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8권 고려 무신정권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1. 무신란과 초기의 무신정권
          • 1) 무신란의 주도세력
          • 2) 이의방 정권
          • 3) 정중부 정권
          • 4) 경대승 정권
          • 5) 이의민 정권
        • 2. 최씨무신정권의 성립과 전개
          • 1) 최씨정권의 성립
          • 2) 최씨가의 권력세습
          • 3) 최씨정권의 붕괴
        • 3. 무신란과 최씨무신정권의 역사적 성격
          • 1) 무신란의 역사적 의의
          • 2) 최씨무신정권의 성격
        • 4. 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 1) 김준 정권
            • (1) 김준의 출세
            • (2) 김준의 집권
          • 2) 임연·임유무 정권
            • (1) 임연의 출세
            • (2) 임연·임유무의 집권
          • 3) 붕괴기 무신정권의 성격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1. 사병의 형성과 도방
          • 1) 사병의 형성
          • 2) 도방
        • 2. 중방과 교정도감
          • 1) 중방
          • 2) 교정 도감
        • 3. 진양부와 정방 및 서방
          • 1) 진양부
          • 2) 정방
          • 3) 서방
        • 4. 별초군의 조직
          • 1) 마별초
          • 2) 지방별초
          • 3) 삼별초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 국왕의 권위
          • 1) 중방정치와 국왕
          • 2) 국왕의 권위
          • 3) 국왕과 문반·민중
        • 2. 무신정권과 문신
          • 1) 무신란과 문신의 동향
            • (1) 은거문사
            • (2) 소외문인
            • (3) 등용문신
          • 2) 초기 무신정권과 문신의 정치활동
        • 3. 최씨정권과 문신
          • 1) 최씨정권의 문신정책
          • 2) 최씨정권하 문신의 역할과 정치적 지위
        • 4. 무신정권기 문신의 정치의식과 그 성향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개요

 고려시대에 성립된 무신정권은 한국사상 분명히 특색있는 정권이었다. 고려의 무신정권을 독자성·주체성이 강한 정권으로 규정지어 좋을 것 같다. 그 정권은 무신들이 단순히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독창성에 입각하여 독특한 정치구조를 구축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독특한 정치를 운영하였다. 한편 무신정권도 정권인 이상 정권의 안정기조를 필요로 하였다. 그 안정기조라 할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무겸전 체제의 정비였다 하겠다. 그러므로 무신정권의 성립과정에서는 문신귀족을 대량 제거하였지만, 곧 뒤이어 문신체계를 정비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새로운 문신체계는 일부 구문신 계열을 포섭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무신정권 아래에서 과거를 통하여 등용된 신진사류가 점차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무신정권의 독자성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면에도 반영되어 독특한 양상을 자아냈지만,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그 특색이 더욱 분명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체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최씨정권의 항몽투쟁은 바로 그것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 된다. 다음에 이러한 특징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毅宗 24년(1170)에 성립되어 高宗 45년(1258)에 몰락한 특수 정권이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金俊, 林衍을 거쳐 林惟茂가 제거된 元宗 11년(1270)까지로 본다.

 鄭仲夫 등은 의종 24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방식의 정치를 운영하였으나 자체 내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쿠데타 동지들을 제거한 정중부는 明宗 9년(1179)에 청년장군 慶大升에게 살해당하였고, 경대승이 4년만에 병사하자, 상장군 李義旼이 등장하여 정권을 잡았다가 명종 26년(1196)에 장군 崔忠獻에게 살해당하였다.

 최충헌의 등장은 고려 무신정권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 오게 하였다. 최충헌이 구축한 강력한 독재체제의 기반은 정권을 자손에게 세습케 함으로써 4대 60여 년간의 최씨정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최씨정권은 최충헌의 뒤를 崔瑀(怡)가 이어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였고, 다시 崔沆·崔竩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씨정권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최우가 집권한 지 10년만에 대륙에서 蒙古가 계속 침입하였으며 그 和戰을 둘러싼 대립 갈등과 전쟁으로 입은 사회·경제적 피폐는 최씨정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거기에다가 최씨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는 어린 나이로 집권한데다가 어리석고 나약하여 어진 사람들을 멀리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가까이 함으로써 간사한 무리들이 날뛰고 참소가 성행하며 뇌물과 횡령이 자행되었으며, 거듭되는 흉년에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함으로써 인심을 크게 잃게 되었다.

 마침내 고종 45년(1258)에 대사성 柳璥·별장 김준 등이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대권은 왕에게 돌아갔으나, 실권은 김준·임연·임유무 등이 이어 가면서 행사하게 되었다. 즉 김준은 최씨정권을 타도하고 나서 최씨정권 이래 무신정권의 최고직책인 敎定別監에 임명되어 한 나라의 정권을 좌우하다가 원종 9년(1268)에 임연에게 살해당하였다. 임연은 일찍이 김준의 천거로 낭장이 되어 최의를 제거하고 최씨정권을 타도하는 데에 가담한 바 있었으나, 김준을 제거하고 나서는 왕의 폐립을 자행하는 한편,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권세를 독단하였다. 그러나 임연이 원종 11년(1270)에 병사하고 그 뒤를 이어 아들 임유무가 교정별감이 되어 또한 권세를 독단하였으나 약한 세력기반과 몽고의 압력으로 2개월도 못되어 무너지고 말았다. 임유무의 제거는 고려무신정권의 완전 몰락을 뜻하는 것이며 왕의 친정의 완전 복구를 뜻하는 것이 된다.

 고려 무신정권기의 정치형태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그 특징을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대체로 무신정권 전기에 해당되는 鄭仲夫·慶大升·李義旼이 정권을 독단하던 27년간을 들 수 있고, 또 하나는 무신정권 후기에 해당하는 최씨정권 성립 이후 林惟茂가 몰락할 때까지의 74년간을 들 수 있다. 그 특징은 전기는 무신정권으로서 아직 독자적인 執政府를 갖추지 못하고 종래의 왕권체제의 기구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무신집권자로서 초월적인 권력을 발휘하는 일종의 과도적 무신정권이었다. 정중부는 왕권체제 하의 관직인 平章事를 거쳐 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이의민은 左僕射를 거쳐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무신집권자들은 관직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여 동서양반을 위압하였으며 국왕까지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이러한 무신집권자들의 초월적인 권력은 왕권체제하의 정치기구의 하나인 重房을 배경으로 행사되었다. 중방은 원래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좌기관이었으나, 무신정권이 성립하고 나서는 무신집권자들이 이를 이용하기도 하고 또는 이의 보호를 받으면서 초월적인 권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무신정권 전기의 정치는 중방을 구성하는 상장군과 대장군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정치에 참여하였으므로 그 정치의 형태를 重房政治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방정치는 무신들에 의한 일종의 합의제 정치였다 할 수 있으나, 이렇게 합의제 정치인 중방정치가 행하여진 것은 무신집권자들이 아직 독자적인 집권부를 갖추지 못한 형태, 즉 무신정권으로서 기반이 확립되지 못한 과도적 형태였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최씨정권이 성립된 무신정권 후기로 들면서 그 면모를 크게 달리하게 되었다. 그것으로 후기 무신정권, 즉 최씨정권은 독자적인 집권부를 갖추고 그 집권부를 중심으로 강력한 권력을 발휘하는 무신집권자 1인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1인 독재체제의 확립은 곧 무신정권의 확립을 뜻하는 것이 되며, 그 독재체재의 정비는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아들 최우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최충헌은 명종 26년(1196)에 이의민의 일당을 제거하고 나서 많은 朝臣을 학살하는 한편, 왕에게 封事 10條를 올려 정치·경제·사회의 혼란을 시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최충헌이 장차 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마침내 최충헌은 명종과 신종을 내몰고 희종을 맞이하는 한편, 희종 5년(1209)에는 靑郊驛吏와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연결하여 최충헌을 죽이려 한 사건을 계기로 敎定都監을 설치하게 되었다.

 교정도감은 처음에는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이용되었으나, 뒤에는 비위의 규찰·인사행정·세정 및 기타의 서정을 처리하는 초월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대로 최씨정권의 집권부가 되었다. 여기에서 무신정권 정확히 말하여 최씨정권은 왕권체제와는 별도로 강력한 집권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그대로 무신정권의 확립을 뜻하는 것이 된다. 이 교정도감에 대하여≪高麗史≫百官志에는 “최충헌이 정권을 독단함에 있어서 모든 조처가 교정도감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여 그 기능이 막강하였음을 설명하여 주고 있으나, 이 교정도감은 최씨정권 전기간은 물론, 최씨정권이 몰락된 후에도 김준과 임연 부자에 이어지다가 임유무의 몰락과 더불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교정도감의 장으로 敎定別監의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역대 무신집권자는 이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일국의 정치를 좌우하였는데, 그 임명권자는 형식상 왕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무신집권자로서는 필수적인 직책이기도 하였고 또 최씨집권체제에서 세습된 직책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정별감은 장군직에 있는 자라야 임명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최충헌이 장군의 신분으로 교정별감이 되었고, 최우도 장군으로서 최충헌을 이어 교정별감이 되었으며, 최항은 최우의 서자로서 일찍이 출가하여 禪師가 되어 이름을 萬全이라고 하였는데 고종 34년(1247)에 환속하여 左右衛 上護軍이 되었다가 최우를 이어 교정별감이 되었다. 그리고 최의는 최항의 사생아로서 군직을 주어도 그것을 거절하여 오다가 최항이 죽자 왕이 그를 借將軍을 삼고 이어서 교정별감에 임명하였던 것으로 이렇게 군직을 싫어하는 최의를 차장군에 임명한 것은 교정별감에 임명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 분명하다. 최씨정권이 몰락한 후에는 장군 김준이 또한 교정별감에 임명되었고, 김준이 타도된 후에는 임연과 임유무 부자가 군직자로서 또한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정치를 요리하였다.

 최씨정권에 있어서 교정도감에 버금가는 권력기구로서 政房을 들 수 있다. 정방은 고종 12년(1225)에 최우가 그 사저에 설치한 인사행정 즉 銓政을 행하던 기관이었으나, 최우가 죽은 후에도 역대 무신집권자들에 의하여 계승되던 권력기구였다. 이 정방은 무신정권이 몰락된 후에도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국가기구로 되어 고려 말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존폐가 있었고, 知印房 또는 箚子房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워지다가 창왕 때 尙瑞司로 개편되었다.

 정방은 최우 때 설치되었지만, 최씨정권이 백관의 인사행정을 독단한 것은 이미 최충헌 때부터였으며, 최우가 정방을 설치한 것은 종전에 교정도감에서 행하던 인사행정을 분리시켜 독자적인 기구로 독립시킨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최씨정권이 일국의 인사행정에 관여한 것은,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지 3년만에 兵部尙書에 知吏部事를 겸하여 문무관의 인사행정에 깊이 관여한 것에서 비롯한다. 교정도감을 설치한 후에는 그를 중심으로 일국의 인사행정을 장악하여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정방의 설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종전의 교정도감의 기능 가운데 인사행정을 분리시켜 그것을 한층 더 강화하여 제도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무신정권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배경은 사적인 무력집단이었다. 무신정권의 사적 무력집단으로는 都房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三別抄와 馬別抄를 들 수 있다. 도방은 원래 경대승에 의하여 처음으로 설치된 사병집단이었다. 경대승이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자 무신들은 경대승을 공동의 적으로 돌려 적의를 품게 되었다. 그것은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는데, 정중부가 제거됨으로써 그것이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경대승은 신변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되어 자신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에서 결사대 1백 수십 명을 사저에 머물게 하여 그 이름을 도방이라 하였다.

 이 도방은 경대승이 죽자 폐지되고 말았다가, 최충헌에 의하여 부활되어 크게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씨정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무력기반이 되었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타도할 때부터 많은 사병을 양성하여 왔으나, 신종 3년(1200)에 6番都房이란 이름으로써 최씨정권의 권력기구의 하나로 사병제를 제도화하였다. 이 도방은 아들 최우 때에 가서 한층 더 강화되어 내외도방으로 개편되었는데,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그의 사저를 호위하게 하고 외도방은 그의 친척과 기타 외부의 호위를 맡게 한 것 같다. 도방은 최항 때에 가서 분번제를 더욱 확대하여 36번으로 조직 강화하였다. 이 도방 36번은 최우 때의 내외도방을 통합하여 확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확장 강화는 그 당시 몽고와의 전쟁이 절정에 달한 상황에 대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의에 의하여 계승된 도방 36번은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 그 조직 일부에 변동이 있었던 듯하지만, 김준과 임연 부자에 의하여 계승 장악되다가 임유무의 몰락과 함께 도방도 또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도방은 무신집권자들의 사적 호위기관으로 그 병력도 굉장하였으며 규모가 클 때는 36번의 분번 조직을 갖추었으며, 그 장비나 기동력에 있어서도 국가의 군대를 능가하는 정도였다.

 무신정권의 무력집권장치 가운데 또 하나인 삼별초는 최씨정권 때 조직된 사병집단이면서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반관반민의 특수부대였다. 삼별초의 조직은 최우가 夜別抄를 조직하여 밤에 순찰시켜 도둑을 단속한 데서 비롯된 것이나, 그 후 도둑이 전국에서 일어남에 야별초를 늘리어 左右別抄로 나누었고, 거기에 다시 나라 사람으로 몽고에 잡혀 갔다가 도망온 자들로써 편성한 神義軍을 합하여 그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완성 시기는 대개 최우 때로 보인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최씨정권의 爪牙로 이용되었으며, 최씨정권이 몰락한 후에는 김준과 임연 부자에게 계승 이용되다가 삼별초의 항전을 계기로 마침내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삼별초는 그 시초가 밤에 도둑을 단속하는 데 있었지만 차츰 그 임무가 확대되어 경찰 임무인 捕盜·禁暴·刑獄·鞠囚 이외에 군사 임무인 도성의 수비를 비롯하여 친위대·특공대·정찰대 등의 역할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역할은 경찰과 군사면에 있어서 두드러진 것이 있었으며, 특히 抗蒙戰爭에 있어서 그 전반에는 정부군의 활약이 많았으나, 그 후반에 들면서는 정부군의 활약은 거의 없어지고 그 대신 삼별초의 활약이 활발하여져 항몽전쟁을 삼별초가 도맡아 행한 느낌마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삼별초의 항전은 주체성의 발휘에 있어서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삼별초는 최씨정권에서 성립된 사병이기는 하지만 그 임무가 경찰 또는 군사를 맡는 公兵의 성격을 지녔다. 삼별초를 반관반민의 군대로 규정짓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무신정권의 또 하나의 무력집단으로 마별초를 들 수 있다. 마별초는 최우가 몽고의 기병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기병대로서 최씨정권의 호위 및 의장대로 활약하다가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마별초는 최씨정권의 기병의 일종으로 도방과 함께 그 장비와 치장이 굉장한 것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케 하였다는 것이다.

 무신정권의 특수한 호위기관으로 書房이 있었다. 서방도 최씨정권에서 이루어진 권력기구의 하나로서 최우에 의하여 시작되어 임유무 때까지 계속되다가 막을 내린 숙위기관이었다. 이 서방에 대하여≪高麗史≫崔忠獻傳에 부기된 崔怡(瑀)傳은 “최이의 문객 중에는 당대의 名儒가 많아 이들을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서방에 숙위케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최우는 문객 가운데 무사로써 도방을 구성하고 문사로써 서방을 구성하여 문무쌍전의 숙위기관을 갖춘 것이 된다. 이렇게 최우가 서방을 설치하고 문사들로 하여금 교대로 숙위케 한 것은, 그들이 故事에 밝고 식견이 높아 정치에 있어서 고문에 붙이고자 한 데에 있었고, 한편 문사들은 무신정권 수립 이래 불우한 입장에 있다가 최우 때에 이르러 정방의 설치와 함께 서방의 설치로 비로소 안식처를 얻었다고 하겠다. 서방은 3번의 분번제로 편성되어 그 활약도 활발하여 도방 및 삼별초와 함께 새 집권자 추대에 참여하기도 하고 최씨정권이 타도된 후에는 왕의 행차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무신정권이 수립된 후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에 의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반란이었다. 농민의 반란은 무신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방관과 향리들이 농민에 대하여 압박과 수탈을 감행함으로써 농촌사회가 피폐하고 유민이 증가하여 마침내 도둑들이 횡행하고 반란이 일어나 정중부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의종 때만 하더라도 東州(鐵原)·宣州(德源) 등지에서 대규모의 도둑들이 일어났고, 耽羅(濟州島)에서는 수령을 내쫓는 반란이 일어났었다. 이러한 농민의 반란은 무신정권이 성립된 후에는 더욱 격화되었고, 거기에 천민들도 가담하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발전하여 사회는 더욱 혼란하여졌다.

 이렇게 무신정권기에 들면서 민란이 격화된 것은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평과 불만이 무신의 난이 지니는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받아 폭발한 것이며 이 폭발된 민란의 근원으로는 농민의 궁핍, 민중의 성장, 중앙 통치력의 약화 등을 들 수 있다. 이미 문신귀족정치기부터 농민의 궁핍은 농민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무신정권이 성립되고 나서는 집권층의 무신들이 토지겸병을 자행하고 지방관들의 횡포와 수탈이 성행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졌다. 또 무신정권기에 들면서 일어난 신분질서의 동요와 그 변화는 민중의 지위와 신분의식을 상승시켰으며, 무신의 난 후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으로 중앙의 통제력은 크게 약화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기에 처음으로 일어난 민란은 명종 2년(1172)에 서북면의 昌州(昌城)·成州(成川)·鐵州(鐵山)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이 민란은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하여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차츰 전국적으로 미쳐 명종 5년(1175)에는 南賊石令史가 반란을 일으켰다. 석령사가 반란을 일으킨 중심지는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남적이라 한 것으로 보아 開城의 남쪽인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남도지방에서 석령사가 반란을 일으킨 이듬해 公州 鳴鶴所의 亡伊·亡所伊 등이 무리를 모아 스스로 山行兵馬使라 일컫고 반란을 일으켜 공주를 함락시킨 것이 크게 주목을 끈다. 이 망이·망소이의 난은 그 규모가 매우 큰 것이어서 한 때 德山·稷山·牙山·淸州 근처 등을 휩쓸다가 1년만에 평정당하고 말았다. 한편 망이·망소이의 난과 때를 같이하여 덕산을 중심으로 孫淸이 반란을 일으켰고, 益州(益山)에서는 彌勒山賊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명종 12년(1182)에는 全州에서 군인과 관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전주의 반란은 나라에서 배를 만듦에 있어서 관리들의 독촉이 지나친데서 일어난 것이다. 이 밖에도 南原에서 무뢰한(유민)들이 반란이 일으키는 등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민란은 충청도·전라도 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방에서도 일어났는데, 그것은 규모나 세력에 있어서 한층 더 심한 양상을 띠었다. 명종 16년에는 晋州守 金光允과 安東守 李光實 등의 심한 탐학으로 농민들이 견디지 못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므로 정부에서 이들 수령을 귀양보낸 일이 있었으며, 명종 18년에는 東京(慶州)에서 반란이 일어나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동경에서 반란이 일어난 3년 뒤 雲門(淸道)의 金沙彌와 草田(星州)의 孝心 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뒤에 합세하여 그 수가 몇 만을 헤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반란은 결국 정부군에 의하여 평정되고 말았지만, 密陽 싸움에서 반란군 7천명이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나서도 반란은 거듭 일어났다. 신종 2년(1199)에 溟州 (江陵)에서 반란이 일어나 三陟·蔚珍의 2현이 함락되었으며, 동경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 명주의 반란 세력과 합세하여 이웃의 주군을 약탈하였다. 다시 그 이듬해에는 밀양의 관노 50여 명이 운문의 반란 세력에 투속하였고, 金州(金海)의 雜族人이 호족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신종 5년에는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경주에서는 별초군의 반란이 있었다.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을 때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 가운데 그 규모가 큰 것으로는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과 동경에서 일어난 민란을 들 수 있다. 즉 진주에서는 公私의 노비들이 평소 州吏와 반목 대립하여 오다가 신종 3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陜州(陜川)部曲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기세를 떨치다가 1년만에 평정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동경에서는 앞서 김사미·효심 등과 연결한 반란이 있었으나, 신종 5년에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 “고려의 왕업이 거의 다 되었으니,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라는 격문을 돌리며 운문·울진·초전 등 경상도 일대의 반란 세력의 호응을 받아 그 세력이 자못 떨치어 정부가 그것을 꺾는데 10여 년의 세월을 소모하였다.

 최충헌 집권기의 민란은 위에서 든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신종 6년에는 榮州의 浮石寺와 大邱의 符仁寺, 靑松의 雙岩寺의 승도들이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귀양간 일이 있었고, 고종 4년(1217)에는 西京(平壤)에서 崔光秀가 반란 을 일으킨 것 등이 있으나, 보다 주목되는 것은 신종 원년(1198)에 개성에서 일어난 私奴 萬積의 난이다. 만적은 개성 북산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공사의 노예를 모아 놓고 “將相이 어찌 처음부터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 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의 매질 밑에서 고생만 하여야 할 것인 가”라고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탄로나서 만적 등 1백여 명이 잡혀 죽음을 당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반란은 공사노예들이 그들의 신분 해방과 더 나아가 정권의 담당자가 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끄는 것이다.

 무신정권기의 반란으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사원세력의 반란이다. 최충헌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명종 4년(1174)에 重光寺·弘護寺·歸法寺·弘化寺 등의 승려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이의방을 죽이려 하였고, 명종 8년에는 興王寺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최충헌이 집권하고 나서는 신종 5년(1202)에 대구의 부인사와 桐華寺의 승려들이 경주 별초군의 반란에 가담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위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영주 부석사와 대구 부인사의 승려들이 반란을 꾀하다가 잡히어 귀양갔으며, 고종 4년(1217)에는 흥왕사를 비롯하여 弘圓寺·景福寺·王輪寺와 始興의 安養寺·廣州의 修理寺 등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원세력의 반란은 무신정권의 성립으로 불교를 보호하여 오던 왕실과 문신귀족이 무력화 내지 몰락한 데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무신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무신정권이 성립되고 나서 농민·노예 등 하부계층에 의한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사원세력도 무신정권에 도전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켰 다. 이에 대하여 무신정권은 강경책을 써서 토벌을 강행하는 한편, 관직이나 물품을 주기도 하고 鄕·所·部曲을 郡縣으로 승격시켜 주민의 신분적 해방을 기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반란을 진정시키는 데에 노력하였다. 특히 최우는 강경책보다는 회유책에 주력하여 반란을 사전에 밀고하는 자 또는 반란세력의 일부를 포섭하여 반란세력으로 반란을 제어하려 하였고, 또 반란세력의 두목을 포섭하여 그 세력을 와해시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반란의 기세는 차츰 진정 단계에 들게 되었다. 이렇게 최우 때 반란의 기세가 진정 단계에 들게 된 것에는 몽고의 침입도 큰 몫을 하였다. 즉 몽고의 침입으로 민족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었고, 그것은 내부적 갈등에서 자아낸 민중의 저항의식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최우 때 민란이 근절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으로 일어나는 산발적인 민란은 계속되었고 그 가운데는 몽고군의 향도 또는 영합하는 형태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무신정권기의 경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토지제도가 크게 붕괴되었다는 점이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문신귀족의 발호기로부터 문란하여지기 시작하였지만, 무신정권기에 들면서는 그것이 더욱 심하였다. 권세를 잡은 무신들은 닥치는 대로 토지를 강점하였고, 그 밖의 권세가·호족·사원 등도 혼란한 세태를 틈타 함부로 토지를 겸병하여 한 집안의 토지가 주에서 군에 걸치는 광대한 것이었고, 한 토지에는 지주가 두 세 명씩 나타나는 상태여서 농민은 이중 삼중으로 수탈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국고 수입이 감소되어 국가재정은 악화 일로에 놓여지게 되고 농민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져 빈곤과 고통 속으로 빠져 들게 되었다. 이는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민란을 일으키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서 무신정권이 성립되자 문인·학자들 가운데는 출세를 단념하고 산촌에 묻혀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자도 있었다. 이들 산촌에 묻힌 문인들은 음주와 시가를 즐기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스스로 竹林七賢에 비기던 吳世才·林椿·李仁老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을 등진 자가 있었지만, 새로이 출세의 길을 물색하는 자도 있었다. 문호로 이름이 높은 이인로는 무신의 난을 당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세상이 조용하여지자 다시 나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였으며, 오세재도 벼슬길을 모색하여 5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천거를 받지 못하여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고, 임춘도 벼슬길을 찾아 과거에 응시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씨정권기에 들면서 최충헌이 문사를 포섭 우대하고, 최우는 정방 과 서방을 설치하여 문사를 등용함으로써 문인·학자들의 출세의 길이 크게 트이게 되어 李仁老·李奎報·崔滋 등 저명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최씨정권에서 널리 문인·학자들을 등용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을 등진 문인이건 출세를 한 문인이건 서로 공통되는 일면이 있어 이들은 서로 얽혀 하나의 문학세계를 형성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패관문학인 것이다.

 그 작품으로는 전설·일화·시화 등을 소재로 한 이인로의≪破閑集≫, 이규보의≪白雲小說≫, 최자의≪補閑集≫등이 있으며, 좀 뒤에 나온 李齊賢의≪櫟翁稗說≫이 있다. 그리고 물건을 의인화하여 쓴 임춘의≪孔方傳≫, 이규보의≪麴先生傳≫, 李穀의≪竹夫人傳≫등의 설화문학도 행해졌다. 또 무신정권기는 대외적으로 주체의식이 강렬하여 이규보와 같은 이는 장편의 서사시로≪東明王篇≫을 엮어 고려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임을 널리 자랑하려고 하였다.

 무신정권기에 있어서 문화적으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曹溪宗의 확립이다. 앞서 義天이 天台宗을 창설하고 선문 9산의 승려들을 많이 흡수함으로써 禪宗이 큰 타격을 받았으나, 이 선문 9산은 무신정권이 성립될 무렵 종파의 이름을 조계종이라 하고 그 중흥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계종의 종풍을 크게 떨치게 한 이는 知訥(普照國師)이었는데, 그는 무신정권기에 松廣寺를 중심으로 활약하여 禪學과 禪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그의 일관된 사상은 定慧雙修와 頓悟漸修였다. 그는 이것을 후학들에게 惺寂等持門·圓頓信解門·徑截門의 세 가지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성적등지문’은 行을 말하는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信을 말하는 것이며, ‘경절문’은 證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 가짐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의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는 결국 마음을 깨닫고 닦아 가기 위한 길을 제시한 것이며, 그의 저술들은 모두 이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의 풀이로써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특징은 좌선을 제일로 하나 염불이나 간경도 중요시하며 敎를 중심으로 교종과 선종의 조화를 도모한 義天의 敎觀兼修와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렇게 지눌에 의하여 확립된 海東曹溪宗은 무신정권기에 확립된 고려 불교의 특이한 존재로서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종래의 교종이 현실세계와 결부하여 이익을 추구한 데에 대하여 조계종은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고 불교의 내면적 발전을 추구한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즉 전자가 왕족과 문신귀족과 결탁하여 세속적 불교로 발전한 데에 대하여 후자는 산간 불교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여 나아갔던 것으로, 이러한 점에서 조계종은 무신정권의 일정한 보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기에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주체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 그 특색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최씨정권의 항몽투쟁을 들 수 있는데 몽고와의 30년전쟁은 최씨정권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최우가 집권하고 있던 고종 18년(1231)에 몽고가 고려를 처음으로 침범하였다. 이 침범은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대하여 막대한 물품과 童男童女·工匠 등 인신까지도 요구하여 고려를 크게 괴롭혔다. 여기에서 최우는 몽고와 끝내 싸울 것을 결심하고 고종 19년에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이 강화천도는 몽고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포고가 되어 고종 45년에 최씨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반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씨정권이 몰락한 후에는 김준·임연 등 무신실권자들에 의하여 항몽전쟁이 계속되다가 원종 11년(1270)에는 마침내 삼별초의 항전으로 이어졌다.

 몽고와 항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피차간 사신의 왕래가 있었고 그 사이의 교섭에서 고려는 몽고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며, 몽고는 철군에 앞서 개성 환도와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몽고의 요구에 대하여 국왕과 문신들은 그 요구를 받아 들일 것을 희망하였으나 최씨정권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최씨정권의 이러한 태도는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면 최씨정권의 존재가 무의미하여질 우려도 있었기는 하지만, 원래 무신정권이 지니는 독자성, 주체의식이 더 강력히 작용한 것이라 하겠다. 실제 대몽항전에 있어서 전반기에는 정부군의 활약이 활발하였으나, 후반기에 들면서는 그 활약이 미약하여지는 반면에 최씨정권의 사병인 삼별초의 활동이 활발하여지고 있는데 이것은 최씨정권의 항전태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閔丙河>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