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Ⅵ. 조선사회의 변동2. 세도 정치와 농민의 저항[2]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난 까닭은?

진주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농민 봉기철종 때에 가장 심하여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함흥, 남으로는 제주도까지 확대 되었다.

철종 때에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1862)는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이 시기의 농민 봉기는 대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일어났으며, 그 규모나 양상도 비슷하였다. 처음에는 관청에 호소하다가,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봉기한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항거는 단순한 반발이 아닌,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항거하여 사회적 불만을 드러낸 농민의 자각 운동이었다.

읽기자료

진주 농민 봉기

임술년(1862) 2월 19일, 진주민 수만 명이 머리에 횐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진주 읍내에 모여 서리들의 가옥 수십 호를 불사르고 부수어, 그 움직임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병사가 해산시키고자 장시에 나가니, 흰 수건을 두른 백성들이 그를 빙 둘러싸고는 백성들의 재물을 횡령한 조목, 아전들이 세금을 포탈하고 강제로 징수한 일들을 면전에서 여러 번 문책하는데, 그 능멸하고 핍박함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임술록
19세기의 농민 봉기
진주성 지도 | 국립 진주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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