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운동의 확산과정
동원 초기과정에서 향촌조직 책임자들과 군병의 하급 간부가 연합적으로 동원을 추진했지만, 실제로 9일 아침부터 운동의 실질적인 지휘는 군병의 하급 간부들이 담당하였다. 무위영소속 옛훈련도감 군병들은 동별영에 집결하여 김장손·김춘영·성인묵·배장춘과 같은 간부들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590)
이들은 먼저 집단 等訴를 했다. 일단 제도화되지 않은 통로이기는 하지만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가장 우선적으로 택한 대상은 자신들의 군 지휘책임자인 武衛大將 李景夏였다. 그들은 민겸호의 부당행위와 동료들의 구명을 호소했다. 하지만 실권이 없던 이경하는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군병들은 안국동에 있던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민겸호는 집에 없었고, 호소할 길을 잃은 그들은 때마침 만난 도봉소 고직이 민겸호 집안으로 피신하자 집에 난입하기에 이르렀다.
두 차례의 등소가 모두 실패로 돌아간 군병집단은 민겸호의 저택을 부수고 불질러 버린 뒤 등소라는 비폭력적 수단을 포기하고 무력행사에 돌입하게 되었다. 군병집단이 대원군을 찾아 운현궁에 갔지만, 이것은 등소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행동의 정당성을 대원군으로부터 확인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권력을 잃고 게다가 지난해 쿠데타계획의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대원군은 주동자인 김장손·유춘만 등과 면담하는 한편, 그의 심복인 許煜에게 군복을 입고 그들의 지휘그룹에 가담하도록 명령하였다. 대원군의 묵인을 얻은 군병들은 비로소 본격적인 무장봉기를 전개하게 되었다.591)
군병들은 무력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동별영에 집결하여 창고를 열어 각종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어영청 新營의 무기고에서도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강화하였다. 또한 그들은 무위영과 장어영의 다른 군병들에게 연락하는 한편 다음 단계의 행동계획을 세웠다.592)
정부에서는 처음에는 단순한 난동 정도로만 생각하다가 운동이 확산되어 가자 이경하를 보내 조사하고 회유하여 해산시키려고 했다. 이경하가 동별영을 찾아가 전교를 내보이며 설득하려 했으나 무위대장의 명령은 더 이상 효력이 없었다. 오히려 군병들은 그를 수행한―평소에 군병들에게 원한을 샀던―무위 집사 여러 명을 살해한 뒤, 이경하를 쫓아내고 말았다.593) 사태가 위급해지자 정부는 우선 책임자를 문책하는 의미에서 무위대장 이경하, 선혜청 당상 민겸호, 도봉소 당상 沈舜澤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에 대원군의 장자 李載冕을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는 한편594) 무력에 의해 진압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좌·우포도청에서 교졸을 동원하고 將臣들이 나와서 막으려 하였고595) 別破陣을 동원시켜 진압하자는 논의까지 있었다.596) 그러나 서울수비를 담당하는 주력부대인 훈련도감 군병들이 저항운동을 일으킨 상황에서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만한 병력은 없었다. 지배층은 속수무책이었고 사태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 마침내 군병들은 3대로 나뉘어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이 때부터 영세상인, 수공업자를 비롯한 도시 하층민들이 총융청·금위영과 같은 다른 군영의 군병들과 함께 대열에 참가하기 시작헀다. 제1대는 鍾街를 휩쓸면서 포도청을 습격하여 갇혀 있던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을 구출해 내고 다른 죄수들을 풀어 준 뒤, 다시 의금부로 가서 옥문을 깨뜨리고 모든 죄수들을 풀어 놓고, 감금중인 척사유생 白樂寬을 구출하여 가마에 태우고 동별영으로 돌아왔다. 군병들이 그를 군중들 앞에 내세우고 지휘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강화유수 閔台鎬를 비롯한 민씨 척족정권의 중요 인물들과 개화파관료들의 집을 차례로 습격하고 파괴하는 한편, 민비가 제사지내던 서울 근교의 중요 사찰을 부수고 불지르는 행동을 밤늦게까지 계속했다.597)
제2대는 별기군이 신식 훈련을 받는 교련장소인 下都監으로 갔다. 하도감에는 별기군 400명이 대부분 귀가하여 없었고, 20여 명의 별기군과 별기군 책임자, 그리고 일본인 몇몇만이 남아 있었다. 하층민들은 영관 鄭龍燮을 죽이고 洋槍을 모두 부숴버리는 한편, 교련장에서 銅峴·屛門 쪽으로 도망가던 일본인 교련관 육군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를 쫓아갔다. 호리모토는 쫓아간 상인 孫順吉·孔致元과 교련소에서 잡일을 하던 尹順龍 등에게 맞아 죽었다.598)
시위대는 3시쯤 남대문 근처 노상에서 하도감으로부터 도망나와 일본공사관으로 가고 있던 육군어학생 岡內恪·池田平之進, 사비어학생 黑澤盛信 등 3명을 발견하자 구타해서 죽인 뒤, 이들을 구하러 달려온 일본공사관 외무순사 川上堅輔·池田爲善·本田親友 등 3명도 죽이고 말았다.599)
제3대는 전임 선혜청 당상이며 지금은 경기도관찰사인 부정축재의 대표자 金輔鉉을 목표로 돈의문 밖에 있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였다.600) 습격하러 가는 도중에 서대문 근처에 사는 민중들이 크게 합세하였다. 그러나 목표 인물인 김보현이 없었으므로 대신 감영을 파괴하고 무기고에서 각종 무기를 있는 대로 꺼내 일반 도시민들도 무장하였다.601) 이들은 곧장 가까이 있는 일본공사관 淸水館으로 몰려갔다.
일본공사관에서는 이미 별기군 영관 尹雄烈로부터 봉기가 일어난 사실과 자위책을 강구하라는 통보를 받아 놓고 있었으며,602)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인 3명이 피습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순사를 파견하였다.603) 또 差備譯官 李承漢이 찾아와 공관원 모두 몸을 피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공사는 만약 일이 생기면 반드시 조선정부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계만 엄중히 하고 있었다.604)
하층민 시위대의 포위공격은 오후 5시쯤부터 시작되었다. 하층민들은 총과 활을 쏘면서 정문으로 밀고 가려고 했지만 일본인들의 총격으로 후퇴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군중들 가운데 운동에 합세하는 자들이 갈수록 늘어났고 취각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렸다. 그들은 정문돌입이 어렵자 공사관 옆에 붙어 있는 민가에 불을 놓았다. 불은 判接官출장소로, 또 이어서 공사관 오른쪽의 차비관숙소로 옮겨 붙었다. 불이 인근집 4채를 태우고 공사관으로 옮겨 붙을 상황에 이르자, 하나부사공사는 정부의 지원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포기하고 기밀문서를 소각하며 공사관에 불을 놓은 다음, 총을 쏘면서 정문을 돌파하여 탈출했다. 그들이 우수한 성능의 신식 총을 마구 쏘아대고 있어서 하층민은 이들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605)
공사관을 탈출한 일본인들은 구원을 청하려고 경기감영으로 갔으나, 이미 공격을 받아 파괴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시 대궐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하려고 남대문에 이르렀으나 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양화진을 거쳐 인천으로 달아나고 말았다.606)
일본공사관이 모두 불타고 공격이 끝나자 다른 하층민들은 일단 귀가했지만 하급 군병들은 다시 동별영으로 집결하였다. 그들은 동별영에서 밤을 지새며 다음날의 행동계획을 짰고, 유춘만은 왕십리로 돌아가 각 마을주민들이 다음날 아침 모두 입성하도록 전달하였다.607)
10일 아침 동별영에서 밤을 지낸 하급 간부들과 군병집단은 왕십리를 비롯한 사대문밖 교외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온 자들 및 성내에 거주하는 자들과 합세하여 대규모 세력을 형성해서 전날보다 훨씬 강력해진 힘으로 조직적 활동을 개시했다.608)
이 날 저항운동의 주요 공격목표는 민씨 척족정권의 최고 권력자이며 상징적 존재인 민비였다. 하층민세력은 먼저 興仁君 李最應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고, 노상에서 閔昌植을 살해한 뒤 창덕궁 돈화문DB주석으로 몰려갔다.609) 대궐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 반란군민들은 민겸호·李憲 등의 대신과 李敏禮를 비롯한 많은 내시들을 죽였다.610) 김보현은 대궐로 급히 들어오다가 禁川橋 위에서 군병 金興燁의 도리깨에 맞아 죽었다.611)
국왕 고종은 사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단계임을 알고 대원군의 입시를 명령한 뒤 곧 別殿으로 피난했고,612) 민비는 무예별감 洪在羲의 도움을 받아 대궐 밖으로 피해서 尹泰駿의 집으로 숨었으며 반란이 수그러진 때를 틈타 충청도 충주목 閔應植 鄕弟로 옮겼다. 하층민들은 민비를 찾으려고 계속해서 사방을 수색하였고 대궐 안은 계속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613)
한편 이 날 아침 정의길 등이 수백 명의 군병을 이끌고 일본공사관원들을 뒤쫓아 인천으로 갔다. 일본인들은 인천부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도망갈 배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인천에 도착한 경군이 인천부의 군병들과 합세하여 이들을 공격하였다. 격렬한 싸움 끝에 일본인들은 6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당한 채 도망하다가 마침 정박중이던 영국선박에 구조되어 일본으로 떠났다. 이 싸움에는 인천에 거주하는 농민들도 참여하였으며 일본인들은 공사관에서보다 훨씬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614)
590) | <長孫等鞫案>罪人金長孫案·罪人鄭義吉案. <弘根等鞫案>罪人鄭萬吉案. <仁黙等鞫案>罪人成仁黙案. |
---|---|
591) | 군병들이 대원군을 찾아간 것은 물론 그에게 문제의 해결을 요청한 것이지만 대원군은 군병집단이 공격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대원군이 군병에게 이야기했던 내용은 알려진 바 없지만, 그의 암시 또는 지시가 군병집단이 한층 조직적이고 분명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촉진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金正起,<大院君 납치와 反淸意識의 형성(1882∼1894)>,≪韓國史論≫19, 서울大 國史學科, 1988, 482쪽). |
592) |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초9일.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초10일. |
593) |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초9일. |
594)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초9일. ≪日省錄≫, 고종 19년 6월 초9일. |
595)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초9일. |
596) | 魚允中,≪從政年表≫, 고종 19년 6월 초8일. |
597)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초9일.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6월 초11일. ≪推案及鞫案≫323책, 癸未罪人樂寬鞫案. 鄭 喬,≪大韓季年史≫권 1, 임오 하 6월. |
598) | ≪左右捕廳謄錄≫, 임오 7월 23일 罪人孫順吉供案·罪人孔致元供案, 7월 29일 罪兒尹順龍供案. 金正明 編,≪日韓外交資料集成≫권 7, 尹雄烈との面談, 136∼137쪽. 宮武外骨,≪壬午鷄林事變≫, 亡命者尹雄烈の談話(東京, 1932). 黃 玹,≪梅泉野錄≫권 1, 임오 6월 초9일. 魚允中,≪從政年表≫, 고종 19년 6월 18일. |
599) | 金正明,≪日韓外交資料集成≫ 권 2, 朝鮮京城激徒暴動顚末記, 97∼102쪽. 宮武外骨, 앞의 책, 24쪽. |
600) | ≪承政院日記≫, 고종 19년 6월 초9일. ≪日省錄≫, 고종 19년 6월 초9일. |
601) | 보기를 들면, 冷洞에 사는 수공업자 安興俊은 같은 동네사람 黃京順과 함께 경기감영을 파괴하고 총을 들고 나와 일본공사관 공격에 참여하고 있었다(≪左右捕廳謄錄≫, 임오 7월 24일 罪人安興俊供案). |
602) | 宮武外骨, 앞의 책, 118쪽. |
603) | 金正明, 앞의 책, 권 2. 앞서 밝힌 대로, 3명의 일인은 물론 파견된 순사들까지 모두 피살되었다. |
604) | 金正明, 위의 책, 97쪽. |
605) | 金正明, 위의 책, 97∼102쪽·106∼114쪽. 宮武外骨, 앞의 책, 24쪽. 黃 玹,≪梅泉野錄≫, 임오 6월 초9일. |
606) | 金正明, 위와 같음. |
607) | 金正明, 위의 책, 141∼142쪽. |
608) | <弘根等鞫案> 罪人金興燁案. |
DB주석 | 신편 한국사 책자에 돈의문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梅泉野錄≫에 의거하여 DB 구축 작업에서 바로잡았다. |
609) |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초10일. 黃 玹,≪梅泉野錄≫, 임오 6월 초10일. |
610) |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초10일. |
611) | <弘根等鞫案>, 罪人金興燁案. |
612) | 黃 玹,≪梅泉野錄≫, 임오 6월 초10일. |
613) | 黃 玹, 위와 같음. 鄭 喬,≪大韓季年史≫권 1, 하6월 초10일. 金衡圭,≪靑又日錄≫, 임오 6월 초10일. |
614) | 필자미상,≪日記≫, 임오 6월 11일. 金正明, 앞의 책, 141∼142쪽. 宮武外骨, 앞의 책, 24쪽. ≪左右捕廳謄錄≫권 1, 임오 9월 27일 罪人朴昌卜供案·30일 仁川座首鄭學霖供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