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Ⅷ.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2. 일제의 침략과 의병 전쟁[1] 우리 민족은 을사조약에 어떻게 저항하였는가?

을사조약 반대 투쟁

고종 황제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을사조약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는 민족의 분노가 여러 가지 형태로 폭발하였다. 상인들은 일제히 상점 문을 닫아 저항하고, 학생들은 자진하여 휴학하였다.

이상설, 최익현 등 전직 고관과 유생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친일 대신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장지연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을사조약 반대 운동의 소식을 자세히 보도하여 민족의 항일 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민족의 움직임이 전개되는 가운데 고종 황제는 조약 체결이 무효임을 선언했으며, 국제 사회에 독립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특히, 미국에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상호협력 조항을 근거로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제2차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1907). 그러나 이러한 고종 황제의 외교적 노력은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있던 세계 정세 아래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을사조약 이후에는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이 때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을 들 수 있다.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은 평해, 울진, 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제까지는 대부분의 의병장이 전직 고관이나 유생들이었는데, 신돌석평민이었다는 것은 의병 운동이 전 민족적인 국권 수호 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 준다.

읽기자료

시일야방성대곡

지난날 이토 후작이 한국에 옴에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서로서로 모여 말하기를 “이토 후작이 평시에 동양 3국의 안정과 안녕을 맡아 주선하던 인물이라, 금일에 한국에 옴에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하게 세울 방략을 권고하리라.” 하여 항구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크게 환영하였더니, 세상일이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
이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분열하는 조짐을 만들어 낸 것인즉, 이토 후작의 본래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 …… 아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
읽기자료

⋅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서 ⋅

슬프다.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속에서 멸망하리라. 삶을 원하는 자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 살아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민)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를 갚고 2천만 동포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황천에서 동포들을 돕고자 하니, 우리 동포 형제들이여, 천만 배 기운을 떨쳐 힘써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협력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아! 슬프다.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별하노라. 1905년 11월 4일
민영환

을미의병을사의병

을미의병 때 ‘국모(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자’는 구호를 내건 것과 달리, 을사의병은 ‘일제를 몰아 내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목표를 내세웠다.
도움글

헤이그 특사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고종 황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점과 일본의 침략 사실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세 특사는 헤이그에서 그들이 머무르던 집에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 국가의 외교 사절단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들은 각국의 대표들에게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주장하였으며, 만국 기자 협회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는 등 우리 나라의 사정을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심한 방해 공작으로 세 특사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못한 데 대해 통분해하던 이준 열사는 그 곳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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