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
전주 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이 해산하자,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궁궐을 침범하였으며,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일본군의 침략 행위가 노골화되자, 농민군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일어났다.
서울을 향해 북상하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많은 희생을 치른 채 물러나고 말았다.
농민군은 태인에서 최후의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기울어진 전세를 돌이키지 못하였고, 민가에 숨어 재기를 계획하던 전봉준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도움글
⋅ 우금치 전투 ⋅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우리 나라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자, 정부와 화약을 맺고 있던 동학 농민군은 일본을 내쫓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이 때 모인 동학 농민군의 수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전봉준이 거느린 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관군은 농민군의 공격을 받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우금치로 후퇴하였다. 이후 우금치를 둘러싸고 동학 농민군과 관군⋅일본군 사이에 6, 7일간에 걸쳐 50여 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참패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500여 명은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항전하다가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하였고, 피신 중이던 전봉준은 얼마 후 체포되었다.
이로써 고부 봉기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은 뒤에 항일 의병 전쟁에 참전하여 항일 투쟁의 전통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