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3. 국왕에게도 보통 사람 같은 이름이

어른이 된다는 것, 자와 호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속에는 후손들이 이름을 통해 조상을 기억하고 추모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좋은 이름을 남긴 조상은 좋은 기억을 남기게 되고 그렇지 못한 조상은 나쁜 기억을 남기게 되었다. 후손들이 기억하는 조상의 이름에는 자(字), 호(號), 명(名) 등이 두루 포함되 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자와 명이 중요하였다. 예컨대 개인 가문의 사당(祠堂)에 모시는 신주(神主)에는 그 사람의 관직, 성과 함께 자와 명을 썼다.

관직은 생전에 성취하였던 벼슬 이름이고, 성은 성씨, 명은 이름, 자는 유교의 성인식인 관례(冠禮)에서 받는 훈계성 의미의 두 글자였다. 이 중에서 관직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성취한 수준과 내용을 상징하였다. 이에 비해 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며, 명과 자는 세상에서 성취하라고 어른들이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성씨, 그 성씨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이 새로운 구성원에게 희망하는 명과 자, 새로운 구성원으로서 성취한 관직을 적어 놓은 신주는 작게는 해당자의 과거·현재·미래를 보여 주며, 크게는 그가 속하였던 가문의 과거·현재·미래를 보여 주었다.

<순종 황제>   
1910년경에 촬영한 대례복 차림의 순종 황제 사진이다. 순종의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으로 1907부터 1910년까지 재위하였다. 1910년에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기고 일본으로부터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예를 들어 성이 ‘홍(洪)’이고 이름이 ‘대성(大成)’이며 자가 ‘일신(日新)’인 사람이 ‘영의정’을 지내고 죽었다면, 그의 신주에는 ‘영의정홍공대성일신신주(領議政洪公大成日新神主)’라 썼다. 이 신주에 적어 놓은 글귀에는, ‘홍’ 씨 가문이 새로운 구성원에게 ‘대성’할 것을 기대하였고 아울러 대성하기 위해 ‘일신’할 것을 희망하였으며, 이 같은 가문의 요구에 부응하여 열심히 노력해 ‘영의정’에까지 올라간 그는, 홍씨 가문을 빛낸 훌륭한 조상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영의정홍공대성일신’이라는 인물은 비록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고 이 신주에 적힌 명과 자 그리고 관직을 통해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왕과 양반은 관례 때 자를 받았다. 양반들은 15∼20세 사이에 관례를 행하였지만, 왕의 적장자는 보통 8세 전후에 세자에 책봉되며 이때 관례를 행하였다. 여덟 살이면 사실 성인이 되기 이전이지만, 세자에 책봉된다는 사실 자체가 성인으로서의 책무를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순종의 정자 단자>   
신료들이 순종의 왕세자 책봉을 맞이하여 자를 세 가지씩 의논하여 올린 문서인 정자 단자(定字單子)이다. 고종이 순종의 자를 군방(群邦)으로 낙점한 것이 보인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1798년(정조 22) 정조가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정하고 그 뜻과 내력을 전서(篆書)로 적은 글이다.

관례는 어른의 표시로 모자인 관(冠)과 성인 복장을 착용하게 하고 자(字)를 지어 주는 의식이었다. 본래 관례는 자신의 집에서 치르는 것이지만, 세자의 관례는 나이 많은 종친(宗親)의 집을 빌려 거행하였다. 대궐 정전(正殿)에서 관례를 치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관례 의식을 행하는 주례(主禮)는 보통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리들이었다. 이때 두 글자의 자를 받았다. 예컨대 조선시대 태조의 자는 군진(君晉), 태종의 자는 유덕(遺德), 세종의 자는 원정(元正), 영조의 자는 광숙(光叔), 정조의 자는 형운(亨運) 등이었다. 이 같은 자에는 훌륭한 국왕이 되기를 기원하는 당시 왕실 사람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자는 관례 때 한 번 지어 평생 사용하였지만 호(號)는 그렇지 않았다. 짓고 싶을 때 자유롭게 지을 수 있는 것이 호였다. 짓는 주체도 타인일 수도 있고 스스로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호’는 ‘호칭’이라는 말 그대로 일종의 별명같이 사용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홍제명 인존>   
정조의 호인 홍재(弘齋)를 새긴 도장의 인면(印面)이다. 정조의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조선시대 국왕의 호도 자칭이거나 다른 사람이 지어 주었다. 당연히 호의 종류도 많았다. 예컨대 영조는 자성옹(自省翁·自醒翁·自惺翁), 성성옹(醒醒翁) 등 수많은 자호(自號)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호는 대부분 스스로를 반성하거나 더 열심히 노력하자는 다짐을 나타냈다. 영조는 자성옹(自省翁)이라는 자호를 가지고 이런 시를 지으며 반성하기도 하였다.

자성옹, 자성옹. 나이 80이 되도록 무엇을 이루었는고

효(孝) 하고자 하였으나 능치 못하였고, 제(弟)하고자 하였으나 능치 못하였도다

자성옹, 자송옹. 나이 80이 되도록 무엇을 이루었는고

효인가 제인가 효인가 제인가

자성옹, 자성옹. 나이 80이 되도록 무엇을 이루었는고

내 마음 견디기 어려워 이렇게 회포를 풀어 쓰노라

자성옹, 자성옹. 나이 80이 되도록 무엇을 이루었는고

길게 탄식하며 붓을 던지고 아련히 구름을 바라보노라21)

[필자] 신명호
21)『영조장조문집(英祖莊祖文集)』 어제집경당편집(御製集慶堂編輯), 권5, 「자성옹자탄(自省翁自歎)」,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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