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

중등교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의 자서(自序)

지난번 내가 학부(學部)로부터 번역을 의뢰받아 여러 권의 역사책을 편집하였으나, 매번 체제(體制)가 정해지지 않아 고생하였고,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하였으니, 매우 후회되고 부끄럽다. 이번에 일본인[日人] 사학자(史學者)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저술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조선사(朝鮮史)』 7책을 지었다. 이 책은 삼국 시대부터 현 왕조를 모두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부문별로 분류하여, 다른 사람들이 한 번 보고도 대번에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하고 뚜렷하게 저술하였으니, 진실로 외국인이라 해서 삐딱하게만 볼 수 없다. 이번에 이 『조선사』가 번역되었으니, 아아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솜씨를 부리게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일본인은 재능이 많아 이와 같이 정교하게 천착한 것이다.”라고 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이는 잘 모르는 자가 하는 말이다. 예전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시절에 일본인은 미개했고, 우리는 이미 문명(文明)을 이루고 있었다고 어찌 말하지 못하겠는가? 의복과 거마(車馬), 궁실(宮室)에서부터, 문장(文章)과 제도(制度), 각종 기예(技藝)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우리를 스승으로 삼아 배워 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에게 자신들의 찬란한 성과를 자랑하지만, 그것들 중 우리에게 가져가지 않은 것이 없다.

또한 근세(近世)에 대해 말하자면,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에 창과 방패로 무장한 적들이 가득 차서 국가의 형편이 한 터럭 머리카락과 같이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사야가(沙也可)라는 사람이 부하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우리에게 귀순해 온 후, 우리의 강토에서 분주하게 싸우면서 8년 동안 우리를 위해 수고를 하였으니 신하로서 최선을 다하였다.【사야가는 일본(日本) 장군으로서 임진왜란 시 부하를 거느리고 항복하며 말하기를, “동이(東夷)의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한국 문화를 사모해 왔다. 지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망령되게 전쟁을 일으켰다. 나는 속으로 비난하였으며, 부하가 되어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고 싶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께서 성명을 하사하시어, 그를 김충선(金忠善)이라 하였다. 김충선은 도처에서 적들을 토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고, 문집(文集) 3권을 세상에 남겼는데 모두 비분강개하여 옛날의 세찬 장부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 이괄(李适)의 난1) 때에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였다. 나이 80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예들은 번성하여 지금 대구군(大邱郡)에 많이 산다.】 당시에 사야가가 우리가 전란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쇠약해진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다만 그는 우리의 문물과 전장(典章)이 일본에 비해 우수함을 사모했기 때문에 귀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부터 문명이 우수했다고 할 수 있으며,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다만 전쟁 무기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모두 우리의 문물이 다른 나라보다 뒤떨어져 예전의 면목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우리나라가 미개하다는 말을 듣게 하는가? 지금 우리는 일본의 과거만 못하고, 일본의 문명은 우리의 이전 문명보다 훨씬 훌륭하게 되었으니, 아아 진실로 어찌 된 것일까?

또한 일본은 천하에 명성을 휘날려 영국(英國), 독일[德國] 등의 국가와 비교되지만, 우리나라는 폴란드[波蘭], 이집트[埃及], 인도(印度) 신세가 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같은 대륙, 같은 시대인데, 한쪽은 용과 호랑이가 뛰어오르듯이 세계를 노려보고 있고, 한쪽은 거북이가 몸을 움츠리고 암새가 머리를 조아리듯 부끄럽게 다른 나라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득실과 영욕(榮辱)이 본래 어떠하였던가?

우리는 고집스러운 마음이 아직 남아 있어 낡은 사상과 풍속에 젖어 융통성이 없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오랫동안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더욱더 헤매고 있다. 정치는 썩을 대로 썩어 백성은 어육(魚肉)과 같이 짓밟혀 뭉개진 상황이고, 기강이 해이해지고 나라의 명맥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시사(時事)에 대해 두 번 다시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오직 학문의 한 길로 나아간다면 우리나라는 그간의 실패를 만회하고 성공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옛 것에 얽매여 융통성이 없고, 무언가 해 보려면 피하고 꺼리는 것이 많다. 세계 각국의 치란(治亂)과 흥망성쇠의 궤적을 살피려고 하지도 않고,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도 감히 사적(史蹟)을 드러내어 남에게 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란 나라가 망한 후에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나라 사람들은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아아! 그렇다면 일본은 2500년을 지내 오면서 한 성(姓)이 오로지 천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기(神器)를 전해 오고 다른 성에게 옮겨지지 않았으니2),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자면, 그 나라의 역사는 결국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시기가 없을 것이다.

비단 과거의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래 각국은 차례로 미래사(未來史)를 모두 내고 있다.【지난해 『러일 전쟁 미래기(未來紀)』가 있었고, 『미일 전쟁 미래기』가 있었다. 각국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및 다른 나라들의 사정을 추측하여 미래기로 엮어 책으로 내고 있는 것이다.】 또 남의 지혜를 빌리고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것이 없어 능사로 여기고 있다. 다른 사람의 속을 훤하게 비추어, 그 음험하고 사악한 술수를 뒤집고, 미리 경고하여 후환을 경계함으로써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사적과 관련하여, 물론 동양 사람들은 그 대략을 알고 있다. 유럽 각국의 역사가들은 파피루스[藍本]에 기재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서양인들은 파피루스[藍皮]에 사적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죽백(竹帛)과 같다.】 이를 나라 사람들에게 보였다. 우리는 비록 매우 거북하고 매우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지적하여, 모든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두 눈을 가리고 완고한 마음을 품고 있다. 자국사(自國史) 역시 알지 못하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향해 우리 계보(系譜)를 징험하려고 하니, 부끄러움이 이보다 심할 수 있겠으며, 그 욕됨은 또 어떻게 하겠는가?

옛날 건문제(建文帝, 명나라의 제2대 황제)의 아들이 어릴 때 유폐되어 있다가, 50년이 지난 후 사면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미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얗게 세어 나이를 먹었음에도 소와 말도 분간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누군가 그 이유를 물어 보니, “하늘의 해도 볼 수 없었는데, 하물며 다른 것이 보이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500년이 흐른 지금도 이 이야기를 듣는 자들은 모두 슬퍼한다.【명(明)나라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군대를 일으켜 건문제를 폐하고 황제가 되었으니, 곧 영락제(永樂帝)였다. 건문제의 아들은 세 살이었는데 그 후 세 명의 황제를 거쳐 50년이 지나서야 석방되었다.】 시험 삼아 우리나라의 군자(君子)들에게 묻건대, 당신들은 황제의 아들이 소와 말을 분간하지 못한 것과 얼마나 다르겠는가? 세계 다섯 대륙의 이름을 아는 자가 몇 명에 불과하니, 아직까지 다섯 대륙을 모르면서 어찌 그 안의 여러 나라 및 강약의 형편을 알겠는가? 또한 외국이 어떠하다는 것은 논하지 않더라도, 조국(祖國)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한 번도 헤아려 보지 않는다. 인민(人民)은 도탄에 빠져 있음에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국권(國權)이 이미 땅에 떨어졌음에도 회복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3, 4천 년 전의 진부한 옛 담론으로 정론(正論)을 삼고 의(義)를 확실히 하고자 할 뿐이다. 또한 옛 성인의 유훈(遺訓)이 지닌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정사(政事)를 의논하지 않는다.”고 한다. 제비와 참새가 살던 건물의 기둥과 대들보가 모두 불타 버리고, 물고기와 자라가 솥에서 울고 있지만 이미 칼과 도마가 갖추어진 상황과 같이 나라가 위태롭다.

아아, 장차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서 처신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스스로 재앙을 만든 것이니, 누군들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겠는가? 국내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이 온통 이러할 뿐이니 슈타인[繃蘇]과 같은 인물을 키워 내기 어려운 것이다.【슈타인[繃蘇]은 프로이센[普國](지금의 독일)의 재상이었다. 100년 전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프랑스[法國] 황제 나폴레옹[拿破崙]에게 패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라의 절반을 떼어 주었고, 프랑스 주둔군 10만 명의 식량을 보급해야 했는데, 그 부담 때문에 나라가 거의 망할 뻔했다. 슈타인은 현명한 이들을 관리로 임용하여 능력을 발휘하게 하고 군정(軍政)을 개선하고 학교를 진흥했다. 그 후 프로이센의 백성이 적개심을 가지고 힘을 키워,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경오(庚午, 1870)년에 프랑스 군대를 크게 이기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사로잡았으며, 수도로 진격하여 배상금 20억을 받았다.】3) 중국 전국 시대 제(濟)나라의 고결한 선비였던 노련(魯連)이 이미 죽었으니, 누가 우리를 안전하게 하고 적당한 상황으로 회복시킬 뜻을 지니겠는가?4)

또한 한스러운 것은 사람이 누군들 자식이 없겠느냐마는, 노란 머리카락이 채 마르지 않고 품속에서 응애응애 하고 우는 어린 것들에게 내일 어떠한 상황을 만들어 줄 것인가. 우리야 본래 좋은 능력이 없어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마저도 어두운 그물 안으로 몰아넣어 남들의 노예가 되게 하는 것을 참는 것이 옳겠는가?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눈물이 절로 나오니 그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부형(父兄) 된 여러 공(公)에게 고한다. 이제부터 『통감(通鑑)』, 『사략(史略)』 등의 옛 책들은 높은 누각에 묶어 놓고, 책을 끼고 다니는 어린이들이 우리 한국의 역사를 일독(一讀)한 후 『만국사(萬國史)』를 읽어 견문을 넓히고 세계 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 군대와 형벌, 농업과 공업 등 실천적 사업에 노력하여 게으름을 피우거나 건성건성 하는 태도를 없애고 마음을 다해 나간다면, 몇 년 되지 않아 우리가 옛날의 문화를 회복하고 엄연한 독립국의 면목을 지니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후에 귀먹고 말 못하는 노인들이 북쪽 창에 높다랗게 편히 누워서, 그 자손이 어떠한지 듣게 될 것이다. 또한, 반드시 세상이 바뀐 후에라야 역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면, 감히 답하지는 못하겠지만, 한 번 묻건대 그때는 언제가 될 것인가?

병오(丙午, 1906)년 5월 13일 사동 정사(篩洞精舍)에서 현채(玄采)의 자서(自序)

1)1624년(인조 2) 이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난을 말한다.
2)거울, 칼, 옥 등의 3종 신기로 일본 고대의 신화와 역사를 기록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의 창세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손자에게 전해 준 것이라고 한다.
3)슈타인(Stein, 1757~1831)은 나폴레옹의 침입과 패배로 인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각종 제도를 개혁해 독일 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4)전국 시대 제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은 진(秦)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진나라 임금을 천자(天子)로 섬길 것을 강요받자, 차라리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고 하면서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여기서 ‘노련이 죽었다’는 것은 아무도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음을 한탄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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