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분제 폐지 이후의 평민신분
1894년 갑오개혁이후 전통적인 신분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현실속에서 신분구조가 과연 어떠한 형태로 사라지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한말에 신분제의 어떤 측면이 먼저 붕괴되고 사라져 갔으며, 신분제의 어떤 측면이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변화에 완강한 저항을 보이는지는 연구된 바가 없다. 물론 갑오개혁이후 신분제는 종전에 비해 판이하게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신분제도의 변화가 현실적으로 사회 변화에 곧바로 투영되지 않을지라도 전통적 신분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말에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노비의 경우, 특히 한 집에서 주인과 함께 생활을 하던 사환 노비의 경우에 그들이 법적으로 노비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주인(上典)과 대등한 지위를 가질 수는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노비들의 대부분은 신분적으로 노비문서가 아무런 쓸모 없는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양반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형식적인 신분해방은 법으로 제도화되었지만, 그들이 자유민으로 살아갈 경제적 기반, 특히 토지는 여전히 지주계급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지주-전호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었고, 자신의 독자적인 소유의 주택을 갖고 있지 못하는 한 주인집 행랑에 거주하거나, 주인집을 빌려 사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한편 주인집에 거주하던 사환노비들은 신분제도 폐지이후 주인집을 떠나 독자적인 살길을 찾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는 주인집에 그대로 눌러 앉아 노비시절과 별로 다름없이 주인집 각종 집안 일을 하고 주인집에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경작했을 것이다.
신분의식도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법은 사회적 관습이 유지될 수 있게 받쳐주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분과 관련된 법이 폐기되고 나서도 신분 차별 관습은 여전히 의미 있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갑오개혁이후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신분에 대한 억압적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신분제에 대한 일반인의 관념은 강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양반과 상민의 경계, 노비에 대한 편견이 많이 줄어들고 있었으면서도 천민집단에 대한 차별의식은 여전히 강했다. 경남 진주군을 비롯한 인근 16개 郡의 백정들이 1902년 2월에 차별관습을 없애달라고 관찰사에게 탄원하였지만, 관찰사는 오히려 소가죽으로 관의 띠를 하도록 지시하여 굴욕적인 신분표시를 강요했다. 또한 황해도 해주에서는 정부관리가 신분을 해방시켜주는 대가로 백정들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내무부는 각 지방 관청에 훈령을 내려보내 양반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천민들의 처벌을 지시하기도 했다.689)
그런 상황속에서도 백정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경남 진주, 경북 예천, 황해도 해주에서는 백정들은 부당한 관리의 처우에 대항하여 상급기관에 제소하는 경우도 생겨났고, 패랭이 대신에 일반인들처럼 갓과 망건을 쓰는 등 옷차림의 신분 차이를 없애줄 것을 왕과 관청에 탄원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0년에 진주에서 일반인과 똑같은 의복을 입어도 좋다는 관청의 허락을 받은 백정들이 일반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새로 늘어나기 시작한 개신교 신자들 중에는 백정들도 있었는데, 선교사가 백정들을 일반인 신도들과 합석시키려 하자, 대부분의 신도들이 거부하였고, 불만을 품은 일부 신도들은 예배당을 떠나기까지 하였다.690)
이처럼 완강했던 여러 형태의 차별 관습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점차 사라져 갔다. 물론 백정 집단거주 마을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일반인들의 거주지역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한 백정들이 늘어났으며, 일반인들과의 접촉도 비교적 쉬워졌는데, 이러한 모습은 백정들의 공동체가 무너져가면서 동시에 일반인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음을 뜻한다.691)
한편 사회 전반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음도 분명하다. 우선 양반집단에 비해 절대적으로 교육 기회가 차단당해 오던 것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각종 학교 입학 문호가 누구에게나 개방되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모든 교육과 실제 행정활동이 국문을 적어도 국한문을 바탕으로 진행되게 되었다. 읽기 쉬운 신문들도 쏟아져 나왔다(≪독립신문≫·≪제국신문≫·≪황성신문≫등).
갑오개혁이후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되어 있었으나, 종래의 신분관념은 존속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대한제국기 신문을 살펴보면 신분을 둘러싼 글이 자주 실렸다. 이러한 신분 관련 기사들은 대체로 신분차별을 비판하고, 상민·천민층들로 하여금 신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皇城新聞≫의 경우 관직임용에서의 신분적 차별을 주된 비판의 초점으로 삼고 있었다. 즉 “寒門微族의 자제는 학문이 두터워도 등용의 기회가 적고 華族은 懶怠하고 학문이 부족해도 서용되는 현실”692)을 비판하면서 “문벌과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才藝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만 내수를 다져 외압에 대응해 나갈 수 있다”693)고 주장하였다. 이러한≪황성신문≫의 견해는 그 담당자들이 주로 문벌이 낮은 양반이거나 중인출신이라는 점과 관계가 있었지만, 동시에 법적 신분제가 폐지되고, 양반 세족들의 특권을 약화시키는 조치가 나왔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현실이 바뀌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그렇더라도 당시 신문기사들은 대립 갈등 과정을 겪으면서 평민들이 스스로 신분의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의 두 기사를 보자.
A.일전에 검은돌 사는 전가가 그 동리 사는 김모를 거러 경무청에 정장하였는데, 그 사의인 즉, 김가와 전가가 다 막버리군이라. 연강의 풍속이 쪽지게 지고 버러 먹은 것은 양반이오 등테지고 버러 먹은 것은 상놈으로 분별이 뚜렷한 배라. 전가등테가 어디를 가는데 김가 쪽지게가 요사이 잘 있으냐 한 즉, 전등테에 말이 네나 내나 두질생에 목을 넣고 생애하기는 일반이어늘 하대 하는 일이 웬일이냐 하매 김쪽지게가 대노하야 양반더려 무례히 욕한다고 전등테를 구타하매 전등테에 아비가 나와 만류하려는데 김쪽지게에 삼형제가 내다라 전등테 부자를 무수히 난타한 일이라 하니 우리 나라 여러 가지 디테는 일오 알 수 없더라(≪매일신문≫7, 광무 2년 4월 16일, 잡보).
B.충청감사 송세현씨가 갈녀 올 때에 공주 아전 서한익에게 가하 몇 천량을 지고 왔는대 서가가 송씨를 대하야 가하전을 재촉하매 송씨 대답이 그 때에 이리 이리 구쳐하여 주었거늘 무삼 가하를 다시 말하는냐 한즉 서가의 말이 갑오 이전에는 송우암댁을 두려워 당당히 받을 것을 말을 못하였거니와 지금이야 경계 받게 무엇이 무서우리오하고 돈을 재촉하였더니, 도내 유생들이 관찰부에 정소하고 서가가 송우암을 욕되게 하였다고 치죄하여 달라하매 관찰부에서 서한익을 착수하였다가 몇일 후에 서가는 방송하고 그 아우를 되수하였더니 서한익을 내노았다고 경주 유생 이복영씨 등이 법부대신에게 연명 둥소를 하다더라(≪매일신문≫17, 광무 2년 4월 28일, 잡보).
A 기사에는 한강가 포구에서 ‘막벌이꾼’으로 살아가는 거리 임노동자들이 등장하는데, 흥미 있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도 신분에 따른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양반은 지게를 지지만, 평민들은 반드시 등짐을 지는 것이 관행이었고, 이런 관행이 지켜져 왔다는 것이다. 양반이 지게를 지는 임노동자가 되었다면, 경제적 형편으로 따지면 일반 평민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막벌이꾼으로 살아가는 몰락 양반들이 한 둘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이런 차별 관행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은 경제 수준이 비슷해져도 반상의식은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했고, 같은 직업군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양반노동자는 상민노동자에게 下待(반말)를 하고, 상민은 양반노동자에게 존대말을 써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오개혁이후 상민 노동자들은 더 이상 상하의 차별 관행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주장했고, 이 때문에 구타를 당하자, 관에 고발하여 법의 보호를 받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B 기사에서는 공주 아전이 수천 냥의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던 충청감사를 역임한 고위관료에게 돈을 재촉하면서, 더 이상 양반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전 스스로가 갑오이전과 이후는 상황이 달라졌음을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충청도내 유생들과 경주 유생 이복영은 이러한 아전의 태도를 양반이자 지체높은 고위관리인 전감찰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기존의 질서와 권위 체제를 유지해 달라고 관에 고발하고 있다.
A와 B 두 기사에서 볼 수 있는 대립적 상황은 당시 신분 차별 철폐를 둘러싼 기득권 양반 세력과 상민·천민에 중인을 포함한 전반적인 평민들의 적극적인 저항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