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94년의 신분제 폐지 정책과 평민
개항이후 일제에 의해 식민지 지배체제로 편입되는 1910년까지는 비록 짧은 시기지만 신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 왔다. 조선후기부터 급속한 사회변화속에서 신분제는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신분간의 뒤섞임 현상, 즉 양반신분의 양적 팽창속에서 몰락양반이 속출하고 이들이 밑으로 떨어져 내려오는가 하면, 경제력을 확보한 평민677)들이 신분을 돈으로 사고 올라오는 현상이 나타났다. 구향과 신향의 대립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국가는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때로는 이용하고 있었다. 1801년의 노비해방은 그 단적인 보기였다. 공노비가 해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常民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상민화해서 살고 있는 공노비들, 더 이상 身役을 거두기도 어렵게 된 이미 국가의 손을 떠난, 그러나 적어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노비인 이들을 차라리 풀어줌으로써 국가의 조세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678)
이러한 신분제 붕괴 현상은 개항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개항은 평민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유리한 사회·정치환경이 점차 조성되는 계기였다. 외세가 급속히 밀려들어오고 전국적으로 민란이 쉴새없이 터지는 상황에서 보수 지배층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당연히 정치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민중들은 계속 민란을 일으키면서 그 속에서 점차 자신들의 사회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전통적인 신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입법기관인 軍國機務處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것은 길게 보면 조선후기부터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온 거대한 신분제 폐지 운동의 흐름의 결과였으며, 직접적으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분출된 민중의 강렬한 요구에 밀려 이루어진 것이었다.679) 1894년에 신분제도를 법적으로 폐지하기는 했지만 이는 이미 무너져 가던 신분제도를 법적으로 확인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신분제도의 법적 폐지 선언이 불가피하게 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전통적 신분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사회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실상 국가의 징세와 戶役 및 군역을 통해 각 개인의 노동력을 직접 수탈하는 지배방식이 무너지고, 실질적으로 노비해방이 이루어지고 있던 속에서 신분제도의 폐지는 이러한 현실을 법적으로 뒤늦게 인정하는 것이었다.
개화파 정권의 신분제 폐지 정책은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일본측이 제시한 개혁안도 상당 부분 반영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갖고 있던 평소의 개혁 구상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정책 내용속에서 어떤 부분이 특히 농민군의 요구를, 또 어떤 부분이 자신들의 개혁 구상을 실천에 옮긴 것인지를 구분하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농민군의 폐정 개혁 요구 가운데 신분과 관련된 것은 반상 차별의 문제와 노비제, 천민해방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개화파 정권의 신분 개혁 정책에는 이러한 농민군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되었다. 특히 노비제를 폐지하고 천민을 해방하는 조치가 내려진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개화파 정권이 의도했던 개혁의 무게 중심은 그 보다는 오히려 반상의 차별을 없애고, 양반신분의 각종 특권을 폐지하는 쪽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초기에 발표되었던 의안 내용 가운데 노비제 폐지와 천민해방에 관해서는 원칙을 강조한 2개의 의안만 발표되었을 뿐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나머지 의안들은 양반신분 유지의 결정적인 통로였던 과거제를 폐지하고 문벌 중심의 관료 등용과 문무 차별을 깨는 데 초점을 맞추고 아주 상세하게 내용을 규정하고 있어 크게 대조를 이룬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사회 관습 개혁 내용은 대부분 유교 윤리를 신봉하는 양반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서얼 차별·조혼·연좌제·과부 재가 금지 등 가족제도와 관련된 관습은 물론 복식·두발·가마 사용 등의 신분간 차별속에서 양반 지배층의 특권이자 외적 상징으로 작용하던 것들을 폐지 내지 개혁함으로써 양반신분과 일반 평민신분사이의 현실적인 장벽을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개혁 내용은 주로 양반 지배층 내부의 관습을 제거하려는 것이었고, 노비 천민층의 해방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반상의 차별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였던 천민집단에 대한 차별 관행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680) 물론 나중에 박영효정권 때 양반과 官의 일반민에 대한 차별 관습에 관한 여러 가지 시정지시가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681) 양반중심의 사회 관습 개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약한 것이었다.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 인물들은 개항이후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으며, 지주제의 기본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부세제도의 개혁과 통상무역을 통한 상공업 진흥, 그리고 근대적 관료제도의 도입 등의 개혁 방안을 구상·실현하고 있었다. 신분제 폐지 정책은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된 갑오개혁의 일환이었다.682) 개화파는 지배층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한편 지주전호제와 신분제를 폐지하라는 압력이 밑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든 민중의 요구를 수용, 정책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하고 지방 행정을 장악해가던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적절한 수습책을 제시하는 것이 당장 중요했다.683)
그렇지만 이들 개화파 정권 참여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지주계급이자 동시에 양반신분 보유자들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보유한 특권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특히 지주제는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으며, 개항이후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지주제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보호하고 키워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근대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갈 때도 지주계급이 스스로 농업을 근대화하면서 동시에 상공업의 발전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이 볼 때 경제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조세제도와 국가의 재정구조였지, 지주제가 아니었다.684)
개화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이었고, 지주제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여기에 근대적인 상공업의 육성을 통한 부국강병이야말로 근대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개혁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이념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했으며, 이들에게는 종래의 유교 이념과 양반신분을 내세우는 것, 즉 신분제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커다란 의미가 없었다. 사실 신분제 유지를 통해서 지배 세력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는 지주제와 신분제 사이의 간격이 크게 벌어진 때문이었다. 양반신분 보유자의 일부만이 지주로, 나머지 대부분은 자영농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양반신분을 보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외적 강제를 강화해 중세국가의 전통적 지배 전략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개혁 방향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분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비해 치루어야 할 사회적 비용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분제를 폐지하는 것은 당연한 정책적 귀결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고, 따라서 노비해방에 그리 적극적일 수는 없었지만, 신분제를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이를 폐지할 의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의 첫 단추를 채우는 초기부터 신분제를 개혁하는 각종 의안을 발표한 것은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수용하는 수습책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구상하던 근대화 방안의 실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노비제 폐지 조치와 천민해방에 관한 선언은 2개 의안에 기본원칙만 담았을 뿐 상세한 규정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어 양반 지배층 내부에서 터져 나온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면서, 노비제의 잔존을 인정하고 개혁안이 신분제를 전면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상당한 정도로 개혁 내용을 후퇴시키기도 했다. 그 뒤에도 백정·승려·기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조치를 취했을 뿐, 이들을 완전한 자유민으로 해방시키는 분명한 조치는 취한 적이 없다. 이것은 개화파가 농민군의 요구에 따라 일종의 수습책으로 천민해방을 실시한 것일 뿐, 천민해방에 관한 구체적인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천민해방을 규정한 의안은 흔히 七般賤人을 모두 해방한 것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매우 간단하여 천민 가운데 일부인 驛人685)·倡優·皮工 등에 관해서만 언급할 뿐 백정을 비롯하여 승려·기생 등 다른 천민집단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농민군이 폐정개혁 요구에서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라는 요구를 하면서, 특히 백정의 해방을 강조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백정해방에 대한 언급은 결코 무시할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백정에 대한 조치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나중에 후속 조치로 나타났다.686) 그리고 “屠戶를 천민에서 면하게 하고 호적을 만들도록 허락하였다”687)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나중에 면천 조치가 내려진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그들에게 허락된 호적은 일반 호적이 아닌 그들만의 특수 호적이었다. 光武戶籍에서 노비였던 자들과 역인·창우·피공 등은 모두 일반 호적에 차별없이 함께 섞여 들어간 데 비해, 백정과 승려는 따로 특수 호적을 작성하고 있었던 사실이 한꺼번에 차별 조치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688).
개화파 정권이 추진한 신분제 폐지 정책은 매우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고 중세의 기본틀을 개혁하는 것이었지만, 총론에서만 그러할 뿐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불철저한 점을 갖고 있었고, 세력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반발에 부딪칠 때는 그나마 자신들의 개혁안을 부분적으로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갑오개혁이 전적으로 일본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안 내용이 일본에 의해 강요되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위협과 자신들의 기반을 없애려 드는 데 대한 위기의식이 한꺼번에 겹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이 볼 때도 이들의 개혁안은 일본을 등에 업고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적 위기의식이 이 개혁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677) | 이 글에서 平民은 특정 범주의 신분 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라, 양반·중인 범주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집단을 한데 묶어 부르기 위해 임시로 사용한 개념이다. 따라서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말 호적에는 평민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특별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아직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지 분명히 밝혀진 바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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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 | 全炯澤,≪朝鮮後期 奴婢身分硏究≫(一潮閣, 1989), 241쪽. |
679) | 愼鏞廈,<1894년의 社會身分制의 폐지>(≪韓國近代社會史硏究≫, 一志社, 1987). |
680) | 천민, 특히 백정에 대한 심한 차별 대우는 한말은 물론 일제 침략기에도 계속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김중섭,≪형평운동 연구≫(민영사, 1994)를 참고 할 수 있다. |
681) | 제1조 民을 臨하는 道는 心을 用함을 公平히 하야 貴賤과 親疎로서 毫末이라도 差別이 有케 아니할 事. 제6조 大小民이 官庭에 跪하고 立하는 節과 民이라 稱하고 小人이라 稱하는 例를 一切 自便케 하고 勒行치 말을 事. 제7조 官長이 胥隷에게와 主人이 雇傭에게 專히 待치 말을 事. 제1·6·7조의 공통점은 더 이상 신분제가 관철되던 시대의 구습을 따르지 말고 상하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바꾸어 나가라는 지시라고 생각된다. ≪高宗實錄≫, 고종 32년 1월 29일. ≪官報≫, 1895년 3월 10일. |
682) | 金容燮,<甲申·甲午改革期 開化派의 農業論>(≪增補版 韓國近代農業史硏究≫下, 一潮閣, 1984), 89∼94쪽. |
683) | 金容燮,<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위의 책), 259쪽. |
684) | 金容燮, 위의 글(1984a). ―――,<近代化 過程에서의 農業改革의 두 方向>(≪한국 자본주의 성격논쟁≫, 大旺社, 1988). |
685) | 驛人은 身良役賤 집단이었을 뿐, 칠반천인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인에 대해 면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들을 사실상 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신양역천 집단 중에서도 특히 역인은 세습役으로 천인과 다름없는 사회적 대우를 받고 있었으므로 천인 집단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劉承源,≪朝鮮初期 身分制硏究≫(乙酉文化社, 1987). 趙炳魯,<朝鮮後期 驛民의 編成과 入役形態>(송병기 외,≪韓國史의 理解:朝鮮時代 1≫, 신서원, 1991). |
686) | 黃玹은 1895년 12월에 “白丁들에게 면천을 허락해주자 그들은 漆笠을 쓰고 다녔다. 옛 풍속에 영남과 호남의 백정들은 감히 칠립을 쓰지 못하고 平凉子만 썼으나 內部에서 여러 차례 칙령을 내려 그들도 평민과 같이 칠립을 쓰게 하였다”라고 기록했다(黃玹,≪梅泉野錄≫, 광무 4년 경자). |
687) | 黃玹,≪梅泉野錄≫, 광무 4년 경자. |
688) | 현재 남아 있는 광무 호적 가운데 상당한 수가 바로 이들의 특수 호적이다. 일본 京都大學 文學部 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韓國戶籍成冊≫중<楊州郡所在各寺刹主掌僧及外他寄住僧徒錄 各年兆成冊>(광무 8년),<忠淸南道泰安郡 各寺僧徒成冊>(광무 9년),<江原道 春川郡 癸卯度屠漢戶口成冊>(광무 7년) 등이 보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