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청일전쟁과 농민전쟁은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으로 양자간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본 주제와 관련해 볼 때 대부분의 연구는 ‘청일전쟁’ 그 자체에 한정하여 청국과 일본간의 전투과정을 서술하는 데 초점을 맞추거나, 일본자본주의 발달사 또는 국제정치학의 측면에서 열강을 중심으로 한 세력관계, 동맹관계 등에 대한 이해에 치중되어 왔다. 따라서 이 전쟁에 대한 각 단계별 농민군의 정세인식과 동향은 거의 도외시되어 있다.
그런데 전주화약 이후 제2차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농민군의 활동은 청일전쟁의 전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의 진행과정은 농민군이 전쟁수행을 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코자 일본이 도발한 청일전쟁은 제1차 농민전쟁 이후 봉건제의 타파와 중앙권세가의 축출 등 개항 이후 고양되어 오던 농민적 의지를 실천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는 데 농민군들은 더욱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177) 그것은 결국 농민전쟁이 반봉건 전쟁에서 반봉건·반침략 전쟁으로 전환하게 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반면 농민군의 활동 또한 조선출병, 경복궁점령 이후 일본의 대청전쟁 수행 및 조선지배정책을 추진하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조선지배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청·일군의 출병은 조선인 모두에게 국가적 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즈음 농민군들은 청·일의 군사적 동향과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2차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평양전투 이후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대항하여 대일 항전의 전면화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정세인식과 향후 방략 및 행보에 있어 농민군의 각 세력은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은 아니었으며,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은 농민군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하였으며, 일련의 청일전쟁 승리과정에서 대농민군 정책은 토벌에서 살륙·초토·박멸로 변화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농민군의 활동 또한 이전의 국지적 차원에서 탈피하여 전면전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었다.
177) | 청일전쟁 전과정과 관련한 농민군의 정세인식과 단계별 동향 및 집강소 시기 청일군 개입이 농민군의 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가 참고된다. 조재곤,<청일전쟁에 대한 농민군의 인식과 대응>(≪1894년 농민전쟁연구≫4, 역사비평사, 1995). 裵亢燮,<執綱所 時期 東學農民軍의 활동양상에 대한 一考察-外勢의 介入이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歷史學報≫153,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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