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2권 조선 후기의 정치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2. 세도정치의 전개1) 순조대의 세도정치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탕평책 실시의 배경
          • 1) 붕당정치의 위기
          • 2) 탕평론의 대두
        • 2. 영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정비
          • 1) 탕평책 시행
            • (1) 탕평책의 제기
            • (2) 완론탕평파의 대세 장악과 반탕평파·준론탕평파의 연대
            • (3) 정국의 추이
          • 2) 정치 구조의 변동
          • 3) 기본 법전의 정비
          • 4) 군영 정비와 군주권 강화
        • 3. 정조대 탕평정국과 왕정체제의 강화
          • 1) 준론탕평과 군신 의리
            • (1) 준론탕평론의 적용
            • (2) 정국의 추이
            • (3) 정국운영의 특징
          • 2) 규장각과 왕정
          • 3) 장용영과 군주권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1. 양역의 편성과 폐단
          • 1) 양역의 편성
          • 2) 양역의 모순과 폐단
        • 2. 양역변통론의 추이
          • 1) 양역변통론의 여러 형태
          • 2) 양역변통론의 대두
          • 3) 양역변통론의 전개
        • 3.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 1) 균역법의 제정 경위
            • (1) 감필
            • (2) 급대재원의 마련
          • 2) 균역법의 내용
            • (1) 감필균역
            • (2) 균역청
            • (3) 군액감축
            • (4) 급대재원 조달
            • (5) 급대
          • 3) 균역법의 의미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1. 세도정치의 성립과 운영 구조
          • 1) 세도정치의 성립
            • (1) 권세가의 권력 독점
            • (2) 왕권의 약화와 붕당의 퇴조
          • 2) 세도정치의 성격
            • (1) 정치 참여층
            • (2) 권력의 주체
            • (3) 국정 인식과 정책
          • 3) 세도정치의 운영 구조
            • (1) 비변사
            • (2) 중앙 군영
            • (3) 언로와 공론
        • 2. 세도정치의 전개
          • 1) 순조대의 세도정치
            • (1)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순조 즉위년∼3년)
            • (2) 순조 친정 초기(순조 4년∼11년)
            • (3) 순조 친정 중기(순조 12년∼26년)
            • (4)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순조 27년∼30년 5월)
            • (5) 순조 친정 말기(순조 30년 6월∼34년)
          • 2) 헌종대의 세도정치
            • (1) 헌종대 순원왕후 수렴청정기(헌종 즉위년∼6년)
            • (2) 헌종 친정기(헌종 7년∼14년)
          • 3) 철종대의 세도정치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1. 삼정의 문란
          • 1) 전세제도의 문란
            • (1) 전결세 항목의 증가
            • (2) 전정의 부실
            • (3) 전정의 폐단
          • 2) 군역제의 해이
            • (1) 군역제의 변화
            • (2) 군역제 개혁
            • (3) 군역제의 문란
          • 3) 환곡제의 변질
            • (1) 환곡제 운영
        • 2. 삼정개혁론의 전개
          • 1) 19세기 전반기의 삼정개혁론
          • 2) 1862년 농민항쟁기의 삼정개혁론
            • (1) 삼정에 대한 책문
            • (2) 삼정개혁방안
          • 3) 삼정이정론의 반영
        • 3. 부세제도 개선의 한계
          • 1) 삼정체제의 구조적 모순
          • 2) 전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전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 (2) 정책 추진의 실상과 한계
          • 3) 군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군정의 구조적 문제와 이정책 수립
            •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 4) 환정이정책과 정책의 추진
            • (1) 환정의 구조적 문제와「파환귀결책」
            • (2) 정책추진의 실상과 한계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1. 청국과의 관계
          • 1) 호란 후 대청관계의 수립
          • 2) 심양에서의 소현세자
          • 3) 1650년대 이후 북벌론과 나선정벌에의 출병
          • 4) 백두산 정계비 문제
          • 5) 조선과 청의 문화적 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1) 왜란 이후 조일 통교의 회복
            • (1) 17세기 초 국교 회복 교섭과 대일본정책
            • (2) 기유약조의 체결과 통교체제의 확립
            • (3) 통교 회복 직후 조일 교린관계의 실태
          • 2) 17세기 중반 조일 통교체제의 개편
            • (1) 국서개작사건과 통교루트의 일원화
            • (2) 통교체제의 개편
            • (3) 겸대제 실시와 외교 사행의 정비
            • (4) 왜관 중심의 통교·무역과 조일 교섭체계의 형성
          • 3) 17세기 후반 이후 조일 통교양상의 변화
            • (1) 1711년 신묘년 통신사에 대한 의례 변경과 그 의미
            • (2) 17세기 후반 조일 양국민의 접촉과 대일정책
          • 4) 19세기 조일 통교체제의 왜곡
            • (1) 통신사 의례의 왜곡
            • (2) 조일 교린관계의 변화
          • 5) 개항 전후 양국관계의 추이와 전근대 통교체제의 붕괴
            • (1) 개항 전 일본에서의 정치적 변동과 대마번의 조일 통교 대행
            • (2) 왜관 침탈과 조일관계의 변질
            • (3) 조일수호조규 성립과 전근대 조일 통교체제의 붕괴
        • 3. 서양과의 관계
          • 1) 조선과 서세동점
          • 2) 조선 선교의 시도
          • 3) 서양인과의 접촉
          • 4) 이양선의 출현
          • 5) 서양인의 조선 인식
          • 6) 지도 제작과 조선 인식의 확대
          • 7) 조선인의 서양 인식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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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조대의 세도정치

(1)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순조 즉위년∼3년)

 순조 초년의 정치는 정치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外戚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세도정치기의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였지만, 국정 운영 방식은 순조대 중반 이후의 정치와 성격이 매우 달랐다. 金祖淳 이후의 외척이 先王으로부터 국왕 보도를 위촉받은 사실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에 비해 순조 초년의 외척은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의 권력을 바탕으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순조 초년 貞純王后 수렴청정기 외척의 권력은 국왕권을 능가하고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비록 대왕대비가 대신하였지만 국왕권과 결합되어 있었고 그것을 통하여 행사되었던 것이다.

 정조 24년(1800) 6월 28일 정조가 갑자기 죽고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老論 내부의 時派와 僻派 사이의 대립이 전면에 부각되었다.372) 그것은 영조 말년 사도세자의 장인 豊山 洪氏 洪鳳漢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정순왕후의 동생 慶州 金氏 金龜柱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연원을 둔 대립으로서,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에 대한 입장 차이가 대립의 명분이었다. 또한 그들 노론세력은 정조의 蕩平策에 힘입어 상당한 진출을 이루었던 南人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특히 정조대의 정국 구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던 벽파세력이 남인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백관을 거느린 대신들의 요청을 따르는 절차를 밟아 수렴청정하게 된 정순왕후는 정조 사망 다음날 유례없이 빨리 3정승을 沈煥之·李時秀·徐龍輔로 새로 임명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와 함께 정국을 주도한 사람들은 친정 인물들인 金觀柱·金日柱·金龍柱·金魯忠 그리고 영의정 심환지 등이었다. 대왕대비는 국상으로 일반 정무를 처리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公除 기간중인 7월에 이미 조정의 주요 신하들에게서 ‘어린 임금을 보호하고 선왕이 내세운 의리를 지키겠다’는 내용의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으며, 12월에는 정조가 내세웠던 의리를 재해석하면서 정국운영의 기본방향을 공개적으로 설정하였다. 여기서는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고 그 의리를 둘러싼 대립에는 중립의 여지도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앞 시기 정조의 입장은 영조의 사도세자 처분을 합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친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벽파세력의 논리는 정조의 주장을 진정으로 이어받는 것이라는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처분을 정당화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정조의 입장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세자의 친아들인 정조 치하에서는 거론할 수 없었던 내용이라 하더라도 처지가 다른 순조로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정조가 죽기 직전인 정조 24년 5월의 하교(五晦筵敎)에서 그들 벽파세력의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순조 즉위년(1800) 10월 정조 국장이 끝난 다음날, 사도세자 신원을 주장한 정조 16년의 嶺南萬人疏에 동조했다 하여 徐有麟 형제를 李安黙이 逆·邪로 몰아 탄핵함으로써 시파에 대한 벽파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벽파는 그들의 정국운영에 장애가 되는 시파 등의 노론계 인물들을 의리에 배치되고 사도세자 추숭을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실록의 기록을 종합하면 이 시기에 徐有隣·金履翼·金履載·金履喬·申耆·李濟萬·朴聖泰·徐有聞·李羲甲·鄭尙愚·金履度·李在學·沈象奎·金鍾健·李義用·沈魯崇·洪大協·朴夏源·洪志燮·金載翼·宋文輅·李羽晉·朴齊家 등이 유배되었으며, 沈樂洙·洪國榮·沈頤之·吳在文·金峙黙·鄭民始 등이 관작을 추탈당했고 李祖源·沈基泰에게 削去仕版이 행하여졌다.

 특히 많은 논란 속에 이루어진 조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恩彦君 示因, 홍봉한의 아들이며 정조 친어머니 惠慶宮의 동생인 洪樂任, 정조가 近臣으로 육성한 尹行恁의 처형이었다. 역모 혐의에 연루되어 죽은 礻贊의 형이고, 湛의 아버지이며 그 자신도 역모에 추대된 혐의로 정조대부터 줄곧 공격을 받아 온 은언군은 “흉한 무리를 모으고 천주교에 빠졌다”는 공격을 받아 순조 원년 5월 사사당하였다. 이 때 홍낙임도 그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어 함께 사사당하였다.373) 윤행임은 정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고 ‘선왕이 남긴 뜻’을 강조하면서 순조 초년에 세력을 행사하려 했는데, “조정 신하들을 통제하고 자기 무리를 모아 뒷날을 계획했으며 서얼 任時發·尹可基가 일으켰다는 흉서 사건의 배후”라는 죄목으로 사사하였다. 이 때 윤가기의 사돈인 朴齊家도 연루되어 유배당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조 연간 정국 구도의 중요한 기둥을 이루었던 남인들을 제거하였다. 1801년 노론계 벽파세력이 일으킨 천주교 탄압에 의해 李家煥·權哲身이 옥사하였고 李承薰·丁若鍾·洪樂敏이 처형당하였으며 丁若銓·丁若鏞·李基讓·李晳·李致薰 등이 유배당하였다. 또한 직접 천주교도로 몰리지는 않았으나, 앞 시기 남인의 기둥이었던 蔡濟恭도 ‘의리를 바꾸고 당을 모았다’는 죄목으로 탄핵받기 시작하여 천주교도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남인은 중앙 정계에서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었고, 그 밖에 그들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도 함께 제거되었다. 남인으로는 채제공의 아들 蔡弘遠과, 趙圭鎭·李仁行·李鎭宅 李儒修·金翰東·趙時俊 등이 채제공 또는 이가환의 무리라는 지목을 받아 유배당하고, 金熙采는 삭거사판되었다. 이 밖에도 李益運이 파직, 李錫夏는 유배, 趙德隣이 추탈되었다. 김상헌의 후손이며 당색으로는 노론이지만 독자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던 金建淳, 소북의 후손인 姜彛天 등이 남인과 함께 제거된 대표적인 경우이다.374) 위와 같은 유배자들에 대해서는 순조 2년(1802)과 3년 벽파세력이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몇 차례의 석방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전체 정국의 구도를 변화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정국을 장악하기 위한 벽파세력의 노력은 군사력 구조의 재편성과 짝하여 이루어졌다.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력 구도의 핵심이며 김조순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壯勇營에 대하여, 즉위년의 國葬 경비와 이듬해의 호조 재정 및 內寺奴婢 혁파로 발생한 재정의 손실을 부담하도록 하여 세력을 약화하였으며 2년 정월에는 군영 자체를 혁파하였다.375)

 한편으로는 선왕의 권위를 빌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벽파세력은 내시노비의 혁파를 단행하여 당시 사회문제의 하나를 풀었다. 여기에는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사회적 변화를 인정하고 팽배해진 기층민의 욕구를 어느 정도라도 해소하여 그들의 호감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정조의 정책을 계승한다는 점을 내외에 과시하여 선왕의 이념 위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미가 더욱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윤행임이 정조가 추진한 서얼소통을 주장하자 그것은 제대로 시행하지 않으면서 서둘러 내시노비를 해방한 사실도 그 점을 방증한다.

 이러한 사례는 순조 즉위년 11월에 정조의 신위를 世室로 모시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때는 국장이 끝난 직후였고 더욱이 서유린 형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경황이 없는 시기였음에도 벽파쪽에 선 산림 宋煥箕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였는데, 이처럼 선왕이 죽은 직후 바로 세실로 모신 것은 그 때까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 역시 정국을 주도하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굳히기 위한 노력이었다.

 반면에 수세에 몰린 인물들로서도 자신들의 입지를 유지하는 길은 선왕의 뜻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순조 즉위 직후 윤행임은 정조가 직접 엮고 스스로 서문까지 붙여 간행하게 했다는 홍봉한의≪奏藁≫를 간행하자고 하여 대비의 승인을 받았다. 경황이 없는 상황 속에서 간행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또한 삼정승의 반대를 받아 즉시 취소된 것은 이 일이 지니는 정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윤행임이 庶孼疏通을 주장한 것 역시 같은 성격을 지닌다. 순조 원년 정월, 홍낙임을 비롯한 시파에 대해 공격과 처벌이 한창 행하여지고 대왕대비의 천주교 탄압 명령이 내려지는 바로 그날 윤행임은 영조와 정조가 추진했던 정책을 길게 논하면서 서얼소통을 주장하였다. 이것 역시 자신이 정조의 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하는 주체임을 내외에 과시하여 그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는 노력이었다고 판단된다.

 반대파를 누르며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벽파세력은 특히 김조순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조는 생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선택하여 재간택까지 끝낸 바 있다. 그러나 김조순은 정조의 정책을 충실히 따른 시파의 인물로서, 그에게 국왕 장인으로서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벽파에게 큰 위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순조 원년(1801) 6월, 은언군과 홍낙임을 사사한 직후 대사헌 권유는 상소하여 ‘대대로 내려온 큰 가문’(世族巨閥) 중에 역적 은언군과 관계된 자가 있음을 지적하고 훗날의 화를 막기 위해 그에 대한 조처를 취하자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김조순이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가문과의 국혼을 막으려 했던 것이라고 한다. 당시 시파 인물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섰던 이안묵을 비롯하여 沈魯賢·鄭在民 등이 이 상소에 관계되었다. 또한 비록 순조에 의해서 부정되기는 하였으나 김구주의 아들인 金魯忠도 김조순 딸과의 국혼을 막으려고 하였다고 하며, 심환지도 그 집안과 삼간택을 할 수 없다(三揀不爲之說)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해 10월에는 鄭日煥이 경연에서 ‘한 戚臣이 과다한 관작을 받았음’을 비판하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폐단을 경계하였는데, 이것 역시 김조순, 또는 순조 친모 綏嬪 朴氏의 아버지인 朴準源을 무력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벽파의 이러한 기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벽파세력 특히 대왕대비의 입장에서 볼 때, 선왕의 결정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은 그들이 힘을 발휘하는 기반인 왕실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큰 위험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권 관인들로서도 그들의 정치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 형식적으로나마 선왕 정조의 권위가 필수적이었으므로 그가 남긴 결정을 쉽사리 부정할 수 없었다. 한편 현실적으로 당시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金尙憲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누려 온 명망은 물론 상당한 군사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벽파세력은 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그들에 대한 견제를 가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 세력을 누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왕대비도 정조 서거 직후에 김조순이 척신 박준원과 같은 지위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장영대장과 병조판서 등을 제수하는 등 그에게 베풀었던 특별한 대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김조순 역시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은인자중하면서 자기에 대한 정조의 대우를 강조함으로써 정적들도 부정할 수 없는 선왕의 권위를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김조순은 장용영·총융청 등의 군문대장, 병조·예조·형조·이조의 판서, 비변사제조,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위치를 유지한 끝에, 순조 2년 10월 자기 딸이 왕비로 책봉됨으로써 정조의 결정대로 國舅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순조 즉위 후 3년까지의 이 시기는 수렴청정하는 정순왕후와, 그의 권위를 기반으로 정권을 장악한 경주 김씨 김관주 등을 중심으로 한 벽파세력이 정조 연간의 열세에서 벗어나 같은 노론 내의 시파세력과 경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이 때 정치 권력을 강화하거나 과시하고자 하는 여러 세력의 노력은 주로 선왕 정조의 이념과 정책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72)시파와 벽파의 대립에 대해서는 朴光用,<정조년간 時僻 당쟁론에 대한 재검토>(≪韓國文化≫ 11, 서울大, 1990) 참조.
373)李泰鎭·洪淳敏,<『日省錄』 刀削의 실상과 경위>(≪韓國文化≫10, 서울大, 1989), 74∼76쪽.
374)순조 초년의 천주교 탄압과 남인·서얼 축출에 대한 최근의 논고는 다음이 참조된다.

鄭奭鍾,<丁若鏞(1762∼1836)과 正祖·純祖年間의 政局>(≪歷史와 人間의 對應≫, 한울, 1984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순조 연간의 정국변화와 다산 解配 운동>(≪國史館論叢≫47, 國史編纂委員會, 1993;위의 책, 1994).
375)李泰鎭,≪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變遷≫(韓國硏究院, 1985), 302∼306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