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태조(太祖)-선조(宣祖)선조조(宣祖朝)

선조 25년(1592)

임진(壬辰) 25년(1592) 여름 4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平秀吉, 豊臣秀吉]가 우리나라에서 길을 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병사 20만 명을 이끌고 이키시마[一岐島]에 이르렀다. 우키다 히데이에[平秀家] 등 36명의 장수가 군사들을 나누어 거느렸고, 쓰시마[對馬] 도주(島主) 히라요시[平義智] 및 다이라[平調信], 행장(行長) 겐소[玄蘇] 등으로 길을 안내하게 하여 병선(兵船) 4~5만 척이 바다를 뒤덮고 왔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이 [적의] 탄환에 맞아 사망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부채에 ‘달무리 끼고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으니,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갚게 되었네.’라고 적은 후 집안의 노비에게 [전해 주며] 부친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그 후 [송상현은] 조복을 입은 후 갑판에 있는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왜병[日兵]1)들이 [그를 보고] 생포하려고 하였으나 송상현이 발로 걷어차며 저항하다가 해를 입게 되었다. 다이라가 그를 관에 넣어 성밖에 매장하고 푯말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하였다. 순찰사(巡察使) 이일(李鎰)이 [왜적과 싸우다] 패하고 돌아왔다.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월역(月驛, 단월역(丹月驛))에 주둔하였다.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이 높은 언덕에 자리를 차지하고 역습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따르지 않고 탄금대(彈琴臺)로 나가 강물을 등지고 진을 쳤다. 이 달 28일에 왜병이 충주성(忠州城)에 입성하고, 신립의 군대는 대패하였다. 신립과 김여물이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그믐날 왕께서 출행(出幸)하실 때 사관(祠官, 종묘와 사직의 관원)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주를 모시고 앞서 가게 하고, 왕비⋅세자와 왕자 신성군(信城君)⋅정원군(定遠君)이 뒤를 따랐다. 밤에 비를 맞으며 임진(臨津)을 건넜다.

여름 5월 2일 동이 틀 무렵 [왕께서] 여러 재상을 동파관(東坡館)으로 불러 대책을 물어 보셨다. 도승지(都承旨) 이항복(李恒福)이 “어가를 의주(義州)에 머물게 하셨다가 명(明)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하소서.”라고 하였다. 왕께서 서쪽으로 갈 것을 결정하셨다. 5일에 왜병이 경성에 들어오니 유도 장군(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도망갔다. 이때 왕께서 평양(平壤)에 진주하시고, 세자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이천(伊川)에 주둔하였다.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이 김명원과 함께 한강(漢江)을 방어하다가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을 따라 양주(楊州)에 왔다. [신각은 군사를 이끌고 양주의] 개재 고개[蟹峴]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그런데 승전보가 전달되기 전에 김명원이 신각이 도망갔다고 장계하는 바람에 주살되었다. 신할(申硈)이 임진에서 전사하자 한응인(韓應寅)2)이 [임진을 버리고] 도망갔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舜臣)과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왜병들을 크게 격파하여 그들의 전함 30척을 불태웠다. 노량(露梁)에서 다시 싸워 전함 13척을 또 불태웠다.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는 여강(驪江)에 주둔하고 있는 왜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6월에 전라, 경상, 충청의 3도 병사들이 용인(龍仁)에서 [적군에게] 패하였다. 이순신, 이억기(李億祺)3)가 당항포(唐項浦)에서 적을 만나 그들의 배 30척을 밀어붙여 격파하고, 영등포(永登浦)에서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켰다. 왕께서 숙천(肅川)에 주둔해 계시면서 이덕형(李德馨)으로 하여금 요동(遼東)에 군사를 보내 줄 것을 청하게 하였다. 왜병이 평양에 입성하여 점거하였다. 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관북(關北)으로 침입하였는데, 감사(監司) 유영립(柳永立)이 사로잡히고, 병사(兵使) 이혼(李渾)이 적민(賊民)에게 살해당하였다.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는 빠른 걸음으로 북쪽의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갔다.

왕께서 세자(광해군)에게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게 하여 조정을 나누셨다[分朝]. 왕께서 정주(定州)에 주둔하시고, 세자는 영변부(寧邊府)에 나아가 머무셨다. 요동 유격(遼東遊擊) 사유(史游)와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이 원병(援兵) 1천명을 거느리고 의주에 주둔하였다. 왕께서 의주에 도착하셔서 목사(牧使)가 집무를 보는 관사를 임시 진영으로 삼고, 지돈령(知敦寧) 정곤수(鄭崑壽)를 파견하여 명나라에 대병(大兵)을 청하였다. 호서(湖西)4)에서는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이, 영남(嶺南)에서는 곽재우(郭再祐)와 정인홍(鄭仁弘)이, 호서에서는 조헌(趙憲)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곽재우는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칭하며 적진 사이를 나는 듯이 치고 달리며 드나드니, 날아다니는 총탄들도 그를 명중시키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의령(宜寧) 등 몇 고을을 수복하였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낙동강(洛東江) 오른쪽에 위치한 하도(下道)가 안정을 되찾았다. 정인홍은 무계(茂溪)에 주둔하고 있던 왜병들을 격파하여 패퇴시켰다.

명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도와달라는 우리나라의 청을 들어 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데, 요동 사람들이 “조선이 일본을 위하여 가짜 왕을 삼아 인도하여 온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래서 석성은 먼저] 임세록(林世祿), 안국신(宋國臣),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와 [사정을] 염탐하게 하였다. [임세록 등은 임무를 마치고 명나라로] 돌아가 그 소문이 유언비어라고 보고하였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도 신점(申點), 유몽정(柳夢鼎)을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내 원병을] 울며 부탁하게 하였다. 결국 명의 황제[明主]【신종(神宗)】가 조선을 돕기로 마음을 결정하였고, 호사은(犒師銀, 군사들의 식량을 마련할 자금) 4만 냥5)도 보내 왔다.

가을 7월에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은 왜병을 웅치(熊峙)와 무계현(茂溪縣)에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이복남(李福男)은 이치(梨峙)에서, 곽재우는 현풍(玄風)과 창녕(昌寧) 사이에서 [적군을] 격퇴하여 패퇴시켰다. 이순신, 이억기, 원균이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서 왜선 70여 척과 왜병 9천 명을 남김없이 격파하였다. 왜병의 구원병이 안골포(安骨浦)에 역습하여 배 40여 척을 불태웠다. 요진 총병(遼鎭摠兵) 조승훈(祖承訓)은 구원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평양의 적진(敵陣)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여 [요동으로] 되돌아갔다. 묘향산(妙香山)의 승려 휴정(休靜)이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았고, 또 다른 그의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의 처영(處英)을 장군으로 삼아 승군(僧軍)을 각각 일으켰다. 유정은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적진에 여러 번 사자(使者)로 갔는데, 왜인들이 [그에게] 신복하였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북계(北界, 함경도 지역)로 침입하니 회령(會寧)에서 조정에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이 두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에게 항복하였다. 고경명은 금산(錦山)에서 적에게 패해 사망하였는데, 후에 그는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양성현(陽城縣) 사람인 홍계남(洪季男)과 교동 향리(喬桐鄕吏) 고언백(高彦伯)이 의병을 일으켰다.

[8월] 명나라 황제가 호군(犒軍)하는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보내 왔다.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로 하여금 남병(南兵)을 거느리고 북안(北岸)에 주둔하게 하였다. 낙상지는 힘이 세어 천 근(斤)을 쉽게 들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렀다. 의병장(義兵將) 조헌은 청주성(淸川城)을, 진주 판관(晋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은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별장(別將) 권응수(權應銖)는 영천성(永川城)을 수복하였다. 조헌이 의병을 일으킨 승려[義僧] 영규(靈圭)와 함께 금산(錦山)에서 [적군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적이 퇴각한 후에 조헌의] 제자들이 여러 시체를 거두어 무덤 하나를 만들고 ‘7백 명의 의로운 선비들의 무덤[七百義士塚]’이라고 표시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조헌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하였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은 조헌이 전사하였음을 듣고 성 아래로 가서 [적군과] 격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금산에 주둔하였던 왜병이 밤에 도망갔다. 호남이 다시 완전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조헌의 공이 장수양(張睢陽, 당나라의 무장)에 비교할 만하다고 하였다.

가을 9월에 전(前) 사성(司成) 우성전(禹性傳)이 의병을 일으켰다. 박진(朴晉)이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여 비격진천뢰포(飛擊震天雷砲)를 성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왜병이 모여 [성안으로 떨어진 비격진천뢰포] 구경하며 서로 밀치고 당기다가 포 안에 있던 철편(鐵片)이 별처럼 부서졌다. 이에 맞아 사망한 자가 20여 명이었다. [왜병이 비격진천뢰포가 또 날아올까 두려워] 다음 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박진이 경주(慶州)에 입성하여 남은 곡식 1만여 석을 얻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연안성(延安城)을 지키고,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10월에] 부산(釜山)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진주를] 포위하였는데,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6)이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조헌의 아들 조완도(趙完堵)가 복수병(復讎兵)을 일으켰다. 명나라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가 기마병 2천을 거느리고 사대수(査大受)와 함께 행조(行朝)를 호위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주둔하였다. 정문부가 길주(吉州)에서 국가를 배반한 적 국세필(鞠世弼)과 명천(明川)에서 국가를 배반한 적 정말수(鄭末守)의 목을 베었고, 회령 유생(儒生) 신세준(申世俊) 역시 국가를 배반한 적 국경인(鞠景仁)의 목을 베었다.

11월에 명나라 황제가 송응창(宋應昌)을 경락(經略)으로 삼아 먼저 병사 2만을 출발시키고 마가은(馬價銀, 말을 조달하는 비용) 3천 냥을 보냈으며, 궁각(弓角)과 화약(火藥)을 준비하여 보내 주었다. 호서의 사민(士民)이 의곡(義穀)을 모아 의주에 수송하였다. 전(前) 동지사(同知事) 성혼(成渾)이 국왕이 거처하는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

12월에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좌협 대장(左協大將) 양원(楊元), 중협 대장(中協大將) 이여백(李如栢), 우협 대장(右協大將) 장세작(張世爵) 등 37명의 장수가 병사 4만 3천여 명을 이끌고 원병을 왔고, 이어 [추가로] 8천 명이 더 나왔다.

1)『국조사』의 저자는 임진왜란을 서술하며 당시 조선인이 사용하던 왜병⋅왜군이라는 용어 대신 일병(日兵)⋅일군(日軍)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쓰고 있다. 이는 『국조사』가 편찬된 개항기에 왜(倭)라는 용어보다 일본(日本)이라는 용어가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일병(日兵)⋅일군(日軍) 등을 왜병(倭兵)⋅왜군(倭軍) 등으로 일괄 번역하였다.
2)원문에는 한응실(韓應實)로 되어 있으나, 한응인(韓應寅)으로 바로잡는다.
3)원문에는 이억기(李億期)로 되어 있으나, 이억기(李億祺)로 바로잡는다.
4)고경명과 김천일은 호남(湖南)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호서(湖西)라고 적은 것은 저자의 오류인 듯 보인다.
5)『국조보감』에는 2만 냥으로 되어 있음.
6)원문에는 김회민(金晦敏)으로 되어 있으나, 김시민(金時敏)으로 바로잡는다.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