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유구와 유물의 출토양상
신석기시대 유적의 발굴은 시굴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190여 건이 이루어졌다. 발굴은 대개 1960년대까지는 북한지역을 중심으로, 1970년대 이후부터는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495)
발굴은 주로 포함층과 패총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는 여러 종류의 유구와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로는 주거지·무덤·야외노지·석기제작지 등이 있고, 유물로는 토기·석기·골각기·토제품·자연유물 등이 있다.
가) 유구
주거지는 움집이 대부분이나 그 외에 부석주거지, 자연 및 인공동굴과 바위그늘을 사용한 예도 있다. 움집은 웅기 서포항, 용천 신암리, 온천 궁산리, 평양 남경, 봉산 지탑리, 서울 암사동, 양양 오산리나 지경동, 합천 봉계리, 금릉 송죽리유적 등으로 우리 나라의 전역에서 조사되고 있다. 부석주거지는 평양 청호리, 강화 삼거리, 춘천 내평에서, 동굴주거지는 의주 미송리, 상원 대동리·대흥리·용곡리, 춘천 교동, 단양 상시·도담 금굴, 제천 점말, 영동 원촌리에서, 바위그늘주거지는 부산 금곡동, 청도 오진리, 북제주 북촌리에서 각각 조사되었다.
무덤은 지금까지 옹진 시도, 부산 동삼동과 금곡동, 해미 휴암리의 적석 유구와 울진 후포리의 세골장유구가 알려져 왔으나 무덤유구인지의 여부와 신석기유구인지의 여부가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상노대도의 산등, 연대도, 욕지도, 부산의 북정패총에서 각각 온전한 상태의 인골이 검출되면서 무덤유구가 확인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일정한 크기의 흙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고 부장품까지 매납한 일종의 토장묘인데, 일부에는 그 위에 돌을 덮어 돌무지를 만든 것도 있는 것 같다. 그 외에 교동유적에서는 살고 있던 동굴바닥에 3인을 함께 매장한 예도 보인다. 장법은 일반적으로 身展葬이었던 것 같으나, 연대도의 일부 무덤과 범방인골의 경우처럼 屈身葬도 있었고, 후포유적의 경우처럼 세골장도 있었다.
야외노지는 얕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냇돌을 몇 겹씩 깔아 만든 원형시설물로 오산리·산등패총 등 포함층이나 패총유적에서 몇 개씩 확인되고 있다. 석기제작지는 대석 주변에 석재 원석과 작은 박편들이 일정한 범위 안에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금릉에 있는 송죽리유적의 것이 대표적이다.
나) 유물
토기는 덧무늬토기·빗살무늬토기·단도마연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덧무늬토기는 지금까지 제주도 고산리·소흑산도·돌산 송도·연대도·상노대도·동삼동·범방동·신암리·오산리·서수라유적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496) 동해안의 일부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지만 역시 그 중심지는 남해안지역이다. 근래에 와서 거창 임불리와 단양 상시 3바위그늘 등 내륙지역에도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빗살무늬토기는 서해안·남해안·동해안 등 해안지역의 유적은 물론 내륙 강변지역의 유적을 포함한 모든 신석기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이 토기는 무늬의 종류, 시문방법, 시문면적 및 그릇의 모양에서 지역 및 시기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함경도와 평안북도지방에서는 납작밑에 눌러찍은 무늬가 아가리 주변에만 시문되는 토기가, 청천강 이남의 서부지방과 한강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 및 남부지방에는 둥근밑에 그어서 시문한 무늬가 토기 전면에 시문되다가 점차 시문면적이 좁아지는 토기가 각각 출토되어 크게 두 지역군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평안도지역에서는 청천강유역의 정주 당산과 영변 세죽리유적에서, 강원도지역에서는 양양 오산리나 지경리유적 등에서 납작밑과 둥근밑의 토기가 함께 출토되고 또 토기무늬도 양지역의 것이 혼재하고 있어 이 지역이 두 문화의 접변지역임은 이미 지적된 바 있다.497)
한편 남부지방의 경우 앞시기는 덧무늬·압인문 등 아가리무늬계통의 동해안지역 납작밑토기문화가, 뒷시기는 그어서 시문한 전면무늬계통의 서해안지역 둥근밑토기문화가 각각 시기를 달리하여 분포하고 있는 한편, 이를 토착화시켜 압인문·태선침선문·단도마연토기·이중구연토기 등 남부지방만의 독특한 토기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석기는 어로용·수렵용·농경용·일상생활용 등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 여전히 간석기와 함께 뗀석기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날부분만을 간 국부마제석기가 많다. 대개 동북지방과 중·서부지방에서는 간석기의 비율이 높고 남부지방에서는 뗀석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특징이다. 청동기시대처럼 석기가 세분화되지는 않았지만 납작한 강돌의 양옆을 떼어내어 만든 그물추·이음식낚시·낫·보습·괭이 등과 같이 용도에 따른 특징이나 지역적 특색을 보이고 있는 석기들이 꽤 많이 출토되고 있다.
골각기는 주로 패총유적에서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는데, 뼈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인 바늘·송곳·찔개살·삿바늘·낚싯바늘·작살·낫 등이 있다.
그 외에 흙으로 만든 가락바퀴·흙구슬·귀걸이·펜단트와 조개껍질로 만든 팔찌와 동삼동의 가면, 동물의 이빨을 꿰어 만든 연대도의 발찌·목걸이, 서포항·오산리·동삼동·욕지도에서 나온 인물 및 동물모양의 토우 등이 있다.
자연유물은 조개껍질·물고기뼈·동물뼈 등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은 물론 당시의 기후 및 자연환경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또 상원 용곡동굴 및 연대도·욕지도·산등·범방패총과 교동에서 확인된 인골도 이 시대의 형질인류학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鄭澄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