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동국역사 권1(삼국기(三國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임인(壬寅) [42년]

【신라 유리왕 18년 ○ 고구려 대무신왕 24년 ○ 백제 다루왕 14년 ○ 동한 광무제 건무 18년 ○ 일황 수인 71년 ○ 서력 기원 42년】

봄 3월에 가락국(駕洛國) 시조 김수로(金首露)가 즉위하였다. 처음 가락에는 부락이 9개 있어서 각기 추장을 세우고 산과 들에서 생활하며 군신(君臣) 간의 위계[位號]가 없었다. 남자 형제 6명이 있었는데 모두 영특하고 장대하였으며, 첫째를 수로라 불렀다. 수로가 그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가야(伽倻)【지금의 김해군(金海郡)이고 가야는 가락의 동음을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아우 5명이 또한 5가야의 우두머리가 되니 아라가야(阿羅伽倻)【지금의 함안군(咸安郡)】, 고령가야(古寧伽倻)【지금의 함창군(咸昌郡)】, 성산가야(星山伽倻)【지금의 성주군(星州郡)】,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고령군(高靈郡)이니, 일본(日本)이 임나(任那)라고 불렀다.】,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군(固城郡)】라고 불렀다. 그 지역이 신라(新羅) 서남쪽에 있어 모두 가락국이라고 불렀다. 수로가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으며, 허씨(許氏)를 부인으로 받아들여 9명의 아들을 낳았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으니, 지금의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허씨가 모두 같은 후예이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이르기를,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에 가락의 허 황후(許皇后)가 아유타국(阿踰陀國)【지금의 인도국(印度國)】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올 때에 붉은 돛과 진홍색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수로왕이 궁궐 서쪽에 휘장으로 된 임시 궁궐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황후가 도착하자 맞이하여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서 황후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르기를, “허 황후는 남천축국(南天竺國) 왕의 딸이다. 대개 수로왕이 먼저 인도로부터 가락으로 와서 정착하고 그 부인이 또한 이어서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나 허황되어 믿을 수가 없다.

그 후에 왕이 돌아가시니 나이 158세였다. 그의 아들 거등(居登)이 즉위하여 신라에 구원을 청하여 왜구를 방어하고 그의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거등이 죽고 마품(麻品), 거질미(居叱彌), 이시품(伊尸品)을 거쳐 좌지(坐知)가 즉위하였는데, 여색(女色)을 탐하고, 또한 그 무리를 총애하여 직임을 맡겼다. 이로 인해 나라의 정세가 크게 어지러워지다가 신하 박원도(朴元道)의 간언에 따라서 여자들을 물리쳤다. 이때에 신라가 정벌하려고 했는데, 왕이 회개한 것을 보고 계획을 중지하였다. 그 후에 또 취희(吹希), 질지(銍知), 겸지(鉗知)를 거쳐 구형(仇衡)에 이르러서 신라와 사이가 나빠져 북쪽 경계를 여러 차례 침략당했지만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신라 법흥왕(法興王) 18년(531)에 결국 항복하였다. 신라 왕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禮)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으니, 가락국이 10대를 이어 온 햇수가 49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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