正祖)의 어필(御筆)을 각비(閣庇)하였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