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시노비의 혁파
조선 후기에 노비신분층이 동요하는 가운데 노비의 사회경제적 존재양태의 변화에 대응하여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선공의 감액, 추쇄관의 폐지와 比摠法의 실시, 면천·속량의 확대 등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영조년간에 집중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노비신분층의 동요는 정조년간 이후에 더욱 심화되어 갔다.
정조대 노비의 감축이 극심하게 된 데에는 신역의 과중보다는 오히려 노비신분층의 자각이 촉진되어 ‘역중명천’한 노비라고 하는 신분 자체를 싫어하여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려는 데에 있었다. 즉 신역이 고되고 벅차서보다는 신분적 차별에서 받는 고통을 참지 못하여 도망하거나 은루하는 노비가 급속히 증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정조 8년(1784) 洪忠監司 金文淳의 지적에 잘 나타나 있다.
노비들이 처자를 이끌고 도망하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바꾸는 등 간계를 다하는데, 한 사람이 행하면 모든 사람이 동정한다. 이러한 일이 모든 고을에 다 마찬가지이니 어찌 노비수가 줄지 않겠는가.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신공의 마련이 어려워서 가 아니라 노비라는 천한 명칭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備邊司謄錄≫167책, 정조 8년 10월 29일).
과중한 부담을 피하려는 경우이거나 노비라는 미천한 명칭을 싫어하여 노비신분 자체를 벗어버리기 위한 경우이거나간에, 노비의 감축이 증가하면 할수록 비총법으로 신공을 내야 할 노비수가 고정되어 있는 상황 아래에서는 族徵·隣徵·黃口侵徵이나 白骨徵布 등의 폐단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서리 등의 중간관리층의 농간까지 겹쳐 남아 있는 노비들의 부담은 더 무거워지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정조 14년 경상도 咸陽에서는 노비안에 올라 있는 200여 명의 노비가 아기〔岳只〕·조이〔助是〕등의 같은 이름으로 되어 있었으며, 실제 거주여부나 부모의 이름은 기재하지 않고 대신에 일가 친척만을 세대의 원근을 따지지 않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 존재하는 노비는 한 사람이 7, 8명의 身布를 부담하게 되어 일단 寺奴案에 기재되면 결혼도 못하고 홀아비나 과부가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노비안을 근거로 신공을 거둠으로써 逃故白徵의 폐가 극심하여 심지어는 죽은 아들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지고 와 호소하는 일까지도 벌어졌다.451) 이것은 실제로 노비의 감축은 심하였는데도 비총법으로 신공을 거두어야 할 노비의 수가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경주부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노비안에 기재된 노비 5,116명 가운데 도망했거나 죽은 사람,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거짓이름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 2,081명이 되었으며, 여기에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156명이나 되어 이들을 제외한 2,879명이 도내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나, 이들 중에도 일정한 거처가 없는 사람이 244명이나 되어 전체 5,116명의 노비 가운데 2,881명이 인징이나 족징에 의한 납포자였다. 또 도내에 흩어져 살고는 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 않아 신공을 거둘 수 없는 자들의 身布도 족징·인징으로 거두어들였으므로 실제 족징·인정의 수는 기록보다 훨씬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노비들이 자신의 신포도 마련하지 못한 데다가 隣族의 몫까지 대납하게 되어 이들 또한 유리하여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이 되풀이됨으로써 노비가 날로 감축되어 노비안은 한낱 빈 장부에 불과할 뿐이었다.452) 이러한 현상은 軍威縣이나 綾州牧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군위현의 경우에는 노비안에 오른 노비 162명 가운데 실제 거주하는 노비는 14명에 불과하였으며,453) 능주목의 경우에는 노비안에 오른 노비 가운데 100세 이상 되어 이미 죽은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거짓으로 지어 올린 이름으로 실제로 본인이 신포를 바치는 사람은 10명 중 한두 명도 안되는 실정이었다.454)
이것은 어느 일부 지역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어서 노비신공으로 재정을 꾸려가는 관서에서는 심각한 재정부족에 맞닥뜨렸다. 상의원은 2,100여 명이나 되던 노비가 거의 다 도망치고 400여 명만이 남아 재정부족으로 모양을 갖출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455) 성균관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추쇄관을 혁파한 후 노비의 도망이나 사망은 날로 늘어가는 반면에 출생은 전혀 보고되지 않아 신공의 수납량이 해마다 줄어들어 노비감축에 따른 재정부족에 직면하고 있었다.456) 영조 31년(1755) 노비신공을 감액할 때 다른 중앙 관사의 寺奴婢를 이속받고 급대를 맡은 호조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였다. 감공이 실시된 지 4년밖에 안된 영조 35년에 호조에서 지급해야 할 각사노비 이속원수에 대한 급대량이 布 31同이었는데, 거두어들이는 신공량은 겨우 10여 동에 불과하여 이미 20여 동의 결손을 보고 있었다.457)
이와 같이 비총법을 실시한 후 노비수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남아 있는 노비들도 부유한 노비나 세력있는 노비는 모두 면천되고 거지와 같이 의지할 곳 없는 노비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신공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들에게 신공을 거두는 것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노비의 신공으로 유지되던 각사의 재정이 부족하게 되어 국가로서는 이제 노비제 자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정조 후반에 이르면 노비제폐지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여건으로 보아도 양역이나 노비신공이 다같이 1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구태여 노비라는 명칭으로 묶어둘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줌으로써 名賤에서 오는 도망이나 은루를 방지함과 아울러 은루노비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어 오히려 국가로서는 재정부족을 타개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는 면천·속량의 확대,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 노비의 군역차정 등 일련의 노비정책으로 노비의 양인으로의 신분상승이 이전보다 쉬워져 양인과 노비와의 신분적 차이가 많이 좁혀져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정조 후반기에는 위정자들 사이에 국가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內寺奴婢혁파론이 제기되었다.
이 당시 노비제를 개혁하려는 논의의 초점은 주로 내시노비의 폐를 제거하는 데에 있었다. 내시노비의 폐를 제거하자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었지만 이를 개혁하려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하나는 내시노비 자체를 혁파하여 양역으로 전환하자는 쪽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내시노비 자체는 그대로 두고 실제 운용의 묘를 살려 말폐만을 제거해 보자는 쪽이었다. 내시노비혁파론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논거로서 주장하였다.458)
① 奴나 양민이 다 같은 백성인 동시에, 奴가 내는 베나 양인이 내는 베가 똑같은 베로서 국가의 需用에 쓰이는 것은 동일하다.
② 내시노비혁파 이외의 개혁은 결국 말폐만을 제거하는 것이 되어 또 다른 폐단을 야기시킨다.
③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줌으로써 이름이 천한 데서 오는 도망과 은루가 없어지고, 출생자가 날로 늘며, 도망한 자나 은루한 자가 다시 나타남으로써 인구가 해마다 증가하여 오히려 국가재정상으로도 이익이 된다.
④ 백성들에게는 노비에 연루될 염려가 없어지고, 국가에는 貢額이 감축될 염려가 없어 공사 모두 편하다.
⑤ 내시노비혁파 반대론자들의 주장인 명분이란 것도, 箕子가 처음 노비제를 실시한 것은 절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손 대대로 노비를 삼으려 했던 것이 아니므로 노비제폐지가 옛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경주부윤 吳鼎源은 노비를 혁파하고 비총수를 良丁으로 메꾸면 양정의 부족을 가중시킨다는 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였다.
노비가 가장 많은 경주부의 경우에도 5,116명의 노비를 혁파하고 양정으로 메꿀 때 필요한 양정 실수는 600명에 불과한데, 노비혁파로 양정이 될 자가 300명이 있으므로 나머지 300명을 각 마을에 배정하면 한 마을당 1명에 불과하여 아주 작은 마을에서도 별 문제점이 없다(≪承政院日記≫1,798책, 정조 22년 10월 11일).
내시노비혁파를 주장한 인사들은 대부분이 노론계였다. 그런데 내시노비혁파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내시노비혁파를 반대하는 자들의 논거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전개하고 있다. 첫째, 양정 자체도 부족한 터에 노비를 혁파하고 이를 양정으로 메꾸는 것은 양정의 부족을 가중시켜 백성을 소요시킨다. 둘째, 내시노비를 혁파하면 사노비들이 이를 본받게 되어 叛主의 폐가 일어난다. 셋째, 조선 전래의 成憲을 문란케 하여 명분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내시노비혁파에 반대한 인사들은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莊獻世子의 불행에 동정하였던 時派에 속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에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였던 남인계가 많았다. 이러한 정치적 정세로 정조 자신이 노비신분층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동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들과 정치적으로 견해를 같이하게 되어 명분론에 동조하여 내시노비혁파를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蕩平策을 실시하여 남인을 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와의 관계로 시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남인 시파인 蔡濟恭을 영의정으로 발탁하였다. 실제로 채제공은 정조 14년(1790) 좌의정으로 있을 때 咸陽査正御史 崔顯重이 시노비를 혁파하여 寺保로 개칭하자고 주장한데 대하여, 양민에 폐해가 미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한 일이 있었다.459) 따라서 정조가 살아있고 정조의 두호를 받는 남인 시파의 영수인 채제공이 영상의 자리에 있는 한 노론 벽파 인사들의 주장인 내시노비혁파론이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 일색으로 정부가 구성되자 사태는 일변하여 그 이듬해인 순조 원년(1801) 정월에 곧바로 내시노비를 혁파하여 이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상승시켰다.460) 이 때 양인신분으로 전환된 노비신분층은 내수사를 비롯한 각 궁방의 내노비 36,974명과 중앙 각사의 시노비 29,093명 등 모두 66,067명이었다. 이 숫자는 그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내시노비의 실수효가 아니라 비총법에 정해진 신공을 수납해야 할 수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은 인원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시노비혁파로 못받게 된 내수사 및 각 사의 노비신공에 대한 급대는 壯勇營에서 맡도록 하였다.461)
내시노비를 혁파한 뒤에도 중앙 관사의 공노비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시노비혁파 전에 호조에 소속시켜 寺奴의 예에 따라 신공을 거두던 적몰노비 가운데 지방고을에 거주하는 노비는 해당 고을의 관노비로, 중앙에 거주하는 노비는 형조에 이속시켜 부리도록 하여 형조에는 내시노비혁파 후에도 노비가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462) 그러나 이 때 형조에 소속된 노비와 이전의 내시노비는 「使役」과 「收貢」이라는 면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와 노비의 감소가 격증한 것은 공노비뿐만이 아니라 사노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노비에 대한 여러 가지 시책 - 예컨대 노비신공의 감액,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 등 - 이 사노비에게까지 적용되었던 까닭으로 내시노비혁파는 언젠가는 노비제 자체의 폐지를 암시하는 것이었고, 이미 중세적인 신분제도 붕괴의 한 단서를 마련했다는 데에서 내시노비혁파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정부에 의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통제하에 있던 노비에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경제사적 의미에서는 그만큼 제약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 같은 공노비이면서도 내시노비를 제외한 역노비와 지방의 영·진이나 각 고을의 관아 및 향교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는 공노비혁파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각 고을의 관노비가 혁파에서 제외된 것은 이들이 중앙 각사나 내수사에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 신공만을 납부하고 있던 내시노비와는 달리 입역으로 그들의 임무를 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도 고종 23년(1886)에 이르러 사노비와 더불어 신분세습제가 폐지되어 자기 한 몸에 한하여 사역되다가,463) 고종 31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신분제도가 폐지되어 제도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464)
노비제의 폐지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히 신분사적으로 천민해방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분제의 폐지를 의미하며, 동시에 신분제를 바탕으로 성립된 중세봉건사회의 해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분사적으로 본다면 조선 후기는 한국 중세사회의 마지막단계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全炯澤>
451) | ≪正祖實錄≫권 30, 정조 14년 4월 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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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 | ≪承政院日記≫1,798책, 정조 22년 10월 11일. |
453) | ≪承政院日記≫1,802책, 정조 22년 12월 17일. |
454) | ≪正祖實錄≫권 49, 정조 22년 9월 갑술. |
455) | ≪備邊司謄錄≫182책, 정조 18년 9월 16일. |
456) | ≪承政院日記≫1,267책, 영조 43년 5월 15일. |
457) | ≪備邊司謄錄≫136책, 영조 35년 정월 16일. |
458) | 全炯澤, 앞의 책, 232∼233쪽. |
459) | ≪承政院日記≫1,676책, 정조 14년 4월 14일. |
460) | ≪純祖實錄≫권 2, 순조 원년 정월 을사. |
461) | ≪承政院日記≫1,832책, 순조 원년 정월 28일. |
462) | ≪承政院日記≫1,841책, 순조 원년 9월 20일. |
463) | ≪承政院日記≫, 고종 23년 정월 2일. |
464) | ≪高宗實錄≫권 32, 고종 31년 6월 2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