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대한 민국의 발전

2. 대한 민국의 수립과 발전

학습 개요

1948년 8월, 남한에는 자유 민주 국가 체제의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대한 민국이 미처 안정을 이루기도 전에 북한은 군사력을 증강하여 6⋅25 전쟁을 일으켰다.

대한 민국은 한때 위기를 겪었으나, 국민들의 자유 수호를 위한 투쟁과 자유 우방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공산군을 물리쳤다. 그 후 이승만 정부의 부정과 부패로 인해 4⋅19 혁명이 일어나 장면 내각이 성립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고, 그 뒤를 이어 박정희 정부가 성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경제적으로는 큰 성장을 이루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어 민주주의가 이 땅에 정착되어 가고 있다.

학습 문제

1. 대한 민국 정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수립되었는가?

2. 대한 민국이 공산군의 남침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는가?

3. 4⋅19 혁명과 6월 민주 항쟁은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가?

대한 민국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미⋅영⋅중⋅소의 4개국 외상 회의에 상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합의 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유엔 총회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9개국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설치하고,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속히 통일 독립 정부를 수립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리하여 인도 등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독립 문제에 대해 우리 지도자들과 상의하는 등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북한 지역에서는 이들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민족의 독립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한편, 통일 독립 정부의 수립을 열망한 김구, 김규식 등은 단독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납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평양에서 개최된 협상에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통일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술책에 이용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5⋅10 총선거는 일부의 방해와 반대가 있었으나, 예정대로 치러졌다. 이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민주 선거였다. 그 결과 대한 민국의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5⋅10 총선거   

국회에서는 민주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에 공포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행정부를 구성하여, 8월 15일에 대한 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 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 항구적인 국제 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제헌 국회에서 제정한 헌법 전문

대한 민국은 역사상 우리 국토에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이래, 민족이 염원하던 우리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었다.

한편, 그 해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는 대한 민국이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절대 다수로 승인하였다. 이로써, 대한 민국은 국제적으로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고, 자유 우방의 지지를 받아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북한 공산 정권의 수립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각급 지방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산주의 이념과 제도를 보급하기 위하여 힘썼다. 그리고 조선 민주당 내의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민족주의 이념을 탄압하였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할 때에 뒤를 따라 들어온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점차 실권을 장악하고, 독재 체제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또, 이들은 북한의 공산화를 서둘러 추진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사실상의 공산 정권인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수립되었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후일 북한 공산 정권의 모체가 되었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토지 개혁 법령, 중요 산업 국유화 법령 등을 발표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 후, 1948년 9월에는 북한 공산 정권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남한 교란

8⋅15 광복 직후의 우리 나라 경제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38도선의 국토 분단으로 경제 생활권마저 둘로 갈라졌고, 지하 자원과 산업 시설의 대부분이 북한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풍부한 지하 자원과 수력 자원 및 공업 시설을 가진 데 비하여, 남한은 농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었고 경공업 시설밖에 없었으며, 지하 자원과 수력 자원도 부족하였다. 북한은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 불리하였던 남한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전력의 공급마저 끊어 버렸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의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각지에서 폭동, 파업 등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대규모의 유혈 사태가 일어났으며, 여수와 순천에서는 주둔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이 지역에 잠입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이 합세하여 사회 혼란을 야기시켰다.

여수⋅순천 10⋅19 사건의 진압에 나선 국군과 경찰   

대한 민국 정부를 전복하고자 했던 이들 사건은 우리 국군과 경찰에 의하여 진압되었지만, 평온과 질서를 되찾기까지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6⋅25 전쟁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통치 기반을 정비한 후, 대한 민국에 대한 무력 남침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맺어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6⋅25 전쟁 직전에 북한의 병력은 20만 명에 이르렀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투기와 전차 등의 현대식 무기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당시 남한은 각지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와 파업 등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또, 정당과 사회 단체의 난립으로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실정이었고 군사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남한의 병력은 10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무기와 장비도 뒤떨어진 상태에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남침 준비를 서두르면서도, 겉으로는 남한에 대해 평화 공세를 펴 그들의 남침 의도를 숨기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북한 공산군은 38도선의 전 지역에 걸쳐서 남침을 감행하였다.

남침하는 북한 공산군   

우리 국군은 빈약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자유 수호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국군은 공산군의 대규모 남침에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공산군의 남침을 피해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하고, 이 곳을 임시 수도로 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저지선까지 후퇴한 국군은 이 곳을 거점으로 반격 작전을 준비하였다. 나이 어린 학도병들도 자유 수호를 위해 책 대신 총을 들고 국군과 함께 용감히 싸웠으며, 많은 청년들이 군에 지원하여 조국 수호에 앞장 섰다.

공산군의 격퇴

북한 공산군의 침략이 있자,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공산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유엔 군의 한국 파병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을 비롯한 우방 16개국이 세계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 군대를 보내 와, 유엔의 깃발 아래 국군과 함께 싸웠다.

한때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전세가 매우 위급하였으나, 재정비되고 강화된 국군과 유엔 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반격을 시도하여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어서, 이 기회에 통일을 이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38도선을 넘어 공산군을 쫓으며 북한으로 진격하였다.

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까지 진격하여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은 수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인해 전술로 밀고 내려왔다. 그리하여 한때 서울을 다시 내주었으나, 전력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 군은 서울을 재탈환하고, 적을 다시 38도선 부근까지 격퇴하였다. 그 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쟁에 지친 공산군은 남침의 실패를 깨닫고 소련을 내세워 휴전을 제의해 왔다. 이후, 유엔 군과 공산군 사이에 2년여에 걸쳐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때, 우리 겨레는 완전 통일이 아닌 휴전에 반대하였으나, 결국 휴전이 이루어졌다(1953).

6⋅25 전쟁의 전황   

북한 공산군이 일으킨 6⋅25 전쟁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으로서, 동족 상잔의 범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고, 공장과 발전소, 교량과 철도 등이 파괴되었다.

4⋅19 혁명

6⋅25 전쟁을 겪은 후,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강력한 반공 정책을 추진하면서 북진 통일을 내세웠다.

이승만 대통령을 환호하는 평양 시민(6⋅25 전쟁 때)   

그러나 이승만 정부하에서의 정치는 혼란을 되풀이할 뿐, 민주주의는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집권 여당인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를 자행하면서 계속 집권하였다.

이리하여 민주 정치는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독재 정치가 강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저버림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연장시키려 하였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 선거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궐기하였다.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마산에서 시작되었다. 마산 의거에 이어 4월 19일에 서울과 주요 도시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3⋅15 부정 선거, 부정 부패, 자유당 독재 등을 규탄하는 대규모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4⋅19 혁명   
4⋅19 혁명 기념탑(서울 수유동)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학생과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자유당 정권도 무너지고 말았다.

4⋅19 혁명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학생, 시민들의 항거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며 민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이끈 자유당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지자, 과도 정부가 성립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 이 때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새로 구성된 국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 총리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 속에 장면 내각이 성립되었다(1960).

장면 내각의 기자 회견   

장면 내각은 독재 정치를 종식시켜 민주 정치를 실현하고,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4⋅19 혁명 직후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국민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하지도 못하였다.

이는 장면 내각이 4⋅19 혁명의 민주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구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권당이었던 민주당의 분열로 정치적 안정도 이루지 못하였으며, 계속되는 시위로 인하여 사회 혼란이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5⋅16 군사 정변

과도 정부의 뒤를 이어 성립된 장면 내각은,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집권 9개월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군사 정변의 중심 인물들은 헌법의 효력을 중단시키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2년 6개월 동안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경제 재건과 정치 안정 및 사회 기풍의 쇄신 등을 강조하였다.

군사 정부는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주요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이를 국민 투표에 의하여 확정시켰다. 군사 정부는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군사 정부를 이끌었던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국회가 구성되었다(1963).

박정희 정부는 조국의 근대화를 표방하고, 공업화를 우선 과제로 삼는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여러 차례 추진되어 수출이 증가되고, 소득도 향상되었다.

또, 박정희 정부는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민주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중립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노력하였다.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 있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일 협정을 조인하였다(1965). 그리고 공산 침략을 받고 있는 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을 파병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의 시련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 성장과 국력 배양에는 기여하였으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는 약하였다. 장기 집권을 위한 목적에서 3선 개헌을 강행하였으며, 정치적 반대자에 대해서는 탄압도 서슴지 않아 독재 정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국민들의 비판으로 선거를 통한 정상적인 집권이 어렵다고 생각한 박정희 대통령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1972). 이른바 유신 체제의 확립으로 통일 주체 국민 회의가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사실상 장기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로써 박정희 정부의 독재화가 가속화되었다.

10월 유신 선포   

10월 유신 선포 후 자유와 권리가 억압된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과 함께 정치적 불안이 조성되자 정부는 여러 가지 강경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는 10⋅26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어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에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하고 나아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자유 민주주의 헌정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1980).

민주화 운동과 기성 정치인을 억압하고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신들의 정권 장악에 유리하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즉,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따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1981).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의 구현과 복지 사회의 건설을 표방하였고, 경제 안정과 수출 증대에 힘썼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정과 비리로 말미암아 국민들의 비판과 저항을 받게 되었다.

민주화의 진전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였으나,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국민들은 군사 독재와 비리를 규탄하면서 개헌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는 6월 민주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마침내 6⋅29 민주화 선언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 작업이 추진되어 5년 단임의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그 결과 노태우 정부가 성립되었다(1988).

이 시기에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가 개최되어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올림픽 대회 이후 북방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동유럽 국가 및 소련,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하여 외교 관계를 확대하였다.

6월 민주 항쟁 이후 국민의 민주 역량은 날로 성숙되어 갔으며, 민주화도 점진적으로 추진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제14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였다(1993).

14대 대통령 취임식   

김영삼 정부는 부정과 부패, 비민주주의적인 관행 등 우리 사회의 누적된 모순을 제거하면서 민주화와 세계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학습 정리

1. 유엔의 결의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고 민주 헌법이 제정되어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2. 6⋅25 전쟁 때 우리 국민은 투철한 반공 정신과 자유 수호의 굳은 결의로 유엔 군의 도움을 받아 북한 공산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3. 4⋅19 혁명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혁명이었고, 6월 민주 항쟁은 자유 민주주의의 정착에 이바지한 민주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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