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유교 사회의 불교 전통 계승3. 불교 사상의 계승과 유불 교류

유불의 상호 인식과 교류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고 유학자들은 공론에 의해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조선 초 대표적인 척불론자인 정도전(鄭道傳, 1337∼1398)은 고려 말 이후 배불론의 연장선상에서 불교에 대해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에 해독이 되는 악법이라고 규정하였고 창업의 기반을 닦는 데 저해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불교 인식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사회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고 구시대의 기득권과 유제(遺制)를 척결하려는 정치적 입장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정도전이 남긴 『불씨잡변(佛氏雜辨)』에는 윤회나 인과설(因果說) 등 불교적 내세관에 대한 비판, 오랑캐의 종교라는 화이론적인 시각이 표출되고 있는데, 심기리편(心氣理篇)에는 다음과 같은 심성론에 대한 인식도 나타난다.

그는 유교는 “마음을 통하여 본연의 성을 궁구하는 것(盡心知性)”이지만 불교는 “마음으로 본성을 보는 것(觀心見性)”이라고 파악하여 불교에서 심과 성을 동일하게 간주한다고 비판한다. 성리학에서 성(性)은 이(理)이며 이가 심(心)과 기(氣)의 근본으로서 성과 심은 동격의 개념이 아니었다. 이에 비해 불교는 마음의 작용을 절대화시켜 일체 현상을 마음의 산물로 인식하고 본성의 이치를 도외시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불교 특히 선종은 심의(心意)에 따라 행동하여 이의 절대성과 그에 기반하고 있는 인륜 도덕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쳤다.341) 이러한 정도전의 불교 이해 및 선종 비판은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고 그의 독창적 견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 유학자의 불교 비판은 정도전이 제기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배불론과 불교 비판에 대한 불교 측의 인식론적 대응이나 구체적 논리는 별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무학 자초의 제자 함허 기화는 『현정론』에서 유교의 오상(五常)과 불교의 오계(五戒)를 비교하여 양자를 본질 상 같은 것으로 보았고 불교의 인과나 불살생계를 통해 유교의 덕치(德治)와 인(仁)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기화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저자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또한 불교에 대한 비판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불교의 장점과 유불의 조화를 논한 글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도 윤리 문제와 국가에 대한 기여를 강조하면서 불교의 필요성과 유불 공존의 가능성을 도모한 것이었지 심성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나 성리학에 대한 인식론적 대응으로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17세기 백곡 처능의 간폐석교소에는 불교에 대한 세간의 비판을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342) 즉, 공간적 차이(異邦域), 시대적 차이(殊時代), 인과응보와 윤회설의 허망함, 경제적인 해악, 정교(政敎)의 손상, 편오(編伍)의 행정 조직에서 벗어남을 지적하였다. 이는 불교가 중화가 아닌 이적의 교이며 하·은·주 삼대(三代)의 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허망한 말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며 사회 윤리와 성리학적 이념 및 경제와 국가 통치 체제에 해가 된다는 내용이다. 처능은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불교가 정치·사회·윤리에 모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불교의 순기능을 국왕에게 알리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고 또 임진왜란 이후 높아진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식론적 논리 체계는 이 역시 결여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운봉 대지(雲峯大智)의 『심성론(心性論)』은 전통적인 불교적 심성 논의를 요약하고 있어 주목된다. 대지는 종밀의 여래장(如來藏) 해석에 근거하여 『기신론』의 일심(一心)과 여래장의 불성(佛性)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343) 본문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부처의 종자가 있다는 여래장설을 토대로 하여 진심(眞心)과 자성(自性)이 곧 부처이며 법이라고 설파하였고, 이 심성을 깨우치는 실천 방식으로 지눌이 제시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진심즉성(眞心卽性)’의 논리는 일심의 체(體)와 작용 양면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불교 심성론이었다. 청허 휴정을 비롯한 조선시대 승려들은 이 일심의 심법을 매개로 한 삼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 한 예로 18세기 묵암 최눌은 “성현의 마음을 궁구하는 것은 선을 닦는 것과 다를 것이 없고 『대학(大學)』의 삼강(三綱)은 비·지·원(悲·智·願)의 삼심(三心)에 부합된다.”고 하여 마음을 통해 유교와 불교의 일치를 설명하고 있다.344)

<독서당계회도 부분>   
1570년(선조 3)경에 한강 연안의 두모포(豆毛浦)에 있던 독서당에서 열린 계회(契會)를 그린 그림이다. 산과 독서당을 왼쪽에 묘사하였고, 건물 왼쪽에 선비들이 앉아 있다. 조선 전기에 유생들은 절에 올라가 독서하며 과거를 준비하였고, 사가독서를 위하여 독서당을 처음 세운 것은 성종대였다.

유학자 중에서도 삼교 회통의 시각에서 유불의 조화와 양자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도학(道學)의 입장에서 불교는 배척되어야 할 이단이기는 했지만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정도와 인식은 시대와 개인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불교의 청정 담박함과 과욕(寡慾), 양심(養心)의 설은 유교와 비슷하므로, 불교에 미혹되지는 않지만 심하게 배척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였다.345) 조선 전기에는 유생이 절에 올라가 독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도 처음에는 북한산 장의사에서 이루어졌고 용산의 폐사에 독서당(讀書堂)을 세운 것은 성종대의 일이다. 중종대의 조광조는 “산의 절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학당에 거처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당시의 세태를 우려하기도 하였다.346) 사찰에서 공부하는 관행은 유학자와 승려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가능하게 하였고 불교에 심취하거나 교리에 해박한 유학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에는 삼교 회통적인 사상 조류가 성행하였는데, 불교에 호감을 가진 대표적 인사로 허균(1569∼1618)과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을 들 수 있다.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한 허균은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 불교를 숭신하여 조야의 비난을 샀다. 그는 휴정, 유정과 도 절친하였고 휴정의 문집 『청허집』 서문에서 나옹 법통설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허균은 “위로는 유학을 높여 사류의 습속을 맑게 하고 아래로는 부처의 인과와 화복으로 인심을 깨우치면 고르게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하여 유불 병행론을 피력하였다. 노수신은 오랜 유배 생활을 겪으며 불교의 영향을 받고 승려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주석에 대해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는 불교와 연관된 내용을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는데 이 글을 승려들도 많이 읽었다고 한다.347) 노수신은 젊은 시절의 부휴 선수와 사명 유정에게 유학 및 시를 가르쳤고 승려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이(1536∼1584) 또한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문묘에 배향된 명현이지만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경을 읽고 선학(禪學)을 배운 행적이 후일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의 묘처가 유교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유교를 버리고 불교에서 구할 것이 없다.”라고 언명하였고,348) 불교의 허탄함을 자각하고 1년 만에 하산하였지만 심도 깊은 불교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그가 국왕에게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는 불교가 이적의 교임을 분명히 한 뒤 불교 교리 중 윤회와 보응설은 조잡한 데 비해 심성론은 정치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자신이 이해한 선학의 요체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일심을 들어 설명하였다.349)

이수광(李睟光, 1563∼1628) 또한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는데, 그는 불교의 즉심견성(卽心見性)과 유학의 존심명리(存心明理)는 심을 주로 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심의 작용이 같지 않으므로 근원이 같다고 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는 “이단이 유학의 도에 해가 되지만 한편 이익도 있다. 불교의 견심(見心)은 마음을 놓는 자의 경계가 되고 살생을 금하는 것은 죽이기 좋아하는 자의 경계가 된다.”고 하여350) 불교가 윤리적 측면에서 효용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성리학 이해가 심화되고 예법, 친족 관념, 사회 질서가 성리학적 이념 에 기반하여 재편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불교 또한 시대 변화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학자 문집의 구성과 체계를 그대로 따른 승려의 문집이 다수 간행되었고, 유학의 도통설에서 영향을 받아 법통설이 제기되고 정립되었다.

1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벽암 각성의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와 제자 나암 진일(懶庵眞一)의 『석문가례초(釋門家禮抄)』, 허백 명조의 『승가예의문(僧家禮儀文)』과 같은 불교 의례집에서도 시대적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각성은 “조선에는 불가의 상례에 대한 근본이 없고 현재 시행되고 있는 것은 규범에 맞지 않는다. 『선원청규(禪院淸規)』 등의 상례의에 의거하되 중국 법이 동방의 예와 맞지 않으므로 그 요점만을 간추린다.”고 하였고, 『석문가례초』의 발문에서는 “속례인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취해 『선원청규』 등에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그 절요를 간추린다.”고 밝히고 있다.351) 당시 조선사회 일반에 정착되었던 『주자가례』에서 취한 내용은 다름 아닌 상례의 오복제였다. 즉, 사제(師弟)와 세속의 족친을 함께 넣어 친소의 원근을 규정한 승오복도(僧五服圖), 본종오복지도(本宗五服之圖), 촌수도(寸數圖) 등이 불교 의례집에 기재된 것이다.

이들 의례집이 등장한 17세기에는 승려의 사유 전답이 조성되었고 그 전답을 상좌(上座)와 4촌 이상 족친이 절반씩 상속받는 법령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종법에 의해 상속의 대상과 범주를 규정할 필요에서 관련 내용을 담은 예의문 등이 성립된 것이다. 문중이 발달하고 족보 편찬이 크게 유행한 19세기에 승족보(僧族譜)가 등장하는 것도 불교가 시대 조류의 외연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조선시대의 고승들은 유학에 대한 소양도 필수적이었다. 문집이나 저술을 남긴 승려들은 유학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시에도 일가견을 지녔으며 시문을 통해 유학자와 교류하였다. 휴정은 당시 승려들이 유가의 시구만 암송하고 배운다고 비판하였지만 그 자신도 선과 유교, 도교의 핵심을 정리한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저술하는 등 유학과 제가에 정통하였다. 『청허집』에는 이황, 조식, 기대승 등에게 보낸 편지도 들어 있으며 양종 복립을 윤허한 명종을 추도하는 기문도 실려 있다. 휴정의 제자 유정 또한 박순, 이산해, 고경명, 허봉, 허균, 임제 등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는데, 그는 승과 급제 후 기대승의 훈도를 받고 노수신에게 사자(四子, 노자·장자·열자·문자)와 이태백·두보의 시를 직접 배웠다. 유정이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는 이항복, 이덕형, 이정구, 이식, 이수광, 정두경, 권율 등 당시 정국을 운영하던 고위 관료들에게서 송별시를 받기도 하였다. 부휴 선수도 노수신에게 7년간 책을 빌려 보았고 기대승과도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그 제자 벽암 각성 또한 제자백가를 익히고 시문으로 인정받는 한편 동양위 신익성과 절친하였다. 각성의 적전 제자인 취미 수초(翠微守初, 1590∼1668)는 사육신 성삼문의 후예로서 이식, 김육 등과 친하였고 장유가 결사를 만들면서 그에게 강석을 열도록 부탁한 일도 있었다. 백곡 처능은 신익성에게 유교 경전 및 역사서, 한유와 소동파의 시문을 배웠고 김석주와 가까웠으며 정두경, 이식, 이경석, 이명한 등과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당대의 대표적 시승(詩僧)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백암 성총 또한 정두경, 김석주, 김수항 등과 방외(方外)의 교류를 하였고 제자 무용 수연은 영의정 이광좌, 대사성 최창대 등 고위 관료와 친분을 맺었다.

<휴정의 글씨>   
휴정이 지은 시 ‘청야사(淸夜辭)’로 선적 풍미가 느껴진다. 그는 당시 승려들이 유가의 시구만 배운다고 비판하였지만 자신은 『삼가귀감』을 지어 선과 유교, 도교의 핵심을 정리하는 등 유가와 제자백가에 해박하였다.

이처럼 17세기 이후에도 고승들은 일상적으로 시문을 매개로 유학자나 고위 관료와 교류하였다. 글을 통한 유불의 밀접한 교감은 조선 후기 승려의 비문, 문집의 서문이나 발문을 지은 이들의 명단에서도 확인된다. 대부분이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나 관료인데, 이들이 비문과 같은 상징성이 큰 글을 쓰게 된 까닭은 개인적 친분도 물론 작용하였겠지만 불교계를 독려하고 민심을 무마하는 차원의 관례적인 행위였을 가능성도 크다.

<벽암 각성 진영>   
벽암 각성은 인조대에 팔도 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 축조를 감독하였으며, 왕실의 후원을 받아 호서와 호남 일대에서 많은 중수 불사를 하였다. 그의 비문은 1664년(현종 5)에 당대의 문장가인 정두경이 찬하고 이우가 글씨를 썼다. 글을 통한 유불의 밀접한 교감을 엿볼 수 있다.
<법주사 벽암 대사비 탁본>   

청허계와 부휴계 주류 승려의 비문과 문집 서문을 지은 찬자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먼저 청허 휴정의 비문은 한문 4대가로 유명한 이정구, 이식, 장유가 썼고 제자인 편양 언기와 편양파 풍담 의심 계열은 이정구의 아들 이명한과 손자 이단상이 지었다. 또 사명 유정의 건봉사 비문은 후대에 남공철이 찬하였고 제자 송월 응상(松月應祥)과 손제자 춘파 쌍언(春坡雙彦)은 예조 판서와 홍문관 제학을 역임한 정구경이 맡았다. 응상의 제자 허백 명조는 이경석이, 쌍언의 제자 허곡 나백(虛谷懶白)은 김석주가 비문을 담당하였다. 한편, 휴정의 제자 소요 태능의 비문은 이경석, 기암 법견(奇巖法堅)의 『기암집(奇巖集)』 서문은 이조 참판 이민구, 제월 경헌(霽月敬軒)의 비문은 신익성이 지었다. 부휴계의 경우에도 벽암 각성은 이경석과 정두경, 백곡 처능은 김석주가 비문을 썼고 『백곡집(白谷集)』의 서문은 정두경이 썼다. 또 백암 성총은 김상복, 묵암 최눌은 이용원과 김정희가 비문을 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도 나타나는데 정조대에 정국을 주도한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설담 자우(雪潭自優)의 『설담집(雪潭集)』 서문과 몇 종의 승려 비문을 지었고, 그 중에는 개인적 친분이 있던 비구니를 기리는 「여 대사정유부도비명(女大師定有浮屠碑銘)」이 있어 주목된다. 그는 또 용주사 상량문도 찬하였고,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용주사의 창건 권선문은 규장각 검서관 출신인 이덕무(李德懋)가 지었다.

신헌 진영>   
표충사(表忠寺)에 소장되어 있는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1888)의 초상화이다. 신헌은 김정희의 제자로 초의 의순과 교류하였으며, 대둔사의 표충사보장록 글씨와 밀양 표충사의 현판을 쓰는 등 불교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창흡 초상>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안동 김씨로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이다. 형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율곡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무용 수연 등 승려들과 교류하였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에게 불교는 공식적으로는 기피의 대상이었다. 승려와 친했던 정두경이 “성안의 왕도 크지만 천하의 부처는 높다(城中王亦大天下佛爲尊).”라는 대구를 지었다가 문제가 되었고, 현종대 이후 과거 시험 답안에 불교나 도교 용어를 사용하면 무조건 떨어뜨렸다.352) 또 유학자의 문집을 간행할 때 승려와 주고받은 글이나 불교 관련 기문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펴내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유학자가 남긴 자료에서 불교에 대한 애정이나 심도 깊은 교학 이해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불교 개념어 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석전유해(釋典類解)』의 끝에는 김창흡의 시집에서 불교 용어를 발췌하여 해설을 붙인 「삼연선생시집중용불어해(三淵先生詩集中用佛語解)」가 실려 있고, 또 신흠의 『상촌집(象村集)』에 있는 「불가경의설(佛家經義說)」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는 조선 후기에도 불교 개념이나 교 리에 관한 지식을 가진 유학자가 없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김창흡은 명문가 출신으로 무용 수연 등 승려들과 교류하였고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석전유해』를 편찬한 연담 유일은 청허계 편양파에 속하며 대둔사의 화엄 강맥을 잇는 18세기 후반의 교학 종장이었다. 그는 승려임에도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는 등 춘추대의(春秋大義)와 존주(尊周) 관념을 중시하였고 유학에 정통하였다. 유불 문제에 관한 유일의 입장에서 주목되는 것은 유불의 도가 근본에서 일치하므로 북송대의 학자들이 불교를 깊이 공부하였고 불교가 성리학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지적한 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불교가 성리학의 성립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당송대는 물론 원명대에도 부처의 무리를 칭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불교 서적도 대부분 소장하고 있었다.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도 불교가 유학과 근본에서 같음을 알아서 불교의 설을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승려에게 이(理)와 자성(自性)의 뜻을 물어 통하였다. 또 주희(朱熹)가 대혜 종고를 생각하며 심법의 요체를 깨달았음을 전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희의 시를 보면 그가 불교에서 얻은 것이 적지 않은데 어찌 조선의 유자들은 하나같이 불교를 허무하다고 비판하는가.353)

유일은 이 글에서 불교 비판론에 대해서도 논거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먼저 윤회에 대해 마음의 본성인 진성(眞性)과 마음의 작용인 식심(識心)이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이므로 몸은 없어져도 심(心)은 없어지지 않으며 심이 식(識)으로 전환된다는 논리로 설명한다. 또한, 인과설과 같은 관념은 유학에도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극락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왕생은 염불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며 착한 이도 갈 수 있다고 하여 도덕을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심성 론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져서 부휴계 묵암 최눌과 논쟁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을 수록한 책이 불태워져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남아 있는 서문에 의하면 최눌의 입장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따로 원만하며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이었고, 유일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이 각각 원만하게 있지만 본래는 하나”라는 견해를 밝혔다.354) 구체적 논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심성론은 유불 양자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고 불교계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과 화엄의 이사관(理事觀)은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양자의 심성론을 대비시켜 이해할 때 주목해 볼만하다.

<답백파상인서(答白坡上人書)>   
김정희가 백파 긍선에게 보낸 간찰로 당시의 선풍(禪風)을 비판하고 자성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19세기에는 불교를 깊이 이해하는 지식인이 많이 생겨났다. 이는 당시 청나라의 학풍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전통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외적 대응이 요구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현상일 수도 있다. 일례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불교에 관한 논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유학에서 불교로 전향한 김대현(金大鉉)은 자신의 꿈에 빗대어 대중적 불교 입문서인 『술몽쇄언(述夢鎖言)』을 저술하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인 정약용도 강진에 유배가 있을 때 만덕사의 아암 혜장(兒庵惠藏, 1772∼1811)에게 『주역(周易)』을 전수하고 불교의 이치를 문답하였으며, 대둔사 연담 유일의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세기 초에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석지(釋志)가 나왔고, 정약용도 『대둔사지(大芚寺志)』, 『만덕사지(萬德寺志)』와 같은 사지(寺誌) 편찬을 지도하였으며, 직접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를 쓰기도 하는 등 유학자가 불교사를 서술하기도 하였다.355)

한편, 불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 김정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집안의 가풍이나 청나라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 정도가 상당하였다. 『금강경』과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후기(後記)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백파 긍선과 선학에 대해 논변하면서 화두에 천착하는 간화선의 폐해를 지적하고 경전 공부와 선교겸수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김정희 초상>   
소치 허련이 그린 완당 선생 초상(阮堂先生肖像)이다. 학예일치를 추구한 김정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김정희와 가장 절친한 승려는 초의 의순이었다. 의순은 긍선의 선론을 비판한 대둔사의 강백으로서 유학에도 견식을 가졌고,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 같은 차 관련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그 밖에 원예·서화·범자·범패 등 학예에 모두 능하였다. 이처럼 김정희와 같은 학예일치적(學藝一致的) 풍모를 지닌 의순은 정약용, 홍석주, 신위, 신헌 등 이름난 유학자나 관료뿐 아니라 남종화로 유명한 허유와도 교류하였다. 긍선 또한 당대 불교계의 고승으로서 유학자와 폭넓은 교유 관계를 가졌는데, 그의 『수선결사문』 서문은 세도가인 김조순이 지었고 「선교결사회기(禪敎結社會記)」는 기정진이 써 주었다.

19세기는 천주교 박해나 동학 발흥 등 종교 문제가 정치적·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된 시기였다. 일찍이 이수광은 중국에서 들여온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천주교는 천당과 지옥, 화복의 설로 믿게 하는 비천한 교의에 불과하다고 촌평하였고, 정조대 채제공도 서학이 천당지옥설로 혹세무민한다고 비난하였다.356) 그런데 이러한 인식의 잣대는 이미 불교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 즉, 조선 지식인의 입장에서 천당 지옥의 관념은 불교의 극락 지옥, 윤회적 내세관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었고 화복이나 인과 또한 이미 정착된 불교적 관념이었다.

<업칭 장면>   
지옥의 판관들이 죄인이 지은 죄의 무게를 저울에 다는 업칭(業秤) 장면을 그린 조선 불화이다. 조선 지식인들은 천주교의 천당과 지옥 관념을 불교의 극락과 지옥을 통해 이해하였다.

조선시대에 성행한 염불 신앙은 대중에게 극락으로의 왕생을 꿈꾸게 하였는데 19세기에는 아미타불 대신 천주(天主)를 염호하여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도 생겨난 것이다. 천주, 원죄, 윤회 등 인식상의 중요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가 대중에게 수용되고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은 불교에 의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불교계는 전통을 결집하여 새로운 활로를 찾거나 외래 종교에 적극 대응할 만한 역량이 없었고 보수(保守)와 개화(開化)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필자] 김용태
341)高橋亨, 앞의 책, 56∼71쪽.
342)김용조, 「백곡 처능(白谷處能)의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에 관한 연구」, 『한국불교학』 4, 한국불교학회, 1979.
343)대지(大智), 『심성론(心性論)』, 자서(自序)(1686).
344)최눌(最訥), 『묵암집(默庵集)』 권중, 「상별지(上別紙)」.
345)서거정(徐居正), 『사가집(四佳集)』, 「증수이상인서(贈守伊上人序)」.
346)高橋亨, 앞의 책, 237∼238쪽.
347)高橋亨, 앞의 책, 575∼586쪽.
348)이이(李珥),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 「풍악증소암노승병서(楓岳贈小菴老僧幷序)」.
349)이이, 『성학집요(聖學輯要)』 권2, 불자이적지일법(佛者夷狄之一法).
350)이수광(李睟光), 『지봉유설(芝峯類說)』 권18, 외도부(外道部), 선문(禪門).
351)각성(覺性),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서(序)(1636) ; 진일(眞一), 『석문가례초(釋門家禮抄)』, 발(跋)(梅谷敬一, 1659).
352)高橋亨, 앞의 책, 794쪽·790쪽.
353)유일(有一), 『임하록(林下錄)』 권4, 「상한릉주필수장서(上韓綾州必壽長書)」.
354)유일, 『임하록』 권3, 「심성론서(心性論序)」, “諸佛衆生之心, 各各圓滿未曾一箇者”와 “各各圓滿者元是一箇者.”
355)최병헌, 「다산 정약용의 한국 불교사 연구」, 『정다산 연구의 현황』, 민음사, 1985.
356)高橋亨, 앞의 책, 792∼7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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