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직업별 노동조합의 지역연맹체와 전국적 연맹체
1925년 전위조직인 조선공산당의 창건 전후, 1927년 조선노농총동맹에서 조선노동총동맹이 분리 개편되는 과정에서, 직업별 노동조합도 지역별 노동조합 연맹체와 전국적 노동조합 연맹체로 확대 조직되기 시작했다.
동일지방의 노동조합운동을 통일하기 위한 지역별 노동연맹의 결성은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종전의 합동노동조합을 직업별로 분리하여 재조직한 다음 그를 다시 지역별로 연합하여 노동연맹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합동노동조합이었던 ‘원산노동회’가 1925년 10월 운송노조·두량노조·선박노조·해륙노조·結卜노조 등의 직업별 노동조합들로 분리 재조직되고 이들을 다시 연합하여 지역별 노동연맹인 ‘원산노동연합회’를 들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동일한 지역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기존 직업별 노동조합들을 연합하여 노동연맹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925년 1월 군산에서 철도노동회·인쇄공조합·정미인섭노조·米選노조·목공노조·배달인조합·인력차부 조합 등의 직업별 노동조합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군산노동연맹’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1925∼1928년 간에 순천·평양·경성·진주·목포·담양·동북·웅기·북청·익산·광주·영흥·해주·인천·함평·보성·구례·함흥·전주·마산·김천·부산·봉산 등에서 지역별 노동연맹체가 결성되었다.
지역별 노동연맹체들은 보다 발전된<강령>과 당면한 요구와 투쟁구호를 제기했다. 가령 원산노동연합회는 “노동계급의 통일과 무산자의 세계적 연계를 가지며 무산계급의 해방을 목적한다”고 했고, 봉산노동연맹은 “노동계급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이익의 완전한 획득을 기”하며 “노동대중의 의식적 훈련과 단결 및 조직의 완전을 기함”에 있다고 했다. 담양노동연맹은 창립총회 때 다음과 같은<강령>을 내세웠다.
<강 령>
一. 아등은 계급적 단결력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위해 투쟁함.
一. 아등은 무산계급의 연쇄적 관계를 자각하고 일치단결을 기함.
一. 아등은 상호부조를 생활기초로 하는 신질서의 실현을 위해 최후까지 노력함.
(≪동아일보≫, 1925년 11월 1일).
지역별 노동연맹의 당면한 요구조건들은 “① 단체권·파업권·단체계약권의 확립, 최저임금제의 실시, 8시간 노동제의 확립, 유년 및 부인의 야업, 갱내 위험작업금지, 무리해고 방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불, 노동자상해보상, 중간착취 철폐, 일요 또는 의외 작업에 대한 임금지불, ② 민중의 요구와 배치되는 교육제도 철폐, 미신사상 교육의 철폐, 무산아동 수업료 폐지, 교내 학생의 자치권 획득, 노농대중의 문맹퇴치, 남녀교육 평등, ③ 봉건허례 타파, 여성·청소년에 대한 차별 철폐, 민족적 학대와 혹사 근절, 인신매매 금지, 公娼금지, 미성년 남녀의 결혼 금지, ④ 전민족적 이익을 대표할 단일당 수립, 민중을 폭압하는 제정책 반대”427) 등이었다. 투쟁구호들은 “① 만국의 노동자들은 단결하자. ② 얻을 것은 자유, 잃은 것은 철쇄이다. ③ 우리는 농민운동을 철저히 원조하자. ④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⑤ 부인운동을 원조하자”428) 등이었다.
이상의 지역별 노동연맹의 강령 및 요구조건과 투쟁구호들은 노동자들의 반제·반봉건 민주주의적 지향,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각성과 단결정신 등을 나타내고 있다. 즉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과 더불어 광범한 피착취 대중의 이익 및 민족적 이익을 위한 투쟁과 결합시켰다.429) 이것은 노동자들이 1926년 6·10만세운동, 1927년 5월 신간회 창립과 이후의 활동, 파업투쟁들, 5·1절 기념일투쟁 등에서 획득한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 후반의 중요한 파업투쟁들 가운데서 1928년의 영흥총파업, 1929년의 원산총파업 등은 지역별 노동연맹체의 지도에 의해 수행된 지역적 총파업이었다.430)
지역별 노동연맹체들의 발전에 따라 즉 1개 道 및 수 개의 도단위에 걸쳐서 더 광범한 노동자들을 결집하려는 직업별 노동조합의 도연맹체 조직 시도들이 전남북과 함남북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1926년 2월 24일 광주에서 광주 정미노조·철공조합·인쇄직공조합·智島노조·나주노동연맹·담양노동연맹·영암노동회 등 도내 15개 노동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전남노동연맹발기대회를 열어 5월 8·9일 경에 창립을 예정했으나 경찰의 집회금지로 실현되지 못했다.431) 전북에서도 1926년 5월 4일 전북노동연맹이 결성되었다. 1925년 11월 무렵에 함북 경성에서도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를 분리하여 함북노동연맹이 결성되었다. 1925년 11월 무렵 원산에서는 원산노동연합회의 발의와 9개 노동단체의 참가하에 강원도 철원 이북 및 영동 일대와 함남북을 망라한 노동단체를 결집하여 동북노동연맹을 조직한다는 구상하에 1926년 1월 15일 청진노동공제회 등 10개 단체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준비위원회의를 거쳐 30일에 서면대회 형식을 빌려 창립대회를 열었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이들 도연맹 단체들은 지역 노동단체의 조직과 파업 등에 대한 원조와 노동단체의 분규에 대한 조정과 개입, 지역 내와 국내의 노동문제 등의 현안에 대한 비판과 항의활동을 전개했지만 도연맹체로서 고유한 활동내용을 확립하지는 못했다.432)
1926년 이후 직업별 노동조합의 전국적 연맹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직업별 조합의 전국적 연맹체는 직업별 조합의 최고 수준의 조직형태라 할 수 있다. 즉 어느 한 지역에서 파업이 일어날 경우 자본가들이 다른 지역의 숙련 노동자들을 데려와 파업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대항할 수 있는 조직적 수단이 되었다.
직업별 노조의 전국적 노동연맹체로는 1926년 2월 창립된 전조선신문배달조합총연맹을 위시하여 조선철공조합·전조선인쇄직공총연맹·전조선양말직공조합총연맹·전조선靴工총연맹과 그리고 1927년 1월 결성된 전조선목공조합, 1928년 2월 조직된 조선양복기총동맹 등이 있었다.
직업별 노조의 전국적 연맹체 가운데서 1926년 3월 결성된 전조선인쇄직공총동맹이 1927년 평양의 대동인쇄주식회사 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을 전국적으로 후원하여 승리를 이끌어 내었다. 이는 전국적 연맹체가 없었던 1925년의 평양에서의 인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패배로 귀결되었다는 경험과 비교해 보면 전국적으로 단결된 조직체의 의의를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다 어느 노동자들보다도 의식수준이 높은 인쇄직공들이기에 전국적인 결속이 가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업별 조합의 전국적 연맹체의 활동은 주목할 것이 없었다. 이것은 직업별 노조의 전국적 연맹체의 결속기반인 노동력 공급제한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는 상황이 반영되었다. 즉 1920년대 후반기 세계불황으로 산업예비군의 양산, 같은 직업이라도 지역에 따른 노동조건이나 임금 등의 차별성 등을 직업별 노조라는 조직형태로는 담아낼 수 없게 되어버렸다.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