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후금의 압력과 조선의 태도
정묘화약에 대한 불만, 모문룡과 동강진문제, 범월·쇄환의 시비, 개시와 양국간의 마찰 등을 둘러싼 분쟁으로 조선과 후금간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그러면서도 후금은 대규모의 병력을 대명전선에 투입하여 조선에 대해 더 이상의 압력을 가해오지 못했다.
후금은 인조 5년 조선의 침입에 성공한 뒤, 다음해에는 內夢古로 진출하여 인조 10년에는 이 곳에서 패권을 잡고 있던 징기스칸 직계의 察哈爾(챠하르) 部를 親征하고, 이어 내몽고의 諸部를 복속시켜 만주의 거의 전역을 차지하여 북경공략을 실현에 옮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세변화로 인하여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종은 조선의 秋信使가 가져간 예물을 받지 않고, 후금의 사신을 대하는 조선의 대소각원의 예가 「兄弟之國」의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은 실책이며, 명의 사신을 접하는 예와 같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兄弟之盟」을 「君臣之義」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歲幣를 늘러서 황금 1만 냥, 五色布 10만 同(一同은 50疋) 백금(銀) 1만 냥, 白苧布 1만 동, 精兵 3만 명, 戰馬 3천 필은 요구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위약을 중대시하여 처음에는 兵船·同盟 등의 요구를 사절하고, 세폐는 虎皮를 황금으로 대신하고 그 외의 것은 반감해 주도록 교섭하기 위하여 春信使 申得淵을 후금에 보냈다. 그러나 신득연은 심양에 이르지도 못하고 돌아왔으며, 재차 金大乾을 보냈으나 또한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뿐 아니라 김대건이 귀국할 때 후금의 태종은 국서를 보내어 다음과 같은 점을 들어서 조선을 힐책하며 맹약을 어긴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였다. 즉 후금이 의주에서 철병할 때 조선은 만주측의 도망자를 쇄환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고, 동강진의 漢人이 상륙하여 경작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며, 후금의 叛將 劉海와 그 아우를 조선이 동강진에 轉送하였고, 국왕의 族弟를 親弟라고 사칭하였으며, 개시를 단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때 조선에서는 후금의 무례한 태도에 격분하여 화의를 끊고 전쟁에 대비하게 되었다. 인조가 親征을 위하여 군비를 갖추고 그 길에 오르려고 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척화배금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는 데도 조선은 絶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인조 14년(1636)에는 僉知中樞府事 羅德憲과 同知中樞府事 李廓을 각각 春信使와 回答使로 삼아 심양으로 보내는 등 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한편 후금은 인조 13년에 챠하르지방을 평정하고 元朝 傳國의 옥새를 얻었다. 이것은 후금에 있어서는 중국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좋은 구실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 무렵에 후금에서는 만주·몽고의 貝勒들로 하여금 태종에게 尊號를 올리게 하자는 의론이 있었다. 戶部承政 瑪福培(馬夫太), 承政 英俄爾岱(龍骨大) 등은 몽고의 諸將과 동행하여 조선에 와서 후금의 汗에게 존호를 올릴 것이니 조선도 신하가 되어 섬기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대한 조선의 격분은 절정에 달하여, 大司諫 鄭蘊은 대의를 밝혀서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掌令 洪翼漢과 館學儒生들은 후금의 사신을 베이고 국서를 불사를 것을 주장하였으며, 弘文館·司諫院도 斥和宣戰을 극렬히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 사신들을 감시토록 하니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험악하여짐을 깨닫고 민가의 말을 빼앗아 도망하였다.458) 이때 조선조정은 적의 침입에 대처할 군비나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으나 비분을 참을 수 없어 8도에 諭文을 내려 충의의 군사를 모집하고 의주를 비롯한 西道에 병기를 보냈다. 그리고 絶和防備의 諭書를 평양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가던 후금의 사신이 빼앗아갔다. 후금은 그제야 조선의 결의를 알고 다시 침입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인조 14년 4월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崇德」이라 開元하고 汗은 「寬溫仁聖皇帝」의 존호를 받았다. 그 때 조선의 춘신사 나덕헌과 회답사 이확 등은 심양에 있으면서 그 즉위식에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구타를 당하면서도 끝내 허리를 굽혀 陪臣의 예를 행하라는 강요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이들을 용서하여 국서를 주어 돌려보냈는데, 그 書式이 전과 달랐다. 後金汗을 大淸皇帝라 하고 조선을 爾國이라 하였으며,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청은 대군으로 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조선에서는 그 국서에‘황제’라 칭하여 있음을 보고 나덕헌 등이 僭號의 서를 받아 온 죄를 논하여 이들을 梟示하자는 주장까지 있었다. 마침내 나덕헌은 의주 白馬山城에, 이확은 寧邊 劒山山城에 유배되었고, 척화론자인 吳達濟·尹集 등은 주화론자인 崔鳴吉 등을 참수하자고 상소하는 등 排金의 기세가 갈수록 더했다. 조선안에서의 일부 주화론의 형세를 잠시 지켜보던 청 태종은 그 해 11월에 조선의 사신이 심양에 이르자 그들에게 조선이 왕자·대신과 척화론자들을 청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면 출병하겠다고 거듭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또 다시 이를 묵살하였다.
458) | 馬夫太·龍骨大 등은 仁祖妃(仁烈王后) 韓氏의 吊喪을 겸하여 왔으므로 禁川橋에 空帷를 별도로 설치하여 그 곳에서 行祭케 하고 그 幕 뒤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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