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동학의 가족관계
가) 신분제
동학은 당시 사회가 “임금(君)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고, 지어미가 지어미답지 못한…”706) 현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창도된 종교이다. 따라서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崔濟愚는 먼저 君에 대하여 “入道한 그날부터 君子되어 無爲而化될 것이니 地上神仙 네 아니냐”707)라고 하여 신분제를 부정하고 나아가서 “우리 도는 地閥을 보는 것이 아니니라. 지벌이 무엇이게 군자를 비유하느냐. 지벌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냐? 더욱이 말세사람들이 자기네의 物慾之心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 놓고 백성들을 압제하는 못된 버릇이 아니냐”708)라고 관리들의 폐의 근원이 신분제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2대 교주 崔時亨 역시 인간의 평등사상에 기초를 두고 貴賤嫡庶의 구분을 배격하였다.709) 물론 최제우가 언급한 군과 군자는 반드시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왕을 비롯한 상위 신분은 정치적·사상적 지배자로, 태어나면서 신분이 결정된 특수 신분층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봉건사회에서의 그 특수 신분층을 부정하고, 누구나 노력에 의하여 군자가 될 수 있다고 공언한 것으로 파악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신분제의 혁파는 최제우가 양반가의 서자이었고, 최시형의 경우 문자교육을 받지 못할 정도로 한미하여 머슴살이를 해야만 하였던 것과도 유관된다고 보여진다.
나) 부부
동학의 평등사상은 우선적으로 가정내의 여성에게 적용되었다. 최제우는 득도한 후 자신의 도를 권하면서 부인 박씨에게 교훈가를 지어 보내었다. 도의 기초는 가정에 있으며, 가정의 행복은 부부화순에 달려있으므로 남자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하며 몸소 실천하였다. 이에 관하여≪龍潭遺詞≫<道修詞>에서 “家道和順하는 법은 婦人에게 관계하니, 부인은 경계를 다 버리고 저도 역시 괴이하니 절통코 애달하다. 有是夫 有是妻라 하는 도리없다만은 현숙한 모든 벗은 차차로 경계해서 안심수도하여 주소”라 하였다. 즉 도의 성취여부는 부인에게 관계되며 수도하는 집에서의 가도화순은 남편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강제·강압이 아닌 和順의 강조는 권위주위적 가장을 지양하는 가족·부부관계 구축을 주장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화순으로 이끄는 주체는 남성=夫에 두고 있어 완전한 평등과는 거리가 다소 있다고 보여진다.
이 점은 최시형의 경우도 같아 아내를 강압적으로 다스리지 말며 인내와 사랑으로써 인간적인 대우와 인격적인 존중으로 대하라고 가르쳤다.
夫婦가 和順함은 우리 道의 初步니 도의 通不通이 도무지 內外의 和不和에 있나니라, 내외가 和하지 못하고저 하는 것은 자기집에 불난 것을 끄지 않고 타인의 불을 끄는 자와 같으니라 그럼으로 夫人을 和하지 못하면 비록 날로 三牲의 用으로써 天主를 위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感應할 바 없으리라 夫人이 或夫命을 쫓지 아니하거든 정성을 다하여 拜하라 溫言順話로써 一拜一拜하면 비록 盜跖의 惡이라도 感化가 되리니라(李敦化,≪天道敎創建史≫2편 6장).
일찍이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여종을 해방하여 한 사람은 양녀로 삼고 또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다는 최제우의 고사를 미루어 그의 근대적인 여성관이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최제우의 근대적 여성관은 그가 사형당한 후에 최시형에 의해 계속 발전하였다.
다) 부녀·어린이
최시형은 교리를 펴나가는 동안 특히 부녀·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할 것을 가르치고, 남자들이 부녀·어린이에게 강폭이 하는 것은 自尊하는 태도에서 오는 것이라 하였다.
나는 비록 婦人·小兒의 말이라고 또한 배울 것은 배우며 쫓을 것은 쫓나니 이는 모든 선은 다 天語로 알고 믿음이니라. 이제 諸君의 行爲를 본즉 自尊하는 者ㅣ 많으니 可歎할 일이로다. 내ㅣ 또한 세상사람이어니 어찌 이런 마음이 없겠느냐마는 내ㅣ 이를 하지 아니함은 한울을 養하지 못할까 두려워함이라 (李敦化,≪天道敎創建史≫, 2편 2장).
즉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와 부녀자를 한울에 비유하였다.
라) 며느리
근대적 여성관은 최시형의 오랜 지하 잠행생활 동안 더욱이 성숙되어 갔다. 특히 1885년 상주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講道하였다.
내 일찍 청주 서택순가를 지나다가 그 子婦織布의 청을 듣고 서군에게 물으되 군의 자부가 직포하느냐 천주직포하느냐 하매 서군이 나의 말을 不卞하였나니 어찌 서군뿐이리오(李敦化,≪天道敎創建史≫, 2편 6장).
이는 人乃天의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실천철학인 事人如天에 관한 비유라 하겠다. 즉 며느리를 종래의 며느리로 대우하지 말고, 그녀가 ‘侍天主’하고 있으므로 한울님으로써 대우하라고 하는 것이니, 최제우의 인간평등사상이 실천적으로 나타난 것이 사인여천으로 체계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내수도문>에 나타난 인간관
이상에서 살펴본 새로운 인간관이 잘 나타난 것이<內修道文>이다.<내수도문>은 최시형이 1889년에 부녀를 위해 지은 경전으로서 修道의 本이 부인에게 있음을 통달하고<내수도문>을 지었다고 전한다.<내수도문>에는 양반사회의 질서속에서 가장 약자적 위치에 서게 되는 부녀(며느리)·아동·노비들을 사랑하여 한울님을 섬기듯 하라고 하였다.
집안 모든 사람을 한울같이 恭敬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奴隷를 자식같이 사랑할라. 牛馬六畜을 허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怒하시나니라(李敦化,≪天道敎創建史≫, 2편 6장).
侍天主하고 있는 모든 인간 즉 아내·며느리·어린이·노비·우마육축까지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고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동학지도자들의 여성관이 실제로 이러하였음에도 최제우의 경우 그 표현에 있어서는 ‘女必從夫’ ‘夫和婦順’ 등의 유교적 윤리관에서 비롯한 용어들이 눈에 뜨인다. 이것은 그가 처하였던 시대적 한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최제우는 어려서부터 도학으로 이름높은 부친의 교육을 받아 유교적 소양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바) 집강소시기의 가족관계
≪동학사≫권 2에 수록된 동학농민군의 집강소시기의 폐정개혁을 위한 행정요강 12개조중 신분과 가족관계의 내용은 4개 조항이다.
1. 노비문서는 태워 버릴 것.
1. 七般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平壤笠은 벗겨 버릴 것.
1. 청춘과부는 재가를 허할 것.
1. 관리의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吳知泳,≪東學史≫).
대체로 동학지도자들의 인간관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동학과 동학농민운동과는 구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분되는 두 세력의 인간관계의 개혁안이 대동소이하였던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사상 나아가서는 한 종교단체의 사상만이 아닌 대부분의 기층사회민의 요구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대하여 보수적인 양반은 “동학에는 빈부와 귀천의 차가 없다”, “嫡庶奴主의 구별이 없다”, “內外尊卑의 구별이 없다”는 등 봉건적인 신분관에 입각하여 비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이미 1801년 內需司를 위시한 각 宮房과 각 司에서 奴婢案을 불태움으로써 형식상 官奴婢가 폐지되었고, 1886년 私奴婢身分의 세습을 금하고 그 使役이 당대에 한정하게 됨으로써 노비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분제는 완전 폐기 일보직전 단계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710) 실제로 강릉 거주의 강릉 김씨 일가의 노비의 수가 1801년 양반의 3배이었는데, 1885년 양반 가족의 1/5로 축소된 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 현상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711)
즉 개화인사들의 저술은 외국에서 집필하였거나, 외국여행에서 돌아와 집필되었으므로 한국의 실정과 관계없이 개혁의 방향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겠으나, 1800년대 민란시기를 배경으로 형성된 동학사상에서 이미 그 개혁의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일반 서민들의 요구 내지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가족과 사회 내에서의 인간평등관이 아래로부터 성숙되자 봉건적 신분인 양반도 서양의 근대법이라는 외피로 포장하여 입법화-법제화시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현실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동학지도자들의 여성관이 실제로 이러하였음에도 최제우의 경우 그 표현에 있어서는 ‘女必從夫’·‘夫和婦順’ 등의 유교적 윤리관에서 비롯한 용어들이 눈에 뜨인다. 이것은 그가 처하였던 시대적 한계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