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제5장 신라의 통일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善德王)의 시대에는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말갈(靺鞨)이 뒤섞여 침공하여 와서 백성들의 생활을 곤궁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다. 이에 장군(將軍) 김유신(金庾信)이 분연히 일어나 세상을 평정할 뜻을 지니고 중악(中嶽)【경주(慶州) 단석산(斷石山)】의 석굴(石窟)에 홀로 들어가 장검(長劍) 다루는 기술을 닦으면서 하늘에 기도를 하였다. 후에 김유신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을 침공하여 왔을 때에는 선덕왕이 김유신에게 명하여 적군을 막게 하자 김유신은 부인과 자식을 만나보지도 않고 곧장 진격하여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김유신이 막 돌아왔는데 백제가 또다시 침공을 하자 왕이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이 공의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공에게 다시 전장으로 나가기를 부탁하노라.”라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이 또다시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전장으로 나아가니,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며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우리들임에야.”라고 하고는 앞을 다투어 뛰어 나가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진덕왕(眞德王)의 시대에는 김유신이 또한 백제를 공격하여 12개의 성을 빼앗고 9개의 성을 쳐부수었으며, 2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김춘추(金春秋)는 당(唐)나라의 병력을 빌려서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하여 당나라 태종(太宗)과 화호를 맺었는데,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무열왕(武烈王)이 되자 백제를 병탄하려는 뜻이 더욱 급졌다. 이에 당나라에 병력을 요청하니,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내주(萊州)【현재의 산둥성[山東省]에 있었다.】로부터 덕물도(德物島)【현재의 인천(仁川) 서쪽에 있었다.】에 이르자 왕이 태자(太子) 법민(法敏)과 대장 김유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맞서 싸우려고 하였는데, 이때 계백이 말하기를 “한 나라가 소수의 군사들로 두 나라의 대군을 당 내고자 하니, 죽을지 살지는 알 수가 없다. 만약 진다면 또한 처자식에게도 폐를 끼치게 될 것이니, 사는 것이 치욕스러울 것이다.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라고 하고는 가족을 모두 죽이고 나서 황산(黃山)으로 나아가 힘을 다 싸우다가 죽었다. 신라와 당나라의 병사들이 백제의 도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할 때에 소정방이 김유신 휘하의 병사를 붙잡아서 군사상의 일정을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참수하려고 하자 김유신이 크게 노여워하면서 말하기를, “장군은 황산에서 아군이 백제군을 먼저 격파하여 그 날카로운 기세에 백제군이 좌절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기한을 어겼다는 이유로 나의 장수와 병사들을 모욕하니, 내가 어찌 이유 없이 욕을 당하겠는가? 지금 먼저 당나라 병사들과 결전을 벌인 후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철로 된 큰 도끼를 짚고 군영의 문 앞에 섰는데, 노여움으로 곧게 선 머리카락은 위로 뻗어 있고 가슴에는 보검이 저절로 움직여 칼집 밖으로 튀어나오니 김유신의 위풍과 칼날의 번뜩임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소정방이 크게 놀라서 온갖 방법으로 사죄를 한 후에야 병사들을 합쳐서 백제의 도성으로 진격하여 함락하자 백제의 왕이 나와서 항복하니,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 이하 80여 명을 잡아서 자신의 나라로 보냈다. 이로써 백제가 멸망하였으니, 전체 5부 37군 200개 성에 76만 호(戶)였으며, 이어져 내려온 세대가 30대이며 거친 햇수가 678년이었다. 이때가 단기 2993년(660)이었다.

백제가 위덕왕(威德王) 이후로는 모두 덕으로 정치를 돌보아서 인심을 유지하였는데, 무왕(武王) 때에 이르러서는 교만져서 신라를 공격하느라 전투가 없는 날이 없었고, 의자왕(義慈王)은 교만하고 또 사치스러워서 국사를 돌보지 않고 신라를 침공하였으며, 신하 성충(成忠)의 간언을 듣지 않고 흥수(興首)가 내놓은 계책을 따르지 않다가 700년 동안 이어져 온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망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후에 왕실의 후손[宗室]인 복신(福信) 등이 승려[浮屠] 도침(道琛)1) 등과 함께 도모하여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고 주류성(周留城)【지금의 연기(燕岐)】을 근거지로 삼자 서북부 지역이 모두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였고, 또 일본(日本)의 병사들을 불러 오니 그 군대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부여풍이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를 웅진성(熊津城)【지금의 공주(公州)】에서 포위하였는데, 이때에 그가 복신을 싫어하여 참수하자 인심이 그를 떠나 버렸다. 이때에 신라의 김흠순(金欽純)이 쳐서 격파하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가고 무리도 모두 흩어져 버렸다. 김유신이 이미 백제를 멸망시키고 또 고구려를 병탄하고자 하여 문무왕(文武王) 때에 당나라 장수 임아상(任雅相)과 소정방 등과 거란[契丹]과 더불어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다가 눈보라가 몰아치고 군량(軍糧)이 부족져서 퇴각하였다. 후에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죽자 그 아들 남생(男生)과 남건(男建)이 권력 다툼을 하다가 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국내성(國內城)을 바쳤다. 이에 당나라가 남생을 향도관(鄕導官)으로 임명하고, 이적(李勣)을 대총관(大摠管)으로 삼은 후 여러 장수를 감독⋅인솔하여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과 한성군(漢城郡)을 쳐서 빼앗았다. 이후 당나라가 신라에 연맹을 맺기를 요청하자 신라의 왕이 자신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고구려로 진격하게 하였다. 김인문 등이 김유신에게 전략을 물어 본 후 곧장 시행하여 이적과 함께 평양을 포위한 지 한 달 남짓한 기간 만에 마침내 고구려의 왕이 힘이 다하여 항복하니, 이적이 고구려의 왕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및 대신(大臣) 남건 등을 모두 잡아 갔다. 또 고구려의 역사서와 각종 문적(文蹟)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로써 고구려가 망하였으니, 5부 176성에 69만 호(戶)였으며, 이어져 내려온 왕대(王代)가 28대에 햇수로는 705년이었다. 이때는 단기 3001년(668)이었다.

고구려는 강성한 국력과 용감한 민족성을 지녔으며, 더욱이 세상에 보기 드문 영웅이 연달아 나와 임금과 재상이 됨으로써 그 형세가 동아시아의 판세를 크게 뒤흔들었는데, 아아, 저 남건⋅남생의 무리가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권력과 왕위만을 탐하여서 외부의 적이 문빗장을 풀게 하였고, 뼈와 살이 나라 안에서 서로 다투니 강한 이웃 나라가 병탄할 뜻을 품었으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미워하여 패망을 스스로 재촉하였구나.

그 후에 고구려 사람 검모잠(劍牟岑)이 옛 나라를 부흥하고자 하여 당나라의 관리를 살하고, 죽은 보장왕(寶藏王)의 외손인 안승(安勝)을 한성(漢城)에서 옹립하였다가 실패하였다. 또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2)에 근거하여 고구려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백제의 영토를 분할서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각각의 주현(州縣)을 관할하게 한 후 유인원(劉仁願)에게 이를 전담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또 고구려의 영토에는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통괄하게 하였다. 그러자 신라 왕은 장군 죽지(竹旨)로 하여금 당나라 병사를 석성(石城)에서 공격하게 하여 5천 3백 명의 머리를 베고 백제의 옛 강역을 모두 빼앗았으며, 또 고구려 유민의 귀부를 받아들였다. 이에 당나라 왕[唐主]이 노여워하면서 거란과 말갈의 군사들을 연합하여 여러 차례 침공 왔으나 신라 왕이 이를 모두 격파하였다. 또 사찬(沙飡)【관직 이름】 시득(施得)으로 하여금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20여 번의 전투에서 모두 크게 승리하여 4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영역을 점점 넓혀 가서 고구려의 남쪽 옛 강역을 모두 차지함으로써 마침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당나라와는 비록 힘을 합쳐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하게 했으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당나라 사람들의 발자취가 반도 강산에서 영원히 끊기게 하였으니, 문무왕과 김유신의 웅대한 전략과 예리한 외교 수단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1)원문에는 도림(道琳)으로 되어 있으나, 도침(道琛)으로 바로잡는다.
2)전라북도 익산(益山)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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