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여러 신분층 가운데 특히 양인과 천인의 신분이동이 고려 후기에 와서 더 수월하여진 데에는 그들 자신들의 항쟁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도 중요하다.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양인 가운데에서 일반 농민이나 그보다 낮은 소 ·부곡인들과 공사노비들에 의한 반란이 꼬리를 물고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012) 이러한 농민이나 천인의 반란은 제각기 성격이 다른 것이고, 그들의 바라던 바도 역시 한결같지는 않았다. 농민 반란으로는 西北面 지역 농민의 항쟁, 全州民의 항쟁, 雲門·草田 농민의 항쟁, 慶州民의 항쟁 등이 있었는데, 국가의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가 농민들의 반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하고 나선 경제적 수탈도 그들의 신분적 한계와 직접 관련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항쟁에는 일면 신분해방의 의도도 잠재하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분 해방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뚜렷한 것은 노비이거나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사람들에 의한 반란이었다. 鳴鶴所民의 항쟁, 奴兀部曲民의 항쟁이나 晋州 公私 奴隷의 반란 및 萬積의 난이 그러한 예들이다. 특히 만적은 난을 선동하면서 “公卿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동지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유명하다.
농민의 반란이나 천민의 반란은 최씨집권기에 오면 대부분 모두 진압되었고, 어느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신분제의 동요 가 더욱 커져서 신분이동을 촉진하게 되었음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특히 향 ·부곡·소 등의 특수한 행정구역이 점차 소멸되기에 이른 것은 그들의 항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012) |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온 바 있었지만, 그 연구들은 모두가 개별적인 것이었다. 최근에 이 문제를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룬 연구가 나왔는데 여기서의 설명은 대체로 그에 따른 것이다. 李貞信,≪高麗武臣政權期農民·賤民抗爭硏究≫(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1)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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