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육의 보급
근대 학교는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면서 민족 정신을 키워,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개화 운동이 진행되면서 정부에서 영어 강습 기관을 세우고, 함경도 덕원에서는 주민들이 원산 학사를 세우고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는데, 이는 우리 나라 근대 교육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후, 정부에서는 육영 공원을 세우고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세 사람을 초빙하여 주로 양반 자제들에게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한편,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배재 학당, 이화 학당, 정신 여학교, 경신 학교, 배화 학당 등을 세워 신학문과 서양 문화 및 영어 등을 가르쳤다.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교육 개혁도 이루어졌다. 외세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애국심을 기르면서 신학문과 신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러므로 근대 교육의 실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정부는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소학교 등을 차례로 세워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에도 중학교와 각종 실업 학교들을 세웠다.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권의 확립을 이룩하는 데에는 교육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교육을 통하여 민족 정신과 민족 의식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졌으나, 정부에서 세운 학교만으로는 교육열을 충족시킬 수 없었으므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국민들이 스스로 기금을 모아 사립 학교들을 세웠다.
⋅ 대성 학교 이야기 ⋅
1907년에 대성 학교 설립의 보도가 세상에 알려지자, 입학 지원자가 조수와 같이 밀려 순식간에 5, 6백 명의 청년이 모였다. 당시에 많은 학생들은 입학 시험을 거쳐 거의 전부가 예비반으로 편입되었다. 1학년은 50명이었으며, 교장으로는 윤치호를 추대하고 안창호는 스스로 대리 교장이 되었다.…… 중학교 학생이라 하지마는 당시 대성 학교 학생들은 20세, 30세의 청년 유지들로, 입을 벌리면 나라를 걱정하였고, 행동은 모두 민족의 지도자를 자부하였다. 학교의 과정은 중등 학교라고 하지만, 그 정도가 높아 4학년 과정은 어느 전문학교의 3학년 과정과 대등하였으며, 학교의 설비도 중등 학교로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잘 갖추었다. …… 이 학교는 ‘애국 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학교였으므로, 매일 아침 엄숙한 조회를 하여 ‘애국가’를 부른 후 ‘애국’에 관한 훈화가 있어 학생들은 이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체조 시간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 당시 체조 교사는 군대의 사관으로 뜻이 높던 철혈의 사람 정인목이었던바, 그는 군대식으로 학생들을 교련하였다. 눈이 쌓인 추운 겨울에 광야에서 체조를 시켰으며, 쇠를 녹이는 폭양 아래에서 전술 강화를 하였고 이따금 야간에 비상 소집령을 내려 함산 계곡에서 담력을 기르게 하였으며, 달빛이 비치는 얼어붙은 강에서 ‘장하도다. 우리 학도(군대 행진가)’를 부르며 행진을 하여 활기를 길러 주었다.
‘안도산 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