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Ⅱ. 신석기문화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1) 신석기유적의 분포(2) 주요 신석기유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1. 구석기시대
          • 1)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
            • (1) 구석기시대의 개념
            • (2)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
          • 2)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
            • (1) 제4기의 지질과 자연환경
            • (2) 식물상과 동물상
          • 3) 화석인골과 편년
            • (1) 편년별 화석인골
            • (2) 화석인골의 몇 가지 특징
        • 2.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구석기유적의 분포
            • (1) 남한의 구석기유적
            • (2) 북한의 구석기유적
            • (3) 집자리 복원
          • 2) 구석기시대의 유물
            • (1) 유물의 분류
            • (2) 전기 구석기
            • (3) 중기 구석기
            • (4) 후기 구석기
        • 3. 구석기시대의 생활
          • 1) 생업과 의식주생활
            • (1) 생계경제
            • (2) 구석기시대의 주거지
            • (3) 구석기의 도구제작
            • (4) 구석기시대의 사회생활
          • 2) 의식과 예술
            • (1) 예술작품
            • (2) 의식
        • 4. 주변지역 구석기문화와의 비교
          • 1) 중국
            • (1) 시기별 구석기문화
            • (2) 비교와 문제점
          • 2) 일본
            • (1) 한반도와 일본의 자연환경
            • (2) 전기 구석기시대
            • (3) 중기 구석기시대
            • (4) 후기 구석기시대
            • (5) 한국과의 비교
          • 3) 시베리아
            • (1) 구석기유적의 발견
            • (2) 전기 구석기시대
            • (3) 중기 구석기시대
            • (4) 후기 구석기시대
            • (5) 한국과의 비교
      • Ⅱ. 신석기문화
        • 1. 신석기시대
          • 1)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시대설정
            • (2) 연구사 개관
            • (3) 시기구분
          • 2) 신석기시대의 자연환경
            • (1) 후빙기의 자연환경
            • (2) 식물상과 동물상
          • 3) 인골의 출토
            • (1) 인골의 인류학적 연구
            • (2) 인골의 해부학상 형태 비교
        • 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신석기유적의 분포
            • (1) 유적분포의 특성
            • (2) 주요 신석기유적
          • 2) 신석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조개더미
            • (3) 무덤
          • 3) 신석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 (2) 석기와 뼈연모
            • (3) 예술품
        • 3. 신석기시대의 생업과 사회
          • 1) 생업
            • (1) 수렵·어로·채취
            • (2) 농경과 목축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교역
            • (3) 의식·신앙 및 예술
            • (4) 의식주
        • 4. 주변지역 신석기문화와의 비교
          • 1)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영역구분과 지역성
          • 2) 동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이동
            • (1) 신석기문화의 이동
            • (2) 남해안계와 규슈지역의 신석기문화
          • 3) 서북한·동북한지역과 요동반도의 신석기문화
            • (1) 미송리 하층과 후와 하층
            • (2) 서포항 Ⅰ∼Ⅲ기층 당산유적과 소주산 중·하층, 오가촌기
            • (3) 쌍학리유적, 서포항 Ⅳ기층과 소주산 상층기
            • (4) 신암리 Ⅰ기층, 농포·호곡동 Ⅰ기층과 우가촌 하층기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각 지방의 유적과 유물

가) 자강도와 평안북도지방

(가) 중강 장성리유적

 이 유적은 자강도 중강군 소재지에서 압록강을 따라 24㎞ 내려가는 곳에 위치하는 포함층유적이다.425)

 유적의 층위는 표토층에서부터 복잡하게 이어지나 신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들이 뒤섞여 출토되고 있어 홍수로 인해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것이 다시 퇴적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물은 토기편들이 중심인데 빗살무늬계 토기와 민무늬계 토기가 혼합되어 있고 활촉류·반달칼편·도끼·찔개살 등의 석기류와 토·석제가락바퀴도 채집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대개 침선문계인데 무늬는 어골문·수직선문·긴사선문·3각집선문 등이 있고, 그 외에 번개문·융기문·덧무늬 등도 약간씩 보인다.

 이 곳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대체로 토성리유적의 것과 유사하나 바라진 구연부, 번개무늬, 덧무늬 등 보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보고자는 이 유적의 토기유형이 토성리유형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B.C.3000년대 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은 토기의 기형과 무늬로 볼 때 토성리보다는 연대 폭이 넓은 것 같고, 그 연대도 B.C.2000년대 후반에서 B.C.1000년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 중강 토성리유적

 土城里는 중강읍으로부터 만포에 이르는 큰 길가에 있는 산간마을인데, 유적은 가장 높은 곳인 토성리 중심부에서 학교 운동장에 이르는 구간에 있으며 그 면적은 수만㎡에 달한다.426)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여러 시기의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2·5·6·7·8호 주거지가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2호 주거지는 평면 장방형이고, 규모는 6.8m×5.0m, 깊이 25㎝ 전후이며 바닥 중앙에 6개의 강돌을 돌린 화덕(60×50㎝)자리가 있었다.

 5호 움은 평면 원형이고 규모는 직경 8∼9m, 깊이 20∼75㎝ 전후이며 바닥의 북쪽으로 치우쳐 원형 화덕자리가 있다.

 6호 움은 파괴가 심하여 평면형태는 불명이나 잔존길이는 6.5m×4.0m, 깊이 20∼25㎝이다.

 7호 주거지는 평면 방형이고 규모는 5.3m×5.0m, 깊이 30∼50㎝이며 중앙에 돌을 원형으로 돌린 화덕자리가 있다.

 8호 주거지는 평면 장방형이고 규모는 6m×4m, 깊이 40㎝ 정도이며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돌을 돌린 화덕자리가 있고 그 부근에서 강돌로 만든 그물추 33개가 출토되었다.

 이들 주거지와 주변의 문화층에서는 토기·석기·토제품 등의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바탕흙에 활석이 섞여 있는 납작바닥의 깊은 바리형토기에 어골무늬가 아가리부터 바닥 위 5㎝까지 시문되어 있는 빗살무늬토기와 바탕흙에 진흙이 섞여 있는 납작바닥의 깊은 바리형토기에 몸통 상부에만 집선무늬가 시문되어 있는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침선문계통의 무늬 외에 끝이 두 가닥으로 된 뾰족한 시문구의 끝으로 찍은 점렬문으로 집선문을 만든 것도 있다.

 이외에도 사발토기에 어골무늬가 시문되어 있는 것, 손톱무늬가 세로로 여러 줄 찍혀 있는 것, 짧은 사선문에 덧띠가 결합된 것 외에 번개무늬토기 조각도 보인다. 석기로는 도끼·활촉·그물추·괭이·흑요석기 조각들이, 토제품으로는 산모양의 가락바퀴가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이 유적의 연대를 서포항유형의 유물과의 비교에서 B.C.3000년대 말로 편년하고 있으나 토기의 무늬에 어골무늬가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연대를 B.C.2000년대 후반기로 추정할 수 있겠다.

(다) 의주 미송리유적

 의주읍 美松里에 있는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동굴 주거지유적이다. 그다지 크지 않는 석회석 천연동굴인데, 지표하 105∼130㎝ 깊이에 두께 약 50㎝의 문화층이 있고 그 밑에는 유물이 없는 20∼40㎝ 두께의 간층이 있으며 그 아래에 다시 15∼20㎝ 두께의 문화층이 있었는데, 아래의 것은 신석기시대 문화층이고, 위의 것은 청동기시대 문화층이다.427)

 신석기시대의 아랫문화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과 그물추 2점, 석촉반제품, 곡옥파편처럼 생긴 장신구와 그 밖에 골제첨두기들도 3점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집선삼각문과 연속之字文도 있다. 바탕흙은 진흙에 모래를 섞은 것이 대부분이고 운모·장석·석면·활석 등을 섞은 것도 있으며 모두 갈색이다. 완전히 복원될 수 있는 것은 없으나 그 문양의 형태가 청진 농포리·웅기 서포항 등의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하므로 기형은 납작바닥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 시기도 신석기시대 후기일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라) 용천 신암리유적

 용천군 군소재지에서 동북으로 4㎞ 정도 떨어져 있는 신암리마을의 서·남·북쪽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구릉에 위치하는 신석기시대부터 고구려시대까지의 집터와 유물 포함층유적이다. 서쪽은 청등말래·축사앞유적, 남쪽은 공동묘지, 북쪽은 모래산유적으로 각각 명명되어 있다.428)

 청등말래유적의 층위는 표토층(30㎝) 밑에 문화층인 검은모래층(30∼50㎝)과 생토층인 황색모래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검은모래층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파괴된 움집터 1기가 조사되었다. 그 외에 신석기시대유구로서 모래산유적에서 직경 4.0∼4.3m의 원형구덩이 1기, 축사앞유적에서 구덩이 1기가 조사되었다.

 이 유적의 토기는 바닥이 납작하고 둥근 몸통에 목이 달려 있는 항아리가 기본형이고 그 외에 굽잔과 바리형토기가 있다. 토기의 겉면에는 덧무늬와 새김무늬가 배합되어 시문된 것이 많은데, 무늬로는 어골무늬·단추무늬·세모꼴무늬·번개무늬·덧무늬·그물무늬 등이 보인다. 토기의 바탕흙은 운모와 흑연을 섞은 것이 대부분인데 청등말래형토기에는 활석을 섞은 것도 몇 점 있다. 이 밖에 축사앞유적에서는 청등말래에서 출토되는 굽토기보다 좀더 다양한 형태의 굽토기와 함께 요동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바탕흙이나 무늬의 시문수법이 같은 채색토기의 조각도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도끼·달도끼·반달칼·대팻날·낫·가락바퀴·그물추·숫돌·자귀, 토제품으로는 가락바퀴와 그물추가 보인다.

 신암리 1기의 문화는 중국 요동반도의 청동기시대 문화와 한반도 서북지방의 신석기 말기문화가 공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신석기 말기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유적의 연대는 B.C.10세기 전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마) 용천 용연리유적

 용연리와 용송리 사이의 중간지점에 있는 표고 약 50m 정도의 용연산 남쪽을 중심하여 그 주변 일대에 있는 주거지유적으로 움집터 3기가 조사되었다.429) 주거지는 평면 장방형인데 규모는 4.3×5.3m(잔존길이), 4.9×3.9m(잔존길이) 정도이고 깊이는 15∼20㎝ 정도이다. 움집바닥은 흙을 다지고 불을 지펴 단단하게 하였고 기둥구멍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화덕은 별다른 시설 없이 약간 오목하게 판 후 불을 지폈다. 움의 깊이가 얕으며 집자리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편이다.

 이 움집에서 출토된 토기는 번개무늬와 덧무늬가 들어 있는 청등말래형 항아리가 주를 이루나 반수 이상이 민무늬토기인 점이 특징적이다. 바탕흙에는 운모와 가는 모래가 섞여 있으며 간혹 흑연과 활석도 보인다. 석기로는 반달칼·숫돌·도끼·살촉·자귀·마치, 토제품으로는 원반형의 가락바퀴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신암리유적과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의 말기로 편년하여 그 연대를 B.C.3000년대 후반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 유적 역시 B.C.1000년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바) 정주 당산패총

 당산부락 서쪽에 있는 제직산이 서북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이루어진「당모루」라는 자그마한 구릉 서쪽 밑의 밭 가운데에 있는 패총이다. 이 패총의 규모는 남북 길이 40m, 동서 너비 20m로 약 800㎡이다.430)

 층위는 위에서부터 ①재와 조개껍질이 섞인 흙층 ②모래층(간층) ③조개층 ④붉은 진흙층 ⑤모래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유물은 ①·③·④층에서만 출토되었고, 또 간층인 ②모래층을 사이에 두고 그 위층인 ①층과 아래층인 ③·④층 사이에는 유물 갖춤새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는 시간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랫문화층은 신석기시대의 늦은 시기, 윗문화층은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래층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토기편이다. 토기의 무늬는 아가리 주변에만 시문된 것이 많고, 태도는 점토에 모래를 주로 섞었고, 그 외에 활석·석면을 섞은 것도 있다. 토기모양은 밑이 둥글거나 뾰족한 것들이 많고 간혹 납작한 것도 보이며, 몸통은 밋밋한 것이 대부분이나 배가 좀 나온 것도 있고, 아가리는 끝이 외반한 것이 가장 많다. 세로로 붙인 손잡이가 달린 토기도 6점이나 있다.

 무늬는 시문수법에 따라 침선무늬와 침선무늬+덧무늬로 구분할 수 있는데, 침선무늬에는 격자문·단사선문·어골문+단사선문 결합문·어골문 등이 있고, 침선무늬+덧무늬 결합무늬에는 가로 돌린 덧띠무늬와 침선무늬가 결합한 것, 단추모양의 덧무늬와 새김무늬가 결합된 것, 덧띠무늬+침선무늬가 결합된 것 등이 있다.

 석기는 갈돌대·낫·끌·그물추·마치·닦음돌·숫돌 등이 있고, 골각기는 뼈예새와 뼈바늘 각 6점 및 7점과 사슴뿔제 뒤지개가 있다. 당산유적 아랫문화층의 토기들 가운데 단추모양의 덧무늬·덧띠무늬·번개무늬와 침선무늬가 결합된 토기들은 용천군 신암리유적 1기층, 용연리유적출토 토기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으며, 이 유적의 전반적인 질그릇 갖춤새는 궁산문화 4기의 그것과 더 밀접한 것 같다.

(사) 영변 세죽리유적

 영변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10㎞ 떨어진 청천강 중류의 하안충적층 위에 남아 있는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걸친 주거지유적이다.431)

 유적의 층위는 위로부터 표토층(사질층, 30㎝)·흑색부식토층(초기 철기시대문화층, 30㎝)·사질양토층(청동기시대문화층, 40㎝)·흑색사질토층(간층, 30㎝)·황색사질토층(간층, 30㎝)·백색사질토층(간층, 10㎝)·사질양토층(신석기시대문화층, 30㎝)·백색사질생토층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세 시기의 문화층에서 모두 27기의 움집터가 조사되었다.

 이 중 신석기시대층에서는 움집터 1기와 포함층이 조사되었다. 움집터는 홍수에 일부 깎여 나간 것으로 조사할 당시 동서 450㎝, 남북 350㎝, 깊이 70㎝ 규모로 남아 있는 장방형의 집자리이다. 움집의 바닥은 진흙으로 다졌으며, 그 중앙부에는 돌로 테를 돌린 화덕이 놓여 있었다. 집터 안에서는 바탕흙에 활석이 섞여 있고 띠무늬·세모꼴무늬·무지개무늬가 조합되어 시문되어져 있는 금탄리 1기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한편 포함층에서는 몸통에 각이 져 있는 납작바닥의 바리형토기에 어골무늬가 지그재그로 시문되어져 있는 것이 출토되었는데 이 토기의 바탕흙에는 모래와 운모가 섞여 있어 집터 안에서 나온 것과는 차이가 났다. 석기로는 움집의 바닥에서 갈돌대와 발화석 및 목걸이 장신구가 1점씩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이 유적의 집터 안에서는 금탄리 1기의 유물이 주로 출토되나 밖의 포함층에서는 금탄리 2기와 압록강유역의 빗살무늬토기가 보이는 것을 시기차로 보아 움집 안은 B.C.3000년대 전반기로, 밖은 B.C.3000년대 후반기로 편년하였다. 이 유적은 궁산유형의 문화와 토성리유형의 문화가 만났던 지역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 유적의 포함층문화가 이미 신석기시대 말기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그 연대는 B.C.1500년경으로, 움집 안은 이보다 좀 이른 B.C.2000년경으로 편년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나) 평안남도·평양·황해도지방

(가) 온천 궁산리패총

 궁산마을의 남쪽에 자리잡은 小弓山의 동남쪽 경사면에 형성되어 있는 패총유적으로, 유물층의 면적은 약 5000㎡ 정도이다. 유적의 층위는 유적 전면에 걸쳐 약 20㎝의 부식토층 밑에 30㎝ 미만의 패층으로 구성되었고, 그 사이에 깊이 60∼70㎝에서 120㎝ 이상인 움집 5기와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432)

 제1호 집자리는 직경 560∼580㎝의 불규칙한 원형이고 깊이는 120∼130㎝ 정도이다. 바닥에는 진흙을 다졌고, 화덕은 둘레에 돌을 돌린 90×78㎝의 타원형이며 그 옆에 큰 토기를 뒤집어 박은 저장공이 있었다.

 제2호 집자리는 파괴가 심하여 크기와 평면형태는 알 수 없으나 깊이는 70㎝ 정도이고 바닥에는 진흙을 깔았다. 화덕은 진흙 테두리를 한 사다리꼴모양이다.

 제3호 집자리 역시 파괴가 심하여 크기와 평면형태는 알 수 없다. 깊이는 120∼130㎝이고 화덕은 중앙에 있다.

 제4호 집자리는 직경 520∼550㎝의 원형이고 깊이는 90㎝이다. 바닥은 5㎝ 두께로 진흙을 다졌고 직경 85㎝의 화덕은 돌을 돌려 놓았으며 저장공은 밑창 떼어낸 독을 묻었다.

 제5호 집자리는 290∼400㎝×500㎝의 원형이고 깊이는 70㎝이며 바닥은 진흙을 깔았다. 화덕은 100∼70㎝의 타원형으로 주위에 진흙 테두리를 하였다.

 빗살무늬토기는 점토질 바탕흙에 활석과 석면을 섞은 것과 모래와 운모를 섞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릇의 모양은 독·항아리·단지·사발 등 여러 가지 가 있는데, 단지·사발 등 일부 토기는 납작밑이지만 독·항아리 같은 큰 그릇들은 모두 둥근밑과 뾰족밑의 그릇이다.

 무늬는 뾰족한 시문구의 끝으로 눌러 찍은 자돌문계와 침선문계의 수법으로 시문하였는데, 아가리무늬로는 점렬문·손톱문·어골문·중호문이 있고, 몸통무늬로는 종주어골문·‘W’대문·찰과문 등이 보인다. 석기는 활촉·창끝·찔개살·어망추·갈돌·괭이·도끼·대팻날·끌·숫돌·찰절구·활석편 및 가공한 석기조각 등이 있고, 골기는 송곳·예새·괭이·뒤지개·낫·칼날·바늘·삿바늘·토기시문구·활촉·뼈구슬 등이 있다. 그 외에 가락바퀴·토주·관옥·옥도끼와 가공한 조개껍질 등이 있고, 사슴·영양·멧돼지 등의 동물뼈를 비롯한 자연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궁산에서는 괭이·굴봉·뒤지개·낫 등 농경에 관계되는 유물이 다른 신석기유적에 비해 다량으로 출토되어 원시농경이 본 궤도에 오른 것으로 생각되며, 물소뼈가 출토된 점은 농경에 적당한 기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적이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는 점과 그물추가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주된 생업경제는 어로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가락바퀴가 상당수 출토되고, 바늘에 실이 꿰어져 있는 채로 출토된 점은 직조기술도 본격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토기의 무늬 및 유물상으로 보아 1·3·4호 주거지를 1기로, 2·5호 주거지를 2기로 비정하고, 1기는 B.C.4000년대로, 2기는 B.C.3000년대 중반기로 편년하고 있다.

(나) 온천 연도리패총

 토성면 燕島里에 위치한 신석기시대의 패총유적이다. 연도리는 대동강의 하구에 위치하는 광량만의 해안에 접하고 있으며, 북쪽 가까이에는 용반리패총이 있다.

 유적은 높이 20m 내외의 구릉 위에 위치하여 조사 당시에는 남쪽의 단애부에 패총이 노출되어 있었다. 채집된 토기는 복원된 1점이 일본 경도대학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서울 암사동의 출토품과 비숫하다. 바닥이 비교적 뾰족하고 높이가 더 높다. 무늬의 구성방법은 금탄리식과 같으나 해주 용당포의 출토품에서 보이는 토기와 같은 횡주어골문이 전면에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433)

 이 유적은 서한첨저토기군의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연대는 신석기시대 전기 중엽의 어느 한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 어은 장촌유적

 御恩洞 장촌마을 뒷산의 능선 중턱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집자리유적이다.434) 집자리 2기가 발굴되었는데, 1호는 7.0×5.5m의 긴 타원형의 움집이고 중앙에 화덕자리가 있으며, 2호는 방형의 반움집이며 크기는 4.3×4.3m이다.

 1호 집자리에서는 돌도끼 1점, 자귀 1점, 갈돌 3쌍 등의 석기류와 8점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무늬는 어골문·점선대문·단사선문 등이다.

 2호 집자리에서는 자귀 1점과 어골문·점선문이 시문된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긴 타원형의 집자리는 궁산문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수한 형태의 주거지로서 유물의 출토상태나 집자리구조에서 보아 남경유적 31호 집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라) 평양 청호리유적

 평양시 대성구역 淸湖洞(옛 대동군 임원면 청호리) 대동강 강안의 충적평야에 있는 포함층유적이다.

 유물산포지역은 동서 270m, 남북 90m 이르고 있으며, 포함층은 산포지역의 중앙부 동서 90m, 남북 27m 범위에서 확인되었다. 층위는 180m 정도의 표토층 밑에 72㎝ 정도의 모래층이 있으며, 이 모래층은 3㎝ 정도의 흑갈색부식토에 의해 4개의 층위로 구분되며, 이 4개의 층에서는 다수의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손잡이·타제석부·어망추·사슴이빨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각 층에서는 같은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어 단일시기의 유적으로 밝혀졌다.435)

 맨 아래층에서는 사방 1.8m 규모의 방형집터 1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집터의 바닥에는 편평한 돌을 깔았으며, 그 중앙부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자리가 1개 있었고, 그 옆에서 빗살무늬토기 1개체분이 부서진 채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집터는 이른바 돌깐집터로 이 유적 외에 강화도 삼거리, 강원도 춘성군 내평리에서 각각 1기씩 조사된 바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희귀한 예이다.

 빗살무늬토기는 모두 바닥이 둥근 심발형인데, 기벽이 1.5㎝를 넘는 두꺼운 것에서부터 3㎜의 얇은 것까지 다양하다. 두꺼운 것은 바탕흙에 모래와 운모가 섞여 있으나 얇은 것은 모래가 전혀 없는 점토로 되어 있다. 아가리는 약간 외반한 것과 내만한 것도 있다. 토기 외면에는 손톱무늬가 한 줄 내지 두 줄씩 간단히 시문된 것, 어골문이 아가리에서 바닥까지 전면에 시문된 것, 융기대문이 일렬로 시문된 것 등이 있다. 그 중에도 어골문이 전면에 시문된 것이 전체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이 유적의 주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융기대문을 시문한 토기는 바탕흙이 곱고 기벽이 얇으며, 토기 외면을 마연한 외에 내벽을 빗으로 긁어 정면한 것도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석기의 특징은 이 곳과 가까운 금탄리 2문화층 출토유물과 유사하다.

(마) 평양 금탄리유적

 평양시 사동구역 金灘里에 있는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유적이다. 이 유적은 대동강 중류의 한 지류인 남강이 대동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남강 좌안을 따라 약 1.6㎞ 올라간 하안단구층에 위치한다. 이 유적에서는 시기가 다른 3개의 문화층이 조사되었는데, Ⅰ·Ⅱ문화층은 신석기시대, Ⅲ문화층은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436)

 Ⅰ문화층에서는 장축이 남북으로 놓인 움집터 1기(7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움집의 바닥은 진흙을 깔아 다졌고 그 중앙부에는 점토띠로 테를 돌린 화덕이 설치되어 있었다. 움의 깊이는 30∼50㎝로, 이 안에서 전형적인 뾰족밑그릇 전면에 줄무늬·톱니무늬·어골무늬를 교대로 배합한 활석질의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도끼·활촉·보습·그물추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Ⅱ문화층에서는 방형·장방형 움집터 4기(5, 9, 10, 11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이 집터 안에서는 둥근 바닥의 토기 전면에 어골무늬가 들어 있는 것, 무늬가 전혀 없는 것, 한 줄의 무늬가 간단하게 들어 있는 것, 반들반들하게 마연된 몸통의 중간쯤에 덧띠가 한 줄 붙어 있는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버드나뭇잎형과 보트형의 살촉·도끼·괭이·그물추·숫돌·갈판·마치·자귀·곱돌로 만든 팔찌·판암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9호 집터의 동벽 밖 1m 지점에서는 그물추 600여 개가 몰려 있는 채로 수습되었다.

 이 유적의 Ⅰ·Ⅱ문화층은 궁산과 지리의 문화요소 위에 새로운 무늬를 베푸는 토기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Ⅰ문화층의 토기는 황해도 온천군 학월리와 평북 영변군 세죽리에서, Ⅱ문화층의 토기는 평양 남경과 황해도 해주시 용당포유적에서 보인다. 보고자는 이 유적의 문화에 궁산문화 유형의 잔존 요소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화를 궁산유형에 포함시켜 Ⅰ문화층은 B.C.3000년대 전반기로, Ⅱ문화층은 B.C.2000년대 초로 편년하였다. 그러나 무늬로 볼 때 금탄리 Ⅰ문화층은 지리 2지구문화가 다른 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 상한은 B.C.3000년대 말∼B.C.2000년대 초에 해당될 것으로 보여지며, Ⅱ문화층은 하한이 신석기시대 말기인 B.C.2000년대 전반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 평양 남경유적

 이 유적은 평양시 삼성구역 남경마을의 앞벌인 대동강의 오른쪽 기슭에 위치하는 주거지유적이다. 1979년∼1981년의 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의 유구가 조사되었다.437)

 신석기시대층에서는 움집터 5기(12·17·31·32·37호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움집 안에서는 금탄리 Ⅱ문화층의 토기와 유사한 어골문이 전면에 시문되어 있는 빗살무늬토기들과 함께 덧무늬와 번개무늬가 들어 있는 납작바닥의 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이 목항아리는 궁산유형의 다른 유적에서는 보이지 않는 토기로 서포항유형의 토기와 유사성을 보인다. 석기로는 도끼·자귀·갈판·갈돌대·살촉·그물촉·칼·시문구 등이 보인다.

 31호 움집터는 움 안이 아래·위로 단이 져 있는데, 윗단에서는 2,600여 개의 그물추와 함께 점토에 굵은 모래를 섞은 흙덩어리가, 아랫단에서는 북벽에 병풍처럼 붙어 있는 갈판 5개가, 그 외에 좁쌀 1되가 각각 출토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주거지는 공공시설의 집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경의 주거지는 토기와 집자리의 구조 비교에서 12·17·37호 집자리(남경 1기)와 31·32호 집자리(남경 2기)가 선후관계를 갖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남경 1기는 금탄리 Ⅱ문화층보다 약간 앞서는 것으로, 남경 2기는 금탄리 Ⅱ문화층에서 뒤서는 것으로 편년하여 그 연대를 각각 B.C.3000년대 후반기와 B.C.2000년대 초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남경 1기는 B.C.2000년대 중반으로, 남경 2기는 B.C.1000년쯤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 평양 용곡리 2호 동굴유적

 상원읍 龍谷里의 핵골이라는 골짜기에 있는데, 자그마한 석회암봉우리의 벼랑 밑에 남향으로 놓여 있는 쌍굴로 된 자연동굴이다.438) 이 유적 역시 구석기시대 문화층(제1문화층)과 신석기시대 문화층(제2문화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신석기시대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2개의 인골화석과, 석기 25점, 가락바퀴 1점, 치레걸이 1점, 토기편 100여 점, 짐승뼈 897점 외에 불자리 흔적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석기류로는 돌괭이 3점, 돌호미 3점, 돌도끼 6점, 돌낫 1점, 돌보습 1점, 돌자귀 2점, 갈돌판 및 갈돌대의 조각이 각 1점, 발화석 5점 등이 출토되었고, 골기로는 송곳 1점과 찔개살 3점이 출토되었다.

 토기의 태토는 큰 그릇의 경우는 굵은 모래알과 굵은 활석가루를 섞었고, 작은 그릇의 경우는 활석가루를 섞었으며, 소성온도는 섭씨 700∼800℃ 정도이다. 토기의 형태는 밑이 뾰족한 것과 둥근 것, 납작하게 둥근 것 등이 있고, 아가리는 직립한 것과 외반한 것이 있는데, 대체로 심발형이 주류이나 얕은 사발모양과 고리가 부착된 토기도 출토되었다.

 무늬는 그릇 전면에 걸쳐 시문된 것이 많은데, 시문수법은 침선문과 찍은 무늬가 기본이다. 무늬는 침선문으로는 어골문이 가장 많고, 단사선문과 종주어골문이 결합된 것, 격자문, 동심원문, 뇌문 등이 있고, 찍은 무늬로는 점렬문, 점렬거치문, 점렬문과 점렬곡선문이 결합된 것 등이 있다. 그 외에 무늬가 전혀 시문되지 않은 것도 꽤 보인다.

(아) 송림 석탄리유적

 松林市 石灘里의 북쪽을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가는 매상천 옆의 낮은 야산에 위치하는 주거지 및 분묘유적이다. 주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었지만, 그 속에서 움집터 1기(제16호)와 약간의 빗살무늬토기조각이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439) 아마 이 곳에 청동기시대 유적이 자리잡기 이전에 신석기시대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표면에서 약 40㎝ 내려가서 빗살무늬토기조각이 깔려 있는 주거지 바닥이 확인되었는데,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움집 바닥에는 다져진 흔적도, 불에 탄 흔적도 없었으며, 남아 있는 집자리의 규모는 동서 길이 3m, 남북 너비 1m였다.

 집자리에서 나온 유물은 4∼5개분의 빗살무늬토기였다. 태토는 굵은 모래알이 섞여 거칠며 기형은 밑이 둥근 심발형이다. 무늬는 주로 침선문계무늬인데 어골문이 주류이고, 그 외에 뇌문과 그릇 위쪽에 2줄의 단선열문이 시문된 것도 보인다.

(자) 봉산 지리유적

 智里의 대방군 토성 안팎에 위치하는 주거지와 포함층유적이다. 이 곳은 재령강의 한 지류인 瑞興川邊이며,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유적이다. 1957년 지리에 있는 대방군 토성 안의 한 지점(Ⅰ지구)과 이 곳에서 남동쪽으로 750m 떨어져 있는 다른 지점(Ⅱ지구)이 발굴되었다.440)

 Ⅰ지구의 층위는 표토층·고대문화층·신석기문화층으로 되어 있는데, 신석기문화층에서 움집터 1기가 조사되었다. Ⅱ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팽이형토기문화층이 확인되었고, 신석기시대 움집터 2기(2·3호), 청동기시대 움집터 1기(4호)가 발굴되었다. 신석기시대 움집터의 깊이는 40∼60㎝이며, 형태는 방형 혹은 말각방형이며 바닥은 진흙을 펴 다졌다.

 1호 움집터는 바닥 외에 벽도 진흙으로 덧대고 다져 놓았다. 바닥의 중앙부에는 강돌로 테를 돌려 만든 화덕자리가 있고 그 주변에 토기 밑을 잘라버리고 거꾸로 박아 놓은 저장공이 있었다. 2·3호 움집터에서는 바닥의 네 가장자리를 비롯한 곳곳에서 기둥구멍이 조사되었고, 벽면의 한 곳에는 계단형 또는 경사형의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다. 지리 움집터와 비슷한 움집터는 평안남도 궁산조개더미, 서울 암사동유적 등 중·서부지방의 신석기시대 전기유적에서 조사된 바 있다.

 토기는 바탕흙에 활석과 석면이 섞여 있는 밑이 뾰족한 심발형토기가 대부분이나 납작바닥토기도 약간 출토되었다. 밑이 뾰족한 심발형토기에는 아가리·몸통·바닥에 서로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아가리에는 점줄무늬·점줄밀집무늬·손톱무늬·물결점줄무늬·무지개무늬 등이, 몸통에는 종주어골무늬·타래무늬·‘W’띠무늬, 바닥에는 짧은 빗금무늬·횡주어골무늬가 주로 새겨져 있다. 석기로는 삼각형의 미늘식 활촉과 창끝·도끼·맷돌·숫돌·그물추·망치·공이·보습·낫 등이 출토되었으며, 2호 움집터에서는 피 또는 조로 보이는 탄화곡물이 3홉 정도 출토되어 한반도 최초의 농경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지리의 신석기문화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북으로는 궁산조개더미, 남으로는 한강변의 암사동·미사리유적과 한 문화영역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한강변의 신석기문화는 이 문화의 전파·이주에 의하여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2호 움집터에서 출토된 돌보습·돌낫과 탄화곡물은 그 당시 주민의 경제생활이 수렵·어로 이외에 이미 원시적인 농경에도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유물이 되고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1호 주거지와 퇴적층은 B.C.4000년대로, 2·3호 주거지는 B.C.3000년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차) 봉산 마산리유적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유적이다. 그 중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표토층인 약 30㎝의 검은 모래층 밑에 황색 모래흙층(약 60∼120㎝), 황색 모래층(약 70㎝), 원토층인 모래자갈층이 차례로 쌓여 있는데,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는 황색 모래층을 파고 지은 반 움집이다.441)

 650㎡ 범위 안에 12개의 움집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대부분 말각방형이나, 그 외에 장방형(3호)·원형(7호)도 있으며, 일부 집자리에는 너비 150㎝ 정도의 반달모양 출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움의 깊이는 대체로 30∼40㎝이고 집자리의 넓이는 가장 큰 1호분의 경우 650×680㎝, 가장 작은 18-ㄴ호의 경우 330×340㎝ 정도이다. 벽은 붉은 진흙이나 황색 진흙을 발라 다졌고, 바닥은 황색 진흙을 펴서 다졌으며 중앙에는 돌을 돌린 직경 70∼100㎝의 화덕이 설치되어 있고, 일부 집자리에는 바닥을 약 50㎝ 정도 파고 진흙을 깔아 다진 다음 불로 구운 저장 움도 있었다.

 유물은 보습·갈돌·도끼·자귀·대팻날·끌·정·창·활촉·그물추·칼·가락바퀴·시문구·숫돌 등과 100여 개 분량의 빗살무늬토기조각이 출토되었고, 그 외에 7호 주거지에서는 탄화된 조의 낱알도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 침선문이고 일부분이 민무늬였으며 형태는 단지·바리 등이다. 침선문은 점선묶음무늬·어골무늬·점선타래무늬·사선띠무늬 등이다.

 이 유적은 집자리와 유물 갖춤새로 보아 그 성격이 지리유적 제2지구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 해주 용당포패총

 황해도 해주시 龍塘里에 위치한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형성된 패총유적이다.442) 용당포 나루터에서 약 200m 동북쪽에 있는 동굴산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이 조개더미층은 경사면의 위쪽부분에서는 얇았으나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꺼워져 가장 두꺼운 부분은 2m를 넘는다. 발굴된 제1구덩이의 1층은 굴껍데기와 검은 진흙 및 막돌이 섞인 층으로 아무런 시설물도 보이지 않는다. 2층은 재가 많이 섞인 부식토층으로, 화덕으로 추정되는 불맞은 진흙무지가 발견되었다. 3층은 純貝層으로 유물이 극히 적다. 제2구덩이의 표토층 바로 밑은 混土貝層이고 그 아래는 생토인데 혼토패층 밑부분에서는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출토유물 중 토기는 빗살무늬토기가 대부분이지만 민무늬토기도 보인다.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종주어골문과 횡주어골문을 전면에 시문한 것 외에 파상점선문·격자문·집선문·체크무늬 등이며, 기형은 밑이 둥근 심발형이 많으나 납작바닥의 것도 보인다. 바탕흙은 차진 점토에 활석을 섞은 것이 대부분이고 석면을 섞은 것도 약간 있다. 민무늬토기는 수량이 적은데, 말각평저도 보이며, 바탕흙은 빗살무늬토기와 비슷하다. 석기로는 편암의 간돌활촉·곰배괭이·매부리형석기·갈판 등이 있다.

 출토유물로 보아 이 패총은 신석기시대 후기로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빗살무늬토기는 궁산리·지리·금탄리유적의 것들과 비슷하다.

(타) 청단 소정리유적

 해주에서 靑丹으로 가는 도중 역인 갈산역 남쪽으로 약 6㎞ 정도 떨어져 蘇井里가 있고 유적은 이 소정리의 남쪽 700m 정도 떨어진 동서로 긴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서는 신석기시대 집자리 11개와 청동기시대 집자리 4개가 조사되었다.443) 집자리들은 구릉 등판의 약 7000㎡ 범위 안에서 발굴되었으며 모두 움집이다.

 이 곳의 집자리들은 2개 혹은 3개가 중복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평면형태는 타원형·말각방형·말각장방형·장방형·장방형과 원형이 복합되어 있는 것 등 다양하다. 크기는 가장 큰 9호 집자리가 660×520㎝이고 가장 작은 8호 집자리는 370×280㎝이다. 바닥은 대개 평탄하게 고루고 다진 다음 불로 구워 단단하게 하였으며 바닥 가운데에 돌을 돌리거나 오목하게 판 화덕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들 주거지의 공통적인 특징은 주거지의 단벽쪽에 좁고 긴 복도식의 출입구가 설치되어 있는 점이다.

 유물은 갈돌판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약 40개체분의 토기편뿐이었다. 태토는 진흙에 차돌을 모래처럼 잘게 깬 차돌모래를 섞은 것이 기본이고, 일부 활석과 모래·운모를 섞은 것이 보인다. 기형은 대부분은 외반한 것이고, 내경한 것은 극히 적으며, 밑창은 모두 둥근 것으로 심발형이 일반적인 것 같다.

 무늬는 어골무늬·사선띠무늬·수직선띠무늬·점사선띠무늬가 일반적인데, 이 중 가장 많은 것은 어골무늬이고, 그 외에 격자무늬, 여러 줄의 점선묶음을 서로 꼬아 놓은 점선타래무늬, 점선물결무늬와 어골무늬를 배합한 것, 다치구로 곡선이 되게 그은 무늬 등이 있다. 무늬가 전혀 시문되지 않은 것도 있고, 또 밑창 끝까지 전면에 무늬를 새긴 것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아가리와 몸통까지만 무늬가 새겨진 것 같다.

 발굴자들은 집자리의 중복관계와 그 구조적 특징 및 빗살무늬토기의 특징 등을 근거로 이 유적의 신석기시대 집자리를 제1기(1·7·9·11·15호)와 제2기(2·3·4·6·8·10호)로 구분하고, 1기는 궁산문화 3기에, 2기는 궁산문화 4기에 각각 속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 서울·경기도지방

(가) 서울 암사동유적

 한강 남안에 강변을 따라 동서로 형성되어 있는 충적사질층의 대지 위와 그 양쪽 경사면에 형성되어 있는 포함층유적이다.444)

 층위는 표토층과 생토층을 제외하고 3개의 문화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문화층은 명갈색 또는 적갈색의 사질층으로 여기서는 전형적인 서해안식 빗살무늬토기와 주거지 적석유구들이 확인되었다. 제2문화층은 흑회색 사질층으로 후기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제3문화층은 표토 아래 형성된 흑갈색 부식토층으로 백제문화층이다.

 이 유적의 최하층인 제1문화층에서는 25기의 움집터가 확인되었다. 움집의 평면형태는 말각방형(최소 3.9×3.1m, 최대 6.3×5.9m)·원형(최대지름 5m)·장방형(7.9×6.6m)·타원형(5.0×3.5m) 등이 있는데, 그 수는 말각방형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원형이다. 네 모서리에 1개씩의 기둥구멍이 있는 것이 많고, 대부분의 움집 중앙에는 돌을 돌린 원형·방형·장방형의 화덕이 있고, 일부에는 한쪽 벽에 출입구시설이 있는 것과 토기를 거꾸로 박은 저장공이나 선반 같은 시설을 한 것도 보인다.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운모가 섞인 사질토가 대부분이나 기벽이 얇고 정선된 태토의 토기에는 석면·활석이 섞인 것이 많다. 이외에 활섬석·휘석 등도 나타난다.

 기형은 직립구연과 첨저의 반란형 또는 포탄형이 기본이고, 원저 및 말각평저도 있으나 후자는 대부분 소형 완이다. 반란형의 첨저토기는 입지름과 높이가 거의 비슷하며 높이는 20∼40㎝가 많은데 60㎝가 넘는 대형도 보인다.

 무늬는 구연부·몸통부·저부의 세 부위에 각기 다른 무늬를 시문한 이른바 구분문계 전면시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나 몸통무늬가 전면에 시문된 동일문계도 있고 소형 평저토기에는 무늬가 생략되거나 사격자문이 거칠게 시문되어진 것도 있다. 구분문계는 일반적으로 구연부에 3∼7렬의 단사선문을, 몸통에 종주어골문, 저부에 횡주어골문·방사상문을 시문하였다. 구연부에는 단사선문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기타 조문·점렬문·사격자문·횡선문 등이 보이며, 몸통에는 종주어골문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횡주어골문, 이어서 격자문·능형문·찰과문 등이 보인다. 구연부와 몸통 사이에 파상점선문·중호문·거치문·능형문이 첨가된 토기도 있다. 저부에는 횡주어골문이 주로 시문되나 격자문·단사선문·찰과문도 있으며, 구분문계토기에는 저부무늬가 생략된 것도 있다.

 석기는 자갈돌의 둥근 면을 떼내어 만든 긁개와 찍개·도끼 등의 타제석기가 주류를 이루며 납작한 타원형 자갈돌의 양끝을 쪼아 내어 만든 어망추도 상당량 출토되고 있다. 마제석기로는 돌도끼·석촉·석추·돌낫·연석이 보인다.

 암사동 신석기유적은 전형적인 구분문계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아랫문화층과 동일문계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윗문화층으로 나뉘어진다. 아랫문화층은 지리·궁산유적과 비슷한 시기의 유적으로 서한빗살무늬토기문화 중 빠른 시기에 해당하며, 그 연대는 B.C.4500∼3500년 사이이다. 위층의 문화는 반출유물이 거의 보고되어 있지 않고 C14연대도 없으나 대체로 신석기 후기의 B.C.2000년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 옹진 백령도패총

 白翎島에는 용기포의 포구 부근과 말등부락 부근 2곳에 패총이 있다.445) 이 중 규모가 큰 말등패총은 패각층의 두께가 약 60∼100㎝, 길이가 15∼20m에 달한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 구연부·동체부·저부편 외에 빗살무늬토기계 민무늬토기와 긁개 2점, 기타 뼈조각과 마제석부, 자갈석기 수십점이 채집되었고, 또 화덕자리와 유사한 불피우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점토에 굵은 모래알이 섞였고, 구연부는 직립하였다. 무늬는 드문드문 시문된 단사선문과 가느다란 침선이 여러 줄 그어져 어골문일 것으로 추정되는 무늬들이 보인다. 시문수법이 아주 조잡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후기 이후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 옹진 연평도패총

 延坪島에는 크고 작은 9개의 신석기시대 패총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446)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연평리 동쪽 길가에 위치하는 E지구패총이다. 규모는 30×20m 정도이며 퇴적층의 깊이는 1.5m 정도인데 층위는 표토층(30㎝), 회색 패각층(80㎝), 갈색 패각층(40㎝)으로 이루어져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석면이나 활석이 섞인 것이 많고, 모래알이 거의 섞이지 않은 정선된 점토를 사용하고 있다. 무늬는 횡주어골문·단사선문·파상점선문·능형점렬문 등이 있고 무늬가 없는 토기편도 있다. 그 외에 직경 9㎝ 정도의 원판형석기도 채집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시문방법이 정연하고 특히 조밀하게 시문된 점렬문계통의 무늬들이 많은데, 이것은 주변의 다른 패총에 비해 이 유적의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라) 시흥 오이도 신포패총

 烏耳島 新浦에는 3개의 패총이 남아 있다.447)

 A패총은 오이도 남쪽 끝 포구인 신포동 마을 뒷산의 표고 7∼10m 지점에 있는데, 파괴되고 패각층이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층위는 표토 아래에 10∼20㎝의 혼토패각층과 그 아래의 검은 부식토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교란되지 않은 곳에서 간혹 빗살무늬토기편이 채집되었다.

 무늬는 단사선문·조형문·횡주어골문·횡선문·삼각거치문·삼각집선문 등이 있는데, 시문수법은 비교적 정연한 편이다. 같은 오이도 북부패총, 신포 C패총과 함께 서해 중부지방의 신석기 중기 후반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B패총은 A패총의 동쪽 신포마을 뒷산의 표고 11∼15m 지점에 형성되어 있다. 이 패총은 규모가 각기 다른 10개의 패각무더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무더기들은 부분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패각무더기 사이의 선후관계에서 밝혀진 층위관계는 모두 12개의 층서로 나타나 있다. 표토층 밑에 5∼6개의 패각층과 부식토층이 교대로 퇴적되어 있다.

 한 패각무더기의 두께가 30∼40㎝ 정도이고, 넓이가 대체로 30∼35㎡ 정도인 것으로 보아 한 계절 동안의 패각폐기단위일 가능성이 많아 시간폭이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구로는 야외노지 3개소가 발견되었고, 유물은 빗살무늬토기편과 석촉 1점, 석부 2점, 굴따는 석기 1점, 골촉 1점이 있다.

 밑바닥은 거의 대부분 둥근밑인데, 1점을 제외하고는 무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주로 몸통부까지만 시문되었던 것 같다. 무늬의 종류는 단사선문·조형문·자돌점렬문·횡주어골문·세격자문·사선열문·동심원점렬문·파상점렬문·격자문·사선문 등 다양한데 구분문의 경우 단사선문 및 조형문과 횡주어골문이 결합된 것이 많은 듯하고, 동일문의 경우는 횡주어골문이 가장 많은 것 같은데, 여기에 다치구로 시문한 것도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특징으로 보아 이 패총은 시도 1·2지구와 비슷한 신석기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포 A패총에 서쪽으로 약 300m 정도 떨어진 표고 6∼10m가량 되는 지점에 C패총이 있다. 발견 당시에는 군사지역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채집된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는 단사선문·조형문·횡주어골문·종주어골문과 단사선문+횡주어골문·조형문+횡주어골문 등이 보인다. 저부까지 사선문이 시문된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구분계 전면시문토기도 있었던 것 같다. 일부 어골문 중 찰과상으로 시문된 퇴화된 무늬도 있지만 빗살무늬토기의 특징으로 보아 상한은 서해 중부지방의 빗살무늬토기 중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많다.

(마) 옹진 시도패총

 矢島에는 3곳에 패총이 남아 있다. 이 중 강화도 동막동과 마주보는 섬의 북단에 위치하는 제1지구패총이 가장 규모가 크다.448) 흙이 거의 없는 순패각층이 50㎝ 정도 쌓여 있고 그 밑에 검은색의 부식토층이 10㎝가량 쌓여 있는데, 이 부식토층 바닥에서 60∼80㎝의 타원형 화덕자리가 1개 발견되었다. 화덕자리는 지름 5㎝ 정도의 잡석을 평탄하게 깔아 만든 것인데, 이와 같은 형태의 화덕자리는 패각층 사이에도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 토기편이고 석기는 약간뿐이며 뼈도구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유물은 부식토층 윗면에서 가장 많이 나왔으며 패각층내에서는 소량만 나왔다.

 토기는 굵은 모래알이 섞인 점토질 태토로 빚었으며 운모가 섞인 사질계와 활석과 석면이 섞인 토기도 약간 있다. 운모가 섞인 토기는 기벽이 두텁고 큰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이며 활석과 석면이 섞인 것은 기벽이 얇은 소형토기였다. 기형은 직립구연에 밑이 둥근 U자형 심발형이 대부분이나 간혹 외반구연도 보인다.

 무늬는 구분문과 동일문의 두 종류가 있다. 구분문토기는 구연부에 단사선문·점선열문 등을 넣고 몸통에는 어골문을 주로 시문하였는데 구연부에는 사격자문·조형문도 소량 보이며 구연부와 몸통 사이에 점렬로 重弧文이나 파상문을 넣은 것도 있다. 완전히 복원된 토기는 없으나 이들 구분문토기는 대부분 바닥에는 무늬가 생략된 것으로 보이며 몸통까지 무늬가 생략된 것도 있다. 동일문토기는 구연부에서 몸통 중간까지 횡주어골문을 시문한 토기로 횡주어골문은 선과 폭이 정연한 것도 있으나 조잡하고 상하의 선이 겹친 퇴화된 어골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무늬가 분해되어 격자문화된 것도 있다. 이외에 무늬가 전혀 시문되지 않은 것도 약간 공반되고 있다.

 석기는 어망추 2개, 석부 1개, 석도 2개, 석촉 4개, 연석봉 2개가 출토되었다. 어망추는 길쭉한 자갈의 허리를 쪼아 내어 만들었으며 석촉은 無莖의 逆刺式이다. 석도는 자갈돌을 옆면에서 때려 떼어낸 격지로 예리한 날면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석부는 긴 타원형의 조그마한 조갯날 도끼이다.

 1지구패총은 변형된 횡주어골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면서 구분문토기도 출토되고 있다. 양자가 동일한 시기에 같이 공반된 것인지 층위가 교란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변형 횡주어골문토기의 존재는 이 유적이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함을 보여준다.

(바) 안산 초지리(별망)패총

 군자면 초지 2리의 해발 48m 야산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1974년에 발굴되었다.449) 원래 이 일대는 바닷가였으나 간척사업에 의해 발굴 당시에는 논과 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적의 층위는 표토 아래에 흑갈색 패각층이 있고 그 밑에 적갈색 또는 황갈색 패각층이 지역에 따라 달리 퇴적되어 있었다. 적갈색 패각층 아래에서는 잡석이 섞인 찰진 진흙층이, 황갈색 패각층 아래에서는 화덕자리와 모래층이 깔려 있었다. 빗살무늬토기는 적갈색 진흙층과 화덕자리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패각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김해식토기가 공반되고 있었는데, 원삼국시대 이후에 교란된 것으로 보인다.

 화덕자리는 사질생토를 60㎝ 정도 판 후, 주위에 잡석을 돌려 만들었고 2개체분의 토기조각이 산포되어 있다. 토기들은 몇 편의 운모 섞인 사질토기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점토질태토에 모래알을 섞었다. 기형은 직립구연에 밑이 뾰족하거나 둥근 반란형으로 토기 겉면과 구연부 안쪽에는 나무결이나 조가비를 이용해 문지른 條㾗이 많이 나타난다.

 패각층의 출토유물 중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유물은 토기뿐이다. 토기는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무늬의 종류는 單齒具로 깊게 새긴 횡주어골문과 다치구로 아래 위가 겹치게 새긴 횡주어골문, 횡주어골문이 해체된 X자형무늬가 있으며 구연부 주위나 몸통부 중간까지만 시문하였다. 이외에 구연부에 단사선문·단사점선문이 새겨진 구분문토기도 출토되었다. 바닥층 출토유물은 석기 2점 외에는 모두 토기이다. 역시 동일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나 구분문토기도 패각층에 비해서는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동일문 중 정연한 횡주어골문은 보이지 않고 다치구에 의한 조잡한 횡주어골문이 많고 선이 짧고 무늬의 폭이 넓은 횡주어골문, 삼치구에 의한 평행단사선문도 보인다. 무늬는 몸통 중간까지나 몸통 아래까지 시문하였다. 구분문에는 구연부에 단사점선문을 6렬 배치하고 몸통에 각이 좁은 ∧형무늬를 좌우로 겹치게 그은 뒤 그 안에 두 줄의 평행단사선을 새기고 밑은 무늬를 생략한 토기, 구연부에 점렬문을 12열 시문하고 몸통에 횡주어골문을 시문한 토기, 구연부에만 단사점선문·단사선문·조문 등을 시문한 토기 등이 있다. 또한 전면에 무늬가 생략된 토기도 몇 편 출토되었다.

 석기는 전면을 마연한 조갯날 도끼와 숫돌 각 1점씩이 출토되었다.

 草芝里 別望貝塚은 대체로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의 유적이다. 패각층 출토유물에 비해 바닥층 출토유물이 다소 이른 양상을 보이나 양자의 시간적 차이는 거의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 일산 신촌유적

 일산읍 주엽리 새말(新村) 앞 경작지 일대의 퇴적층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 신석기시대의 토기, 청동기시대의 토기와 석기가 출토된 포함층유적이다.450) 기반암풍화대 위에 덮힌 굵은 모래층이 구석기층이고, 그 위의 대화리층 아래쪽에서 신석기시대 토기가 보이며, 다시 그 위의 갈색 토탄층에 역시 신석기시대 토기가 출토되었다.

 대화리층의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점토에 석영과 장석 알갱이가 들어 있는 것과 가는 모래가 들어 있는 것이 있으며, 기형은 구연이 직립하고 밑이 뾰족한 서해안식의 심발형이다. 무늬는 구연부에서부터 몸통 전체에 걸쳐 횡주어골문의 단일문양이 시문되었는데, 시문구는 이빨이 3∼4개인 다치구이다. 이 층의 토기는 무늬와 토기모양으로 보아 대동강 이남에서 중부지방에 걸쳐 분포하는 전형적인 서해안식 빗살무늬토기로서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의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갈색 토탄층의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점토의 함량이 많은 편이고 굵은 석영 알갱이가 두드러진다. 토기편이 작아 정확한 기형은 알 수 없지만 대화리층과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늬는 횡주어골문이 주류이지만 그 외에 집선문계통의 무늬도 보인다. 아래층과는 달리 무늬는 단치구로 시문하였고 시문상태도 정연한 편이 아니다. 이 층의 토기는 신석기 중기에서 늦은 시기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서해안의 오이도·시도·소야도유적의 토기와 비교될 수 있는 공통점이 보인다.

(아) 하남 미사리유적

 암사동유적에서 약 6㎞ 상류의 한강 남안의 충적사질의 臺地 속에 형성되어 있는 포함층유적이다. 渼沙里는 현재 물길의 변화에 따라 한강 본류와 지류에 의해 에워싸인 섬으로 되어 있고 유적은 섬의 서남단에 형성되어 있다. 강의 침식과 모래채취작업 그리고 미사리조정경기장의 건설 등으로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고, 1987∼92년 사이에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451)

 포함층의 두께는 현재의 지표면으로부터 바닥인 생토면까지의 2.3m에 달하는데, 모두 7개의 자연층으로 구분된다. 이 중 신석기시대의 유물은 제4층의 아랫부분에서부터 출토된다. 여기서는 바닥을 제외한 토기 전면에 어골문을 시문한 동일계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기형은 원저이며, 바탕흙에 굵은 모래알을 섞고 있어서 민무늬토기의 바탕흙과 흡사한 점이 많다. 제5층은 유물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유물무포함층이었고, 제6층 및 제7층에서는 아가리와 몸통에 서로 다른 무늬로 토기의 겉면 전체를 장식한 구분계빗살무늬토기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기형은 첨저이며, 바탕흙에는 고운 모래와 운모가 많이 섞여 있다.

 무늬는 아가리에는 주로 평행밀집사단선문이나 열점문·손톱무늬가, 몸통에는 종주 또는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것이 가장 많고 사격자문도 보이며, 구연부와 몸통 사이에는 죽관에 의한 연호문·중호문이 삽입된 것도 있다. 저부에는 어골문과 사선문이 보인다.

 토기 이외의 생활도구로는 타제석부류와 돌그물추가 채집되었고, 최하층인 바닥면에서는 탄화된 도토리가 약간 채집되었다. 여기서 채집한 목탄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B.C.3150±140년의 연대가 나왔다.

 층위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초기에는 암사동출토 빗살무늬토기와 동일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거주하다가, 그 후기에는 동일계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하였고, 그 뒤에도 청동기시대와 원삼국시대에 걸쳐 선사시대 사람들이 계속 거주하였던 유적으로 생각된다.

라) 충청도지방

(가) 단양 상시 바위그늘유적

 上詩 2·3바위그늘유적 모두에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그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된 것은 3바위그늘이다.452) 넓이 14㎡의 조그마한 유적인데, 입구 길이는 4m, 그늘 안의 길이는 9m이다. 층위는 모두 6개로 구분되는데, 그 중 4층에서 1층까지 토기가 출토되었다. 4층은 적색 사질점토층으로 융기문토기가, 3층은 갈색 고운 모래층으로 빗살무늬토기가 각각 출토되었고, 1·2층은 교란되어 빗살무늬토기·석기·골각기·사람뼈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구연단 4㎝ 밑에서부터 2㎝ 간격으로 덧띠 4줄을 평행으로 부착하고 그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눌렀고, 토기 겉면은 잘 마연하였다. 기형은 밑이 납작한 발형토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는 대부분 점토에 석영이나 운모가 섞인 태토로 빚었으며, 외반된 구연 2점 외에는 모두 직립구연이고 밑은 뾰족하다.

 무늬는 1∼2열의 단사선문이 구연부 주위에만 시문된 것이 주류를 이루나 평행단사선문과 횡주어골문을 구연부와 몸통에 시문한 것, 점렬문 밑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것도 있다. 출토된 밑바닥토기로 보아 전면시문토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 외에 방사상의 점렬문이 시문된 주판알 모양의 가락바퀴도 1개 출토되었다.

 석기는 굴 안쪽으로 치우쳐서 발견되었는데, 자르개·석촉·숫돌·갈돌 등은 각 층에서 고루 출토되는 반면, 4층에서는 찍개·긁개·대팻날이, 1층에서는 밀개·긁개·공이·곰배괭이가 추가로 출토되었다.

 골각기는 모든 층에서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뾰족한 끝을 이용한 찌르개로 쓰였던 것 같고, 조가비유물로는 1층에서 팔찌와 치레걸이가, 5층에서는 투박조개로 만든 팔찌가 각각 출토되었는데, 모두 바닷조개이다. 그 외에 다슬기·우렁이·대고둥·홍합·산달·토끼·고라니·말·여우 등의 동물뼈와 팽나무 등의 자연유물도 출토되었다.

 4층에서 출토된 평행융기대문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무늬이므로 이 층의 연대는 신석기시대의 조기 또는 전기에 속할 것으로 보인다. 1∼3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수가 적어 층위간의 변화는 알 수 없으나, 단사선문·횡주어골문·평행사선문 등은 토기의 바닥 또는 몸통무늬가 생략된 단계의 것으로 그 시기는 신석기시대의 후기 이후에 속할 것으로 추정되며 구연부에 빗방울모양처럼 시문된 1∼2열의 단사선문은 남해안의 신석기 말기유적에서 많이 나타나는 무늬이다.

(나) 단양 도담리 금굴유적

 남한강의 강안 언덕에 형성된 동굴유적으로 1982년에 발굴되었다.453) 굴의 크기는 높이 8m, 길이 85m,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7∼10m이며, 강의 수면보다 5.4m 위에 있다. 층위는 모두 8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대부분 구석기문화층이고, Ⅱㄴ층이 신석기문화층, Ⅱㄱ층이 청동기문화층이다. 신석기문화층에서 출토된 유물은 뗀석기·뼈연모·치레걸이·조가비 등과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모래가 섞인 점토가 주류이고 운모가 섞여 있는 것도 꽤 있다. 구연은 외반된 것 1점 외에는 모두 직립하였고, 저부는 둥근 밑과 모죽인 납작밑이 보이는데, 기형은 대부분 반란형인 것 같다. 무늬는 구연부 주변에 주로 시문되어 있고, 몸통까지 시문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으며, 시문수법은 찰과상으로 시문한 것이 많다. 사격자문·단사선문을 단독으로 시문한 것이 가장 많고 태선식의 횡주어골문도 보이며, 구연부에 단사선문을 몸통에 집선문을 시문한 구분문토기편도 출토되었다.

 석기는 납작한 조약돌로 만든 그물추·찍개·마치 등이 있고, 골기는 뼈송곳·뼈바늘이, 그 외에 조가비팔찌·뿔고둥으로 만든 치레걸이 등이 각각 출토되었다. 또 사슴·멧돼지·너구리·말·자라 등의 짐승뼈와 고둥·다슬기·조개 등의 조개류도 출토되었고, 불땐 자리와 그을은 큰 돌도 Ⅱㄴ층에서 확인되었다.

 시문수법이나 무늬의 종류가 대체로 남해안지역과 관계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며 그 연대는 스친 듯이 구연부 주변에만 시문한 사격자문·단사선문 등은 남해안 신석기 후기로, 단사선문과 집선문이 복합시문된 토기와, 태선식어골문토기는 신석기의 중기 후엽으로 각각 추정된다.

(다) 청원 쌍청리유적

 강외면 雙淸里 산 3-1에 위치하는 신석기 및 삼국시대의 주거지유적으로, 1993년 발굴되었다. 유적은 미호천으로 합류되는 병천 천변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해발 70m 내외의 야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약간 돌출된 해발 50m 정도의 얕은 구릉 위에 입지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2기의 수혈주거지가 조사되었고, 토기 및 석기류 등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454)

 3호 주거지는 길이 180㎝, 폭 100㎝ 내외의 凸자모양의 돌출부가 달린 수혈주거지이다. 주거지 깊이는 20㎝ 내외이며 바닥에서 1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4호 주거지 역시 많이 파손되고 현재 동서 310㎝, 남북 260㎝ 정도 남아 있고, 깊이는 30∼40㎝ 정도이다. 평면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부 바닥과 남쪽 외곽에 넓고 깊은 구멍이 여러 개 보이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

 빗살무늬토기는 밑이 둥글고 구연이 직립한 심발형과 목이 좁고 밑이 둥글며 깊이가 얕은 단지가 있다. 무늬가 없는 것도 있지만 대개 무늬는 아가리 주변과 몸통까지만 시문되었다. 무늬는 침선문계가 주류인데 능형집선문·횡주어골문·종주어골문·평행사선문·평행단선문·평행선문·격자문 등이 있고, 그 외에 연속점렬문과 압날 및 압형문이 약간 보인다. 무늬는 대개 단독문인 것 같고, 횡주어골문이 가장 많다. 이 유적의 특이한 토기는 납작한 단지에 압날 및 압형문이 시문된 錦江式토기이다. 이 토기는 영동 금정리유적, 대전 둔산동유적 등 금강수계 본류 및 지류에만 분포하는 지역성이 강한 토기이다.

 석기류는 석도·석영석기·석부·보습·숫돌·갈돌 등이 보이는데, 주로 농경과 관련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많은 반면, 어망추 등 고기잡이 관련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라) 영동 금정리유적

 심천면 錦汀里 금강 상류의 충적대지에 남아 있는 유적인데, 석영석기·격지 및 민무늬토기·적갈색 연질토기·타날문토기·기와조각들과 함께 빗살무늬토기·그물추가 출토되었다.455)

 빗살무늬의 바탕흙은 모래질과 고운 모래나 굵은 모래가 섞인 찰흙질의 두 가지가 있다. 기형은 뾰족밑에 곧은 입술의 심발형토기가 대표적이며 밑이 약간 둥근 것도 있었고, 손잡이 달린 것과 겹입술토기도 보인다.

 무늬는 단사선문·점렬문·사격자문·종주어골문·집선문과 점렬문+종주어골문 등이 있는데 사격자문이 가장 많다. 주로 구연부 주위에만 시문되었고, 시문수법이 조잡한 편이다. 겹입술토기와 함께 일부 무늬가 남해안지방 무늬와 유사하여 두 지역간의 연관성을 짐작케 하고 있다.

(마) 태안 고남리패총

 安眠島의 남단에 위치하는 고남면 古南里의 감나무골 일대에 있는 패총인데, 1988∼94년 6번에 걸쳐 발굴되었다. 3개의 소규모 패총이 부분적으로 서로 겹쳐져 형성되어 7개의 층위로 나뉘어지며, 1∼4층까지는 민무늬토기문화층이고, 5∼7층이 빗살무늬토기문화층이다.456)

 빗살무늬토기문화층에서는 많은 빗살무늬토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형태는 아가리가 곧게 올라가고, 밑이 둥근 심발형이며, 바탕흙은 석영·장석·활석알갱이와 운모·조개가루 등이 많이 섞인 점토로 민무늬토기의 바탕흙과 유사하다.

 무늬는 40여 가지가 있는데, 어골문 모티브가 가장 많고, 단사선문·점렬문 등도 보인다. 구분문의 경우 대체로 아가리부분에는 단사선문이나 점렬문, 몸통부에는 어골문이 시문되었던 것 같으나 어골문 위주의 동일문계가 주류인 것 같으며, 밑부분은 무늬가 없었던 것 같다. 대체로 시문수법이 거칠고 조잡한 편이며 복선어골문도 많이 보인다. 시도패총·별망패총·오이도패총 등에서 나타나는 무늬와 유사하다.

(바) 대전 둔산동유적

 갑천변의 북쪽으로 돌출한 표고 약 50m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신석기시대 포함층유적인데 1991년에 발굴되었다.457) 유구는 작은 집자리와 성격을 알 수 없는 구덩이 13기가 조사되었다. 유구의 직경은 2∼3m 내외이고, 깊이는 가장 깊은 곳이 80∼130㎝ 정도이다. 유물은 부식토층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빗살무늬토기 외에 보습 1점, 갈돌편 2점, 어망추 3점, 석기재료 다수, 석기 반제품 1점, 타원형 석재 10점 등이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운모와 석영이 섞인 모래질도 있으나 민무늬토기와 같은 점토질도 있다. 기형은 구연부는 대부분 직립하였으나 약간 외반된 것도 있고, 대부분 밑이 둥근 심발형이지만, 압날 및 압형무늬가 시문된 토기는 구연부가 좁아진 단지형이다.

 무늬는 삼각집선문·능형집선문·사선문·횡주어골문·퇴화단사선문 등의 침선문과 점렬문·능형압날 및 압형문 등이 있다. 그 중 특히 중부지방 빗살무늬 중에서는 삼각 및 능형집선문이 많은 점과 금강수계의 독특한 무늬인 능형의 압날 및 압형문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사) 서산 휴암리유적

 해미면 소재지 남쪽의 구릉 위에 위치하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유적인데, 1968년에 발굴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휴암리와 용암리로 나누어져 있지만 실제는 연결된 한 구릉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유적이지만 여기에서 신석기시대의 敷石遺構 1개소와 꽤 많은 빗살무늬토기편이 채집 또는 출토되었다.458)

 청동기시대 주거지인 A·B호 주거지 주위의 넓은 면적에 걸쳐 부석이 설치되어 있다. 부석은 크기가 20㎝∼40㎝가량 되는 할석을 생토층인 풍화암반층 위에 깔아 만들었고, 그 상부에는 연갈색의 부식토층이 10∼20㎝ 두께로 쌓여 있었다. 전체 부석의 규모는 동서 약 20m, 남북 약 16m인데, 그 중앙부는 2기의 수혈가옥을 세우기 위하여 동서 9m, 남북 8m 범위에는 돌이 깔려 있지 않았다. 깐돌 틈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들이 출토되었다. 발굴자들은 이 부석유구를 무덤시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빗살무늬토기의 형태는 직립구연에 밑이 둥근 심발형토기가 주류이며, 무늬는 구연부에는 단사선문 혹은 단사점렬문이, 몸통에는 종주어골무늬가 시문되어 있고, 바닥은 무늬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전면이 민무늬인 것, 구연부에서부터 어골문이 시문된 것도 공반된다. 특히 어골문은 多齒具로 지그재그식 꺾임선의 너비를 좁게 하여 치밀하게 시문된 것이 특징이다.

 태토는 진흙 또는 사질토에 고운 모래와 운모가 섞여 있는 것이 보통이나 중호문이 시문된 토기는 활석과 석면이 섞여 있어 암사동이나 시도출토 토기와 매우 유사하다.

 이 유적은 빗살무늬토기의 무늬·태토 등에서 볼 때, 지리·암사동·시도 등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문화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무늬조합상이나 어골문의 시문수법으로 볼 때, 암사동계문화와 시도계의 문화가 복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연대는 추정되고 있는 것처럼 모두가 신석기시대 말기에 속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 전라도 및 제주도지방

(가) 부안 계화도유적

 행안면 界火島의 246.3m 최고봉의 정상 남쪽 사면에 있는 포함층유적이다. 원래는 동진반도에서 서북쪽으로 5.5㎞ 떨어진 섬이었으나 현재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다. 유물은 석성의 무너진 돌밑 지표 아래 30㎝ 정도에 묻혀 있었는데 빗살무늬토기편 약간과 석기류 11종 등 총 20여 점이 출토되었다.459)

 빗살무늬토기의 기형은 입술이 곧은 것, 안으로 약간 오목한 것, 밖으로 벌어진 것 외에 둥근밑 조각이 있었다. 바탕흙은 황토에 석영질 모래를 섞은 것과 벽돌색 진흙에 고운 운모편을 섞은 약간 단단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무늬는 단사선문·손톱무늬·횡주어골문·파상문 등이 있는데, 어골문과 파상문은 부산 영선동·동삼동 등 조개더미에서 나온 눌러 찍은 무늬들과 매우 유사하다.

 석기류에는 석영암제격지 돌날 3점, 규암옥수로 된 말굽형 마제옥부 2점, 투각섬석편암으로 만든 유백색 동물이빨형 장식 1점, 석영편암·운모편암·흑색각섬석편암의 납작양날 돌도끼 5점, 수석화니질암을 원통형으로 갈아서 만든 대형의 간조갯날 돌도끼 1점, 돌끌 1점, 사암제 숫돌 1점이 있었다. 또한 특이한 것으로는 사암질 자갈을 계란형으로 다듬은 뒤 그물추처럼 홈을 쪼아 두르고 한쪽 끝을 갈아 둥근날을 세운 돌도끼가 있고, 그 밖에 뗀격지석기로서 T자형을 한 것과 등날을 세운 돌검형 석기가 각각 1점씩 있었다.

 이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소형 옥도끼인데, 이러한 옥도끼는 만주 요령지방의 약왕묘·남산근 하가점문화 하층과 적봉홍산후 제2주거지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으나, 한반도에서는 궁산리유적 Ⅴ갱에서 출토되었을 뿐이다. 옥도끼의 석재인 「옥수」는 우리 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남시베리아지방에서만 한정되고 있어 그 지역 문화와의 관계를 살피는데 참고가 된다.

 토기무늬를 보면 이 유적은 서해안지방보다는 동남해안지방의 빗살무늬토기문화와 관련이 더 깊은 것 같아 주목된다.

(나) 부안 대항리패총

 변산면 大項里 蛤九味마을에 있는 패총유적이다. 패총의 범위는 남북 약 14m, 동서 약 10m이고, 퇴적층의 두께는 127㎝이다. 두께 53∼65㎝의 패각층에서 타제석기 5점과 빗살무늬토기 2점이 채집되었다.460)

 토기는 무늬가 없으나 태토는 고운 사질토에 운모가 비교적 많이 함유되어 서해안지방의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의 태토와 상통하고 있다. 석기는 모두 반암제의 타제석기인데, 자갈돌에 옆으로 타격을 가해 만든 석부형 刃器로서, 서해안계 자갈돌석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적은 토기에 무늬가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태토와 석기의 성격으로 보아 빗살무늬토기계통의 패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 신안군 대흑산도패총

 진리만 남쪽에 잘록한 구릉의 북쪽 경사면 해안 가까운 모래땅에 있는 패총이다.461) 유적은 3개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로부터 Ⅰ층은 갈색 모래층(40∼100㎝), Ⅱ층은 모래섞인 자갈층(20∼60㎝), Ⅲ층은 두께 24∼36㎝인데, 다시 Ⅲ-a의 렌즈형 패각층(24∼36㎝)과 Ⅲ-b의 갈색 모래층으로 나누어진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은 Ⅱ층과 Ⅲ-a층에서 출토되었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붉은칠토기·무늬없는 토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운모와 석영립이 섞인 사질토, 활석분이나 활석립이 섞인 사질토, 굵은 석립이 섞인 점토질 등이 있으나 운모나 석영립이 섞인 사질토가 일반적이다. 무늬는 단사점렬문·퇴화단사선문·삼각세집선문·밀집집선문 등이 보이는데, 밀집집선문을 제외하고는 구연부 주변 일부에만 시문되어 있고 시문수법도 대개 조잡한 편이다. 밑은 거의 둥근바닥이며, 아가리는 직립 또는 겹아가리가 대부분이다.

 석기류는 뗀석기 및 일부 날을 간 돌도끼와 비교적 거칠게 만든 찍개·긁개 등이 있다. 그리고 토제 그물추도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로 보아 이 유적은 신석기시대 가장 늦은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라) 신안 소흑산도패총

 섬의 북단에 있는 可居島등대가 있는 서북방향으로 길게 뻗은 능선의 서쪽 경사면에 형성된 패총이다.462) 패총의 범위는 20×10m 정도이고, 순패총을 포함한 유물포함층의 깊이는 약 2m가량이다. 층위는 표토층(5∼10㎝), 부식토층(20∼30㎝), 순패층(10∼25㎝), 혼토패층, 흑갈색토층 등과 황토 및 암반으로 이루어졌다.

 유물은 주로 부식토층에서 발견되었는데 다양한 종류의 토기류·석기류·뼈연모 등이 있다. 토기의 태토는 모래알이 약간 섞인 점토이며, 무늬는 덧무늬·굵은금무늬·가는금무늬·점줄무늬·눌러찍은무늬 등과 무늬없는 토기 등이 있고 바닥은 둥근바닥과 납작바닥이 있다. 그 밖에 간돌도끼와 뼈바늘이 있다.

(마) 여천 돌산 송도패총

 섬의 북안에 있는 표고 2∼10m 내외의 낮은 언덕지대에 있는 패총인데, 1989∼90년 2번에 걸쳐 발굴되었다.463) 유적의 범위는 35×30m 정도이며 크게 4개의 퇴적층으로 이루어졌으나 이 층위는 다시 7개의 작은 층으로 나누어진다. 패각층의 두께는 50∼120㎝ 정도이며 유물은 Ⅲ-b층을 제외한 모든 층위에서 출토되었다. 제Ⅰ층은 표토인 경작층으로 Ⅱ층인 흑갈색 혼토패층과 함께 교란된 층위이며,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나 표지적 유물은 점렬무늬토기 및 두터운 아가리 또는 겹아가리토기이다. 석기류는 긁개, 날을 간 돌도끼 등이 있다. Ⅲ층은 다시 3개층으로 세분된다. 맨 위의 Ⅲ-a층은 덧무늬토기와 함께 굵은 침선문토기와 가는 침선문토기 및 무늬없는 토기가 출토되는데, 표지유물은 침선문토기이며 이외에 각목토기 및 붉은칠토기도 있다. Ⅲ-c층은 비교적 얇은 띠형태로 존재하는데 굵은 침선문토기가 새로이 등장하고 덧무늬토기 등 Ⅳ층유물이 계속되고 있다. 이음식낚싯바늘이 출토되었으며 흙으로 만든 구슬과 가락바퀴도 있다. 최하층인 Ⅳ층은 흑갈색 진흙층으로 덧무늬토기·붉은칠토기·무늬없는 토기 등이 출토되며, 밀개·찍개류, 일부 날을 간 돌도끼 등의 석기류도 있다.

 그 외에 골각기로는 찌르개·예새·낚싯바늘·조가비팔찌 등이 나오고, 멧돼지·사슴뼈 등의 동물뼈와 19종의 조개껍질도 채집되었다.

 3층에서는 2채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1호 주거지는 패각을 파고 그 안에 진흙을 채워 만든 것인데, 바닥의 가운데 지름 45∼50㎝ 정도의 화덕이 있고 납작한 판돌로 된 2개의 기둥받침이 있다. 규모는 파괴되어 확실하지 않으나 지름 460㎝ 정도이고 평면은 원형(또는 타원형)으로 추정되며 高床家屋일 가능성도 있다. 유물은 격지 등의 덜된 연모, 변형덧무늬 및 무늬없는 토기, 갈돌, 갈판, 사냥돌 등이 있다.

 2호 주거지는 1호와 겹쳐서 그 아래에 위치한다. 바닥 가운데에는 90∼100㎝ 정도의 비교적 커다란 화덕이 있다. 화덕의 서남쪽에 지름 20∼30㎝, 깊이 15㎝의 기둥구멍이 1개 있으며 그 밖에 출입시설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체적인 규모는 파괴로 확실하지 않으나 지름 540㎝ 정도이며 평면은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볼 수 있겠다. 유물은 숫돌, 갈돌, 흑요석조각, 변형덧무늬 및 무늬없는 토기, 붉은칠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4층과 바로 위의 3층에서 나온 숯으로 잰 방사성탄소연대값은 5440±170B.P.(반감기 5730년)와 5430±170B.P.(반감기 5570년)이다.

(바) 제주 고산리유적

 북제주군 한경면 高山里의 해안단구대지에 자리잡고 있는 포함층유적이다.464) 유적의 범위는 남북 1,000m, 동서 150m 정도이다.

 이 곳은 火山碎屑層이 수차에 걸쳐 퇴적된 것으로, 이 퇴적물 상부 1m 미만의 깊이에 황갈색생토층·황갈색점토층·흑색부식토층 그리고 표토층이 차례로 퇴적되어 있고, 유물은 생토층 위의 황갈색점토층과 흑색부식토층에서 출토되었다.

 유물은 석기가 대부분이고 토기편은 약간 있을 뿐이다. 석기는 모두 타제인데 3,000여 점이 채집 또는 출토되었다. 대부분 박편이고 모양을 갖춘 석기는 390여 점이다. 종류는 석촉이 가장 많고, 긁개·첨두기·돌날석기·첨기형석기 등이 있는데 전부 눌러떼기기법으로 제작한 5㎝ 미만의 소형석기들이다. 석재는 안산암류와 혼펠스가 대부분이다. 토기는 심발의 아가리 주변에 3줄의 태선융기문을 돌린 덧무늬토기와 짚이나 동물의 털 같은 것을 혼합하여 소성한 질이 거친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기형은 편평하고, 아가리가 내경하거나 직립한 심발형이다.

 이 유물들은 모두 6,400B.P.에 폭발한 일본 「아카호야」화산재층 밑에서 출토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이 유적출토 석기와 토기의 특성과 함께 이 유적이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초창기에 해당하는 유적일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으며 아울러 일본 繩文초창기∼조기문화와의 관련성은 물론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상한연대를 올려 보아야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 제주 북촌리유적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바위그늘유적이다. 1986년 발굴되었다.465) 바위그늘의 방향은 정남향이고, 규모는 길이 11m, 폭 3m 내외, 높이 2m이며 면적은 30㎡이다. 유적의 퇴적층은 표토층 밑에 4개층이 퇴적되어 있었는데, 최하층인 5층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원상태로 출토되었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가 가장 많고 골각기와 석기가 약간 검출되었으며 특이하게 탄화된 개산초 열매도 채집되었다.

 빗살무늬는 주로 구연부 아래에 2∼4열의 점렬을 압인기법으로 시문한 압인점렬문토기이고 이중구연토기도 꽤 출토되었다. 그 외에 격자문·단사선문·조개껍질로 찍은 어골문 등이 약간 보인다. 이 유적의 토기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토기 내외면을 패각 또는 다른 도구로 긁어서 정제한 흔적이 남아 있는 점이다.

 이 유적은 출토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후기∼말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최하층 채집패각에서 얻어진 2920±25B.P.의 방사선탄소연대로서도 방증된다.

바) 경상도 지방

(가) 부산 율리 바위그늘유적

 구포에서 북쪽으로 3㎞ 정도 떨어진 栗里마을 뒷골짜기 입구에 위치한 소규모 바위그늘유적이다.466) 이 패총은 약 200∼250㎝ 높이의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입구에 만들어진 깊이 2.8m, 높이 약 2m 정도의 바위그늘을 의지해서 만들어진 주거지와 패총의 복합유적이다. 유적의 크기는 암굴을 중심으로 그 안쪽과 약간 경사진 암굴 앞쪽의 9×8m 범위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층위는 표토층을 제외하고 3개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층위별 유물의 차이는 없었다. 암굴 내부에서는 서로 층위가 다른 화덕자리 3개가, 암굴 외부 동쪽에는 무덤 아니면 야외조리시설일 것으로 추정되는 둥근 돌무지유구(積石遺構) 4개가 발견되었다.

 출토유물은 토기·석기·장신구 등이며, 그 양은 많지 않았다. 토기는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편 2점, 무문토기편 1점 외에는 모두가 빗살무늬토기이다. 토기의 모양은 V자 혹은 U자형의 심발형이 대부분이고 그 밖에 호형토기 몇 점과 납작바닥토기(平底土器) 조각도 1점 있었다.

 심발형토기는 곧은아가리(直立口緣)와 겹아가리(二重口緣)의 두 종류가 있는데, 곧은아가리가 많았으며 무늬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무늬있는 것은 아주 적었다. 무늬의 종류는 빗금무늬(短斜線文)·빗점무늬(斜點列文)·격자무늬·점렬무늬 등이 있는데, 대부분 구연부 주위에만 시문되어 있고 시문수법도 조잡한 편이었다.

 석기는 갈아서 만든 도끼·화살촉·끌·바퀴날도끼(環狀石斧) 각 1점과 숫돌 3점이 있었으며, 그 밖에 滑石製 타원형 장신구 1점, 子安貝形 토제품 1점, 타원형 土板 2점도 각각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은 붉은간토기 등 신석기시대 후기의 것도 있지만, 신석기시대 말기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또 평저토기·마제석착·석촉 등 청동기시대의 것도 보인다.

 이 조개더미는 낙동강 하류에 위치하는 겹아가리토기의 표지적인 유적으로, 그 규모로 보아 바위그늘을 이용한 일시거주유적으로 추정되며, 부산지방에서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가 단절없이 연결되는 증거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생각된다.

(나) 부산 동삼동패총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750-1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패총이다. 이 패총은 남해안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여러 문화층이 겹쳐져 있어 우리 나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467)

 이 패총의 층위는 발굴자에 따라 3∼5개층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대개 층위는 표토층 밑에 2개의 패각층과 2∼3개의 혼패토층이 교대로 쌓여 총 5∼6개의 자연층위로 퇴적되어 있고, 이들은 3∼5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Ⅰ기는 平底太·細線隆起文土器, 豆粒文土器 등의 융기문계 토기가 대부분이며 석기는 박편찍개가 출토되었다.

 그 다음 Ⅱ기는 단도마연토기·융기문토기·두립문토기·압인문토기·침선문계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융기문이 극성을 이루고 영선동식의 압인문계어골문이 새로 등장하면서 집선문계의 서해안계통 빗살무늬토기가 조금씩 등장한다. 석기 및 골각기로는 이음식낚시·숫돌·박편찍개·자갈돌긁개·날부분만 마연한 도끼·뼈바늘 등이 출토되었다.

 Ⅲ기는 注口토기·指頭文토기·단도마연토기·태선침선문계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융기문토기가 거의 없어지고, 중·서부지방의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영향을 받은 태선침선문계토기가 크게 유행하다가 점차 변질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석기와 골각기로는 이음식낚시·긁개·숫돌·흑요석제석촉·마제석부·타제석부·뼈바늘 등이 출토되었다.

 마지막인 Ⅳ기는 Ⅲ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침선문의 퇴화현상이 더욱 뚜렷해지는 한편, 새로이 겹구연토기가 등장하고, 무늬없는 토기가 절대다수를 점하며 석기는 긁개·타제석부·흑요석제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외에 각 층에서는 끝이 뾰족한 尖頭器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골각기와 조개팔찌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패기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유구로는 화로자리와 분묘로 보이는 적석시설이 발견되었으며, 앞으로 패총 주변을 더 조사하면 이들의 마을도 확인될 가능성이 많다.

 이 패총에서는 40여 종의 조개류와 상어·참치·돔 등의 물고기류, 멧돼지·사슴·고래 등의 동물뼈 등 자연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그들의 경제활동과 당시의 자연환경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는 B.C.5000년에서 B.C.1510년까지인데, 이는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초기에서 말기까지의 연대이다. 따라서 이 유적은 우리 나라의 남해안지방 신석기시대 거의 전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의 내용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일본의 죠몬토기와 일본산 흑요석제 석기의 출토를 통해 일본과의 교역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삼동패총은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 내용과 인접문화와의 상호교류관계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지역과의 교류관계까지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라 하겠다.

(다) 부산 영선동패총

 부산시 영도구 瀛仙洞 1520번지 일대에 있었던 패총이나 지금은 완전히 소멸되었다.468) 이 조개더미는 신석기시대와 철기시대 두 시기의 유적이 겹쳐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순패각층의 두께는 50∼30㎝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토기를 비롯하여 석기·골각기·조개팔찌 등이 출토되었는데 토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무늬없는 토기도 약간 있지만 눌러찍은 아가리무늬계통의 빗살무늬가 주축이었다. 그릇의 형태는 목이 달린 단지와 깊은 사발모양의 것이 많으며 바닥은 전부 뾰족밑 또는 둥근밑이고 납짝밑은 보이지 않는다. 무늬는 덧무늬와 눌러찍은 무늬의 2종류가 있는데 모두 아가리 주변에만 새겨져 있다.

 덧무늬토기 가운데는 注口가 달리고 아가리 주변에 흙타래를 N자모양으로 이어붙인 깊은 사발모양의 토기가 특이하다(<보물 제597호>). 눌러찍은 무늬에는 작은 고기뼈모양의 무늬를 가지런하게 새긴 것과 또 새꼬막조개 따위를 눌러 새긴 지그재그모양의 무늬도 있다. 이들 토기에는 동삼동조개더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가리 위를 톱니바퀴처럼 자른 것도 발견되며 그 외에 아가리가 물결모양으로 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일본 죠몬토기에서도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석기는 깨뜨려서 만든 것과 부분적으로 갈아서 만든 돌도끼 몇 점이 있고, 뼈로 만든 첨두기 각 1점도 출토되었다. 자연유물로는 굴을 포함한 10종의 조개류와 바다표범 및 말뼈도 출토되었다.

 영선동조개더미는 대체로 동삼동조개더미의 5층과 비슷한 시기의 어느 한정된 기간 동안만 존속했던 유적으로 추정되며 특히 이 유적은 동해안계통의 눌러찍은 무늬토기의 표지적인 유적으로 볼 수 있어 주목된다.

 그러나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영선동출토 빗살무늬토기에는 전형적인 남해안식의 태선문계빗살무늬토기도 다수 보인다. 이 토기가 눌러찍은 무늬토기와 같은 곳에서 출토된 것인지, 아니면 전혀 별개의 유적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만약 알려진 영선동조개더미 출토품이라면, 이 유적의 하한은 동삼동조개더미의 4층단계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라) 부산 다대동패총

 부산시 사하구 多大洞의 다대포해수욕장 동쪽 끝부분인 몰운대 입구에 있었던 패총유적이다.469) 큰 태풍 때문에 대부분 파괴·소멸되었고, 유물은 부산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이 조개더미는 4개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유물이 나오는 층은 2·3층이었다. 2층에서는 철기시대 유물이, 3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각각 출토되었으며, 영선동조개더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기가 다른 2개의 조개더미가 한 곳에 중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은 토기류가 가장 많고 가락바퀴·흑요석제석기·돌망치 등이 있으며 또 일제 때 말안장모양의 갈돌 몇 점도 채집된 바 있다고 한다.

 토기류는 빗살무늬토기가 주류이고 그 외에 붉은 칠한 토기가 약간 보인다. 빗살무늬토기의 성격은 대개 동삼동패총의 3·4층과 비슷하며, 그 외에 덧무늬토기도 상당수 보인다.

 무늬는 몸통까지만 시문되어 있는데, 대부분 아가리무늬와 몸통무늬가 구분되고 있다. 대표적인 무늬는 동삼동조개더미와 마찬가지로 짧은 사선무늬와 고기뼈모양무늬가 복합된 것이며 모두 선이 굵은 전형적인 남해안식 태선침선문계무늬이다.

 출토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이 유적의 중심연대는 대개 남부지방의 신석기문화 중기에 해당하며 그 성격은 동삼동조개더미의 4층∼3층단계와 대체로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마) 부산 범방패총

 부산시 강서구 凡方洞 195∼211번지 일대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패총이다.

 낙동강 하류의 서쪽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김해 수가리패총과는 산등성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현재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많이 훼손되었으나 그래도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470) 확인된 자연퇴적층은 모두 24개층이었으나 크게 3개의 문화층으로 구분할 수 있었고, 출토유물은 토기류·석기류·골각기류 등 다양한 편이다.

 토기류는 隆起帶文토기·隆起線文토기·細格子沈線文토기·豆粒文토기·丹塗磨硏토기·彩文토기·刺突文토기·刺突系押引文토기·押引密集短斜線文토기·口脣刻目文토기·沈線文토기·退化沈線文토기·短斜線文토기·二重口緣토기 등이다. 우리 나라 남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전기간에 걸친 다양한 토기류가 망라되어 출토되었다. 기형은 碗形·壺形·鉢形·소형토기 등 다양하며 저부의 형태도 첨저·원저·평저·말각평저 등 다양한 편이다. 특히 신석기시대 전기의 토기인 융기문·세격자침선문·두립문·단도마연·지두문·자돌문·자돌계압인문·구순각목문토기 등이 층위별로 다량 출토되어 신석기시대 전기토기의 변화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석기류는 마제석부·타제석부·반월형석기·갈돌·갈판·敲石·砥石·흑요석제석촉·이음식낚시의 軸部·흑요석 박편 등이 출토되었다. 석부는 대부분 타제이며 날부분만 마연한 것도 있다. 반월형석기는 사암제로서 석재를 자르거나 홈을 만들 때 사용한 공구이다. 특히 이음식낚시는 제Ⅰ문화층에서만 출토되고 갈판은 제Ⅱ문화층에서 출토되어 식생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골각기류는 이음식낚시의 조침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단순한 모양인 첨두기뿐이다. 골각기 중에는 섬세한 사격자문이 시문된 것이 있는데, 이는 흑요석기를 이용하여 시문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외에 조개팔찌·어망추 등도 출토되었다.

 범방패총에서 조사된 유구는 분묘 1기, 원형노지 1기, 원형집석유구 7기이다. 분묘는 제Ⅰ-1문화층의 상부에서 검출되었는데 墓壙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아 간단한 토광묘로 추정된다. 출토된 인골의 상태는 불량하나 두개골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리를 X자형으로 하여 매장된 점이 특이하다. 유치가 빠지기 직전의 상태이므로 연령은 10세 전후로 추정되며 여성이다. 부장품으로 골각기 1점과 軟玉製頸飾 1점이 출토되었다. 원형노지와 원형집석유구는 직경 40∼60㎝ 정도이며 패각층 위나 주변에 인접하여 만들어졌는데 배치상태나 주변상황으로 보아 주거시설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어패류나 동물들을 요리하기 위한 야외조리시설물로 추정된다.

(바) 울산 신암리유적

 울산시 서생면 新岩里에는 4곳에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는데, 모두 포함층유적이다. 덧무늬토기유적인 1지구와 침선문토기유적인 2지구유적은 1974년에 조사하였다.471)

 제1지구유적의 층위는 표토층 밑에 5개의 퇴적층이 확인되었는데, 이 중 유물은 제3층의 바닥과 최하층인 제4층에서만 출토되었다. 그러나 출토유물의 성격은 층위별로 구분되지 않았고, 제4층에서 확인된 인공석렬과 관련지어 볼 때 제3층의 바닥은 당시의 생활면일 가능성이 많아 이 유적은 단일문화층유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유물은 토기 외에 토제품과 약간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대부분 덧무늬토기이나 이 밖에 침선문계토기와 무늬없는토기·단도마연토기 등이 약간 출토되었다. 기형은 구연이 직립·내경·외만하고 밑이 납작하거나 둥근 심발 또는 발형토기가 주류인 것 같고, 목이 달린 호와 몸통 중앙부가 꺾여 굴곡진 특이한 모양의 발도 보이며 밑바닥에 나뭇잎맥이 찍힌 것도 있다.

 석기는 조갯날 도끼와 납작한 편인 석부·숫돌·갈돌과 공이가 보이고, 그 외에 긁개·격지 등의 타제석기가 많다.

 이 유적은 덧무늬토기의 단일문화층유적으로 남해안지방의 초기 빗살무늬토기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사) 김해 농소리패총

 김해시 주촌면 農所里마을 뒷산인 삼매산 구릉의 동쪽 끝부분과 그 앞의 경작지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유적이다. 1964년에 일부를 발굴하였으나,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472)

 층위는 표토층(50㎝) 밑에 순패각층(Ⅱ, 50㎝ 내외), 부식토패각혼성층(Ⅲ, 30㎝), 점토패각혼성층(Ⅳ, 40㎝) 순으로 퇴적되어 있다. 유물은 Ⅲ·Ⅳ층에서 출토되고 있으나 시기가 같은 것으로 추정되며, 퇴적층의 두께에 비해 유물의 양은 빈약한 편이다.

 무늬가 없는 둥근밑의 빗살무늬토기와 겹아가리토기, 퇴화된 단사선문토기 외에 타제돌도끼·숫돌·석봉과 뼈로 만든 바늘 1점이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로 보아 신석기시대 말기의 단일시기 유적으로 생각된다.

(아) 김해 수가리패총

 가락에서 장유로 넘어가는 도로변의 왼쪽 佳洞마을 안에 있었으나 고속도로공사로 인해 1978∼9년에 발굴조사하여 지금은 없어졌다.473) 패총은 김해평야 쪽의 경사면 아랫부분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꽤 규모가 큰 유적이었다.

 층위는 표토층 밑에 6개의 자연층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3개의 순패각층과 3개의 부식토층이 교대로 퇴적되어 있었다. 퇴적층의 두께는 115㎝∼205㎝ 정도이다.

 유물은 토기·석기·골각기 외에 자연유물들이 출토되었지만, 그 양은 유적의 규모와 퇴적층의 두께에 비해 빈약한 편이었다. 이 유적은 빗살무늬토기의 변화를 통해, 아가리 주변에만 시문된 압인문계통의 토기와 두 가지 이상의 무늬가 복합되어 전면에 시문된 전형적인 남해안식의 태선침선문계토기가 출토된 수가리 Ⅰ기(Ⅴ·Ⅵ층), 아가리와 몸통에 격자문과 삼각집선문이 시문된 토기가 출토되는 수가리 Ⅱ기(Ⅳ·Ⅵ층), 둥근밑의 겹아가리와 아가리 주변에 퇴화된 단사선문이 시문된 토기가 출토되는 수가리 Ⅲ기(Ⅰ·Ⅱ층) 등 3개의 문화층으로 구분이 가능하였다.

 남해안식의 태선침선문토기가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적 중의 하나로, Ⅰ기는 남해안 신석기시대 중기, Ⅱ기는 후기, Ⅲ기는 말기로 각각 추정할 수 있었다. 층위가 뚜렷하고, 층위별 토기의 변화도 비교적 분명하여 전형적인 남해안식 태선침선문토기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지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자) 통영 연대도패총

 통영시 산양면 煙臺島의 동북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조개더미유적이다. 1988년부터 3차례 발굴되었다.474) 층위는 7개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경작토 밑의 2·3층에서는 조선·고려·삼국시대의 토기와 자기가 나오며, 4층에서 7층까지는 신석기시대의 문화층인데 검은흙층·자갈층·조가비층·황갈색찰흙층이 차례로 퇴적되어 있고 5∼6층에서는 신석기시대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토기는 맨 아래층에서 덧무늬토기, 그 위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덧무늬토기가, 또 그 위층에서는 단사선문토기가 나오는 등 신석기시대 여러 시기의 토기들이 층위별로 구분되어 출토되고 있었다. 석기로는 돌도끼종류가 가장 많고, 이음식낚시·그물추·흑요석제화살촉·숫돌, 그 밖에 긁개 등 다종다양하다. 이 곳에서도 욕지도와 마찬가지로 혼펠스계통의 석기(도끼)가 많이 나온다. 골각기로는 낚싯바늘·찌르개 외에 조가비팔찌들이 나오고 있다.

 신석기시대 무덤구조를 알려주는 돌무지시설과 사람뼈가 여러 몸체분 나왔고 오른쪽 팔에 조가비팔찌가 채워진 것과 발목에 동물이빨로 만든 발찌가 채워진 채로 발굴된 것도 있었다. 한 개의 무덤 안에서 여러 사람의 뼈가 나와 모듬무덤도 있었음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사람뼈화석은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체질연구에 도움을 주며 여러 사람의 귓속 소라뼈가 물렁뼈에 의해 반쯤 닫혀 있는 점으로 보아 바다밑까지 잠수하여 어물잡이를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적에서는 토기·석기·골각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비교적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그 중 흑요석제석기가 많았는데, 그 원료는 국내의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또 토기와 석기 가운데 일본에서만 출토되는 종류도 있어 이 시기에 두 지역의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차) 통영 상노대도 상리패총

 上老大島의 남쪽에 있는 상리마을 중앙의 비스듬한 감귤나무밭에 남아 있는 유적으로 1984년에 발굴되었다.475)

 층위는 경작층 밑에 모두 10개의 자연층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Ⅱ·Ⅳ·Ⅵ·Ⅶ·Ⅷ층이 패각층이고, Ⅰ·Ⅲ·Ⅴ는 부식토층이며 Ⅸ층은 사질진흙층, Ⅹ층은 암반층이다. 발굴자는 당초 이를 4개의 문화층 Ⅰ(Ⅸ·Ⅹ층), Ⅱ(Ⅶ·Ⅷ층), Ⅲ(Ⅴ·Ⅵ층), Ⅳ(Ⅰ·Ⅱ·Ⅲ·Ⅳ층)으로 구분하였지만 최근에는 다시 초기·중기·후기의 3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초기(9·8·7·6층)의 토기는 무늬없는 것과 덧무늬가 주체를 이루나, 8·7·6층으로 갈수록 어골문·점렬문 등 압인문계통의 무늬가 많아지고 있다. 석기는 타제석기가 많은데, 9층에서는 사냥용이 많으나 7·6층으로 갈수록 긁개·자르개·밀개 등이 늘어나며 송곳·찌르개 등 골각기도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전기(5층)의 토기는 덧무늬토기도 출토되지만 촘촘하게 찍은 무늬가 주체를 이룬다. 석기의 갖춤새가 다양해지며 뗀석기의 비중이 줄어들었고 삿바늘·뼈송곳·찌르개·새기개 등의 골각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낚싯바늘 등 낚시도구가 증가되고 있어 주목되었다. 이전시기와는 달리 모든 유물의 질과 양이 확대되고 있으며 이 시기의 방사성탄소연대는 6,430±180BP이었다.

 후기(4·3·2층)의 토기는 모래질태토의 이중구연토기가 주체이고, 석기는 간석기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골각기도 낚싯바늘·바늘·송곳·찌르개·새기개 등 다양하고 출토량도 많았다. 이 층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는 3,430±60BP이었다.

 이 유적은 남해안의 전형적인 태선침선문계토기의 출토량이 아주 적은 것으로 보아 중기 신석기시대는 공백기였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최하층에서 토기가 출토되지 않고 타제석기만 출토되어 중석기문화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주목된다.

(카) 통영 욕지도패총

 통영군 욕지면 동항리(欲知島)의 한전욕지출장소 자리에 있었던 패총이다.476) 전체 5개의 층위 가운데 유물포함층은 2·3층이며 2층의 아랫부분이 조가비층이다. 2층과 3층의 돌무지시설들은 ‘석기제작소 혹은 임시주거지’로 추정되었으며, 2층에서 3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Ⅰ층(표토층)까지 포함하여 3개의 층에서 덧무늬토기부터 이중구연토기까지 모두 나오고 있어 교란이 심한 편이나 대체로 아래층인 3층에서 덧무늬토기의 출토빈도가 높았다. 2층에서는 덧무늬·찍은무늬와 새김무늬가 나오며 납작밑·둥근밑의 목단지와 손잡이 등이 나와 토기모양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석기는 양도 많고 다양하다. 화살촉(흑요석제 포함)·작살·긁개, Hornfels로 만든 도끼·끌·자귀 등이 많다. 골각기로는 사슴뼈 찌르개가 많고 낚싯바늘·화살촉·작살·조가비팔찌 등도 보인다.

 이 유적은 층위상으로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덧무늬토기·압인문계토기·남해안식의 태선침선문토기·이중구연토기 등이 출토되고 있어 남해안 지방의 신석기시대 전시기에 걸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3기의 무덤과 인골이 확인되어 자료가 거의 없는 이 시대의 묘제와 사람들의 체질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타) 사천 구평리패총

 사천시 서포면 舊坪里에 있는 조개더미유적으로, 1967년에 발굴되었다.477) 4개의 퇴적층 가운데 3층은 순패각층이며, 1·2층은 부식토층, 4층은 찰흙층인데 비문화층이다. 유물은 1층에서 가장 많고 아래로 갈수록 양이 적었다.

 유물은 토기 외에 격지·숫돌·끌 등의 석기와 뼈낚싯바늘·뼈바늘·조개팔찌 등이 출토되었다. 가장 양이 많은 토기는 모래질태도에 퇴화단사선문과 격자문 등이 조잡하게 시문된 빗살문토기와 이중구연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특히 杯身 주변에 돌아가면서 두 겹의 지그재그무늬가 새겨진 高杯形 토기가 주목된다.

 이 패총은 출토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남해안의 신석기시대 말기에 해당하며 그 성격은 부산의 율리·암남동, 김해 농소리패총 등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파) 거창 임불리유적

 남상면 壬佛里의 黃江가에 형성된 충적대지의 돌출부에 위치하는 포함층 유적인데, 1987∼88년에 발굴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 유구로 주거지 4동, 토광 3기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竪穴과 柱穴 등이 조사되었는데, 강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강물의 범람으로 인해 층위는 많이 교란된 것 같았다.478)

 주거지는 길이가 200∼390㎝ 정도의 소형이며 평면형태는 장타원형과 말각방형 등 두 종류가 있다. 토광은 대체로 규모가 작은 것들인데, 옥외시설물의 일종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물은 토기로는 융기문토기·빗살무늬토기·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석기로는 세석기류와 타제석기 및 마제석기가 출토되었다. 융기문토기는 가운데 노지가 있는 원형의 수혈유구에서 단도마연토기편들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경남 내륙지방에서는 최초의 예로서 주목된다. 빗살무늬토기는 深鉢 내지 鉢形토기류인데 저부는 원저가 주류이나 평저도 있다. 구연부는 직립한 것, 내만한 것, 외반한 것 등이 있고, 태토는 사질성과 점토성의 두 종류가 보인다.

 무늬는 모두 구연부 끝에 2∼3㎝ 정도의 공백을 두고 주로 몸통부에만 시문한 듯한데, 그 종류는 집선문·어골문·사격자문·단사선문·퇴화단사선문·장사선문·점렬문 등이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성격은 봉계리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하) 합천 봉계리유적

 鳳溪里 梧林마을의 중심부에 있었던 대규모 마을유적인데, 1987∼88년 사이에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황강유역에 형성된 충적대지의 하안단구의 선단부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 13동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3동 등이 조사되었다.479) 층위는 표토층 밑에 2개의 황색사질토층과 그 사이에 있는 제3층인 흑갈색사질토층 및 최하층인 자갈층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두께 20㎝ 정도의 제3층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적이 사구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홍수·개간·고분축조·택지조성 등으로 인해 유물이 뒤섞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석기시대 주거지는 평균 직경이 4m 전후이고 평면형태는 모두 원형에 가깝다. 내부시설로는 돌출하는 출입구시설을 별도로 갖춘 것도 있고, 바닥 중앙이나 한쪽으로 치우쳐 노지시설을 갖춘 것도 있다. 그 외에 주거지에 인접한 곳이나 주거지의 내부 바닥을 오목하게 파서 설치한 저장공도 있었다. 바닥은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은 생토면 그대로이나, 많이 다져져서 단단하였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 외에 타제 및 마제석기와 약간의 자연유물이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심발 또는 발형토기가 대부분이고 호형토기도 약간 보이며, 구연부형태는 직립·외반·이중구연 등이 있는데 외반구연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태토는 사질과 점토질의 두 종류인데, 대부분 고운 모래가 많이 섞여 있고 운모와 장석이 약간씩 섞여 있는 것도 일부 있다. 무늬는 구연부 끝에서 곧바로 시문한 것과 구연부에서 2∼3㎝ 정도를 뗀 후 시문한 것의 두 종류가 있는데 후자의 것이 남부 내륙지역 빗살무늬토기의 한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무늬는 시문수법에 따라 단사선문·조형문 등의 압인문계, 점렬문·죽관문 등의 자돌문계, 집선문·사격자문 등의 침선문계, 장사선문·단사선문·거치문 등의 퇴화침선문계 등 4계통으로 나뉘어진다. 석기는 타제박편석기가 대부분이며 몸돌석기와 국부마연석기도 약간 보인다.

 자연유물로는 제9호 주거지의 저장혈에서 출토된 탄화된 도토리와 호도가 있는데, 당시의 식생활연구자료와 C14연대측정의 시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주거지시설과 함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남부내륙지방의 신석기문화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갸) 금릉 송죽리유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고목마을에 있었던 포함층유적인데, 1991∼92년 사이에 발굴되었다. 유적은 낙동강 지류인 甘川변의 충적대지에 형성되어 있었는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구와 유물들이 지역과 층위를 달리하여 확인되었다. 신석기시대 유구로는 수혈주거지와 야외노지·토기요지·석기제작장 등이 조사되었고, 유물은 빗살무늬토기와 석촉·석부·보습·갈돌·망추 등의 석기류가 출토되었다.480)

 주거지는 대형의 말각장방형주거지 9동과 소형의 원형주거지 1동 등 모두 10동이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내부 중앙에는 방형의 불땐 자리가 있고, 또 원형 또는 타원형의 내부저장혈과 규모가 큰 타원형의 외부저장혈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장축방향은 주거지와 같았다. 야외노지는 수혈주거지의 바깥에서 모두 15개가 조사되었다. 땅을 둥글게 파내고 납작한 냇돌을 깔거나 둘레에 돌을 돌린 것으로 직경 1m 내외의 원형이다.

 토기요지로 추정되는 시설은 주거지의 분포지역에서 떨어진 북쪽에서 확인되었는데, 평면원형이며 규모는 지름 4.5∼3.0m, 깊이 20∼30㎝이다.

 석기제작장은 가운데에 대석과 깨어진 커다란 혼펠스 원석이 있고 그 주변에는 미완성 석기 2점과 수백점의 크고 작은 박편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 범위는 직경 5m 정도이다.

 토기류의 기형은 바리형(鉢形)과 항아리형(壺形) 그리고 일부 특이형토기가 있다. 발형토기는 대다수가 밑이 뾰족하거나 둥근 V자형인데, 심발형과 천발형 2종류가 있다. 그리고 완만한 평저토기도 약간 있으며,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표면에 붉은 흙을 바른 대형홍도도 있었다. 호형토기는 장경호와 단경호 및 목이 없이 양쪽에 귀가 달린 兩耳小壺가 있는데, 대다수가 밑이 둥근 것이지만 일부 편평한 것도 있으며 규모는 크지가 않았다.

 무늬는 시문구로 긋거나 찍은 것인데 그은 무늬에는 굵은 선과 가는 선이 있다. 능형집선문·밀집횡선문·파상문·之字文·꿰맨무늬 등이 단독 또는 복합시문되었다.

 이 유적은 토기로 보아 남부지방의 신석기시대 전기에서 후기에 걸친 것으로 생각되는데, 경북 내륙지방에서 발견된 가장 큰 규모의 생활유적으로, 유물의 성격이 내륙적인 특징을 보이는 동시에 남해안지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냐) 청도 오진리유적

 청도군 운문면 梧津里의 운문천변에 있는 바위그늘유적이다. 운문댐공사 때문에 1993년 발굴되었다. 바위그늘의 규모는 높이 2.5m, 너비 15.5m, 깊이 평균 3.5m이며 퇴적층은 4개층으로 형성되어 있었다.481)

 1층에서는 신석기 말기의 이중구연토기,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2층에서는 이중구연토기와 퇴화침선문 등의 빗살문토기와 돌도끼·박편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으며 이 층을 파고 주거지가 설치되었다. 3층에서는 융기문토기·압인문계토기·태선침선문계토기 등 연대적으로 격차가 있는 토기들이 함께 출토되었고, 돌도끼와 자갈돌로 만든 그물추도 많이 출토되었다. 4층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무질서하고 조잡하게 무늬가 새겨진 질이 거친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외에 1층을 파고 수혈주거지 1동이 설치되었고, 그 내부에서는 노지 2개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조기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전시기의 유물이 모두 출토되고 있으며, 특히 최하층인 4층에서 출토된 무질서하고 조잡한 무늬의 빗살무늬토기가 주목되는데, 이 토기가 우리 나라의 신석기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토기의 한 종류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경북 내륙지방에 위치하는 작은 규모의 유적이지만 토기 등 유물의 성격이 남해안지방의 그것과 비슷하여 두 지역간의 교류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댜) 울진 후포리유적

 울진군 후포면 厚浦里의 등대산 정상부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분묘유적이다. 1983년 발굴되었다.482)

 유구는 바닷가에 면한 산꼭대기의 자연적인 구덩이(동서 4.5m, 남북 3.5m)를 이용한 집단묘지이다. 구덩이 내부에 洗骨한 인골을 다발로 모으고, 그 위에 석부로 인골을 덮은 것처럼 보이며, 인골매장은 하부에서 상부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데 최소한 40인 이상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모두 석제품인데 석부가 180점으로 가장 많고, 그 외에 石製垂飾과 管玉 각 2점이 출토되었다. 석부는 전면을 곱게 마연하여 제작한 장대형 석부가 주류이다. 토기가 출토되지 않아 이 유적의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발굴자들은 신석기시대의 후기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유적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확인된 매장유적으로서 신석기시대의 세골장풍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동시에 경북 동해안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주목된다.

사) 강원도지방

(가) 양양 오산리유적

 양양군 손양면 鰲山里에 있는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포함층 및 주거지유적으로, 1980∼87년 사이에 3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라고 불리는 자연호숫가의 사구 위에 형성되어 있는데, 유적의 범위는 약 6,000㎡로 추정되며 이 중 600㎡를 발굴하였다.483) 현재의 지표면으로부터 생토면까지의 깊이는 약 4.5m인데 모두 6개의 자연층위가 확인되었다.

 Ⅰ층은 청동기시대층으로 암황갈색점토층인데 두께는 약 40㎝이다. 유물은 무문토기·점토대토기·우각형손잡이 등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상층인 Ⅱ층은 암갈색사질층으로 두께는 20∼65㎝이다. 여기에서는 서해안지역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형태인 첨저형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무늬는 구연부와 기복부에 걸쳐 시문한 것이 많은데 구연부와 기복부무늬를 구분하여 시문한 경우는,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사격자문·조대문 등으로, 기복부에는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많다. 구연부와 기복부에 같은 무늬를 시문한 경우는 어골문이 주체를 이루고 있다. 반출된 석기 중에는 납작한 강자갈의 양끝을 쪼아내어 만든 어망추가 있다. 이렇듯 토기·석기의 여러 특징에는 서해안과 공통점이 있다.

 신석기시대 중층인 Ⅲ층은 암갈색사질층으로 두께는 약 30㎝이다. Ⅱ층과는 두께 약 5㎝의 흑색사질의 간층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에 있다. 토기의 기형은 예외없이 평저형인데, 저부에는 나뭇잎모양이 찍혀 있는 것이 많다. 이들 토기에는 무늬가 있는 토기와 없는 토기의 두 종류가 있으나 후자가 수적으로 많다. 무늬가 있는 토기편 중에는 동부지역 토기류와 유사한 것이 있으며, 이 토기와 함께 점토제 얼굴조각품 한 개가 채집되었다.

 신석기시대 하층인 V층에서는 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지름 6m 정도의 원형주거지 안에는 70×70㎝ 규모의 사각형 노지가 한두 개씩 있고, 다수의 평저형토기 및 소량의 융기선문토기, 그리고 돌로 만든 생활도구류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모두 평저인데 좁은 저부에 비하여 몸체부분이 넓은 발형토기가 대부분이나, 옹형 또는 호형의 토기도 있으며 시문은 구연부 주위에 국한하였다. 무늬의 시문수법은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압날문의 경우 점무늬가, 음각문의 경우 종위평행단선문이, 압날문과 음각문이 혼합된 경우 이들 두 무늬 요소의 결합형태가 각각 주체를 이루고 있다. 토기의 표면은 마연되어 광택이 난다. 석기로는 이음식낚싯바늘·톱·사각형석도·흑요석인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어업관련도구들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어업에 크게 비중을 둔 생활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다. V층에서 채집된 목탄으로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이제껏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 가장 오랜 연대인 B.C.6000∼5000년 사이로 나왔다.

 한편 이 곳에서 출토된 흑요석을 형광X선으로 분석한 결과 그 원석의 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져 그 곳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층서관계·출토유물·방사성연대측정결과 등을 통하여 오산리신석기 하층(V층)은 우리 나라 최고의 신석기문화단계임이 밝혀졌다. 또한 동한평저유형토기문화가 서한첨저유형토기문화에 선행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우리 나라 신석기문화의 기원 및 주변지역과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좋은 단서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 강릉 영진리유적

 주문진 남쪽 3㎞ 지점의 옛 동해북부선과 도로가 서로 마주치는 지점에 있는 포함층유적이다. 여기서 해안까지는 약 700m이고 유적의 규모는 100×50m이다. 유물은 지표하 40∼60㎝까지의 깊이에서 출토되었다.484)

 여기서는 다량의 빗살무늬토기편과 마제석부 1점, 石英製刃器 2점, 砂岩製刃器 2점, 골편 1점이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의 태토는 점토질이고 구연부는 대개가 직립하였고 밑은 둥글거나 뾰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늬는 구연부에는 단사선문과 점렬문이, 몸통에는 횡주어골문과 사격자문이 주로 시문되어 있고, 그 외에 절반으로 자른 죽관문과 유엽형각문이 시문된 것도 보인다. 또 사격자문과 어골문이 그릇 전면에 시문된 것과 사선방향이 변화되면서 능형의 무문양대를 남기는 토기편도 출토되었다.

(다) 춘천 내평리유적

 춘천시 북사면 內坪里 일대에 있었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및 분묘유적이다. 이 곳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돌깐집터,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석관묘 등이 조사되었다.485) 돌깐집터는 동서 길이 12.3m, 남북 너비 4m의 타원형으로 황갈색사질토 위에 돌이 깔려 있었는데, 일부는 깎여 나가거나 교란되어 있었다. 깐돌을 들어낸 내부에 화덕 흔적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천시 강화군 삼거리, 대동군 청호리 등지에서 발견된 돌깐집터와 같은 유형으로 생각된다. 이 움집터의 주위에서 약 11개의 노천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깔린돌 사이사이와 화덕자리 주위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무늬나 바탕흙으로 보아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시대 말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태토는 사질토에 모래를 섞은 것과 점토에 모래를 섞은 것이 있으며, 기형은 구연부가 직립하거나 약간 외반하고 저부는 둥글거나 뾰족하다. 무늬는 구연부에서 몸통까지만 시문하고 저부는 무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구연부·몸통 구분하지 않고 같은 무늬를 시문하고 있다. 무늬는 사교집선문·종주어골문·죽관문·능형문, 융기대와 결합된 단사선문·공렬문 등이 보인다. 석기는 석부·숫돌 등으로 출토량이 매우 적다.

 내평유적은 빗살무늬토기의 특징으로 보아 암사동의 윗 문화층, 시도1지구 등 서해 도서지방의 패총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비숫하며, 그 시기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유적은 서해안의 후기 빗살무늬토기문화가 한강을 따라 북상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라) 춘천 교동유적

 춘천시 교동의 봉의산 경사면에 있는 신석기시대 후기의 동굴집터 및 매장지유적이다.486)

 동굴은 풍화암벽을 파 들어간 인공동굴로 평면지름 4m, 높이 2.1m의 원형이고, 서쪽은 바닥이 높아지면서 위로 올라가는 돌출부가 있는데 저장고로 생각된다. 이 굴이 주거굴이었음은 천장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던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동굴 안에서 발은 굴의 중심부로, 머리는 벽쪽으로 하여 방사상으로 눕혀진 인골 3구가 매장되어 있었는데, 인골 옆에서 부장품으로 매납된 대형 돌도끼, 납작자귀날 돌도끼 5점, 슴베있는 삼각형 돌활촉 1점, 돌망치 1점, 삼각도형 석기, 돌칼 1점, 흰마노제 대롱옥 1점, 납작바닥토기 5점 등이 발견되었다.

 토기들은 아가리가 약간 오므라든 단지형이면서 밖으로 벌어진 짧은 목이 달린 것, 그리고 두 어깨에 고리손잡이가 달린 것이 각 한 개씩 있으며, 네 개는 아가리에서 어깨에 걸쳐 점줄아가리무늬가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는 이와 같은 교동유적의 유물이 북한의 신석기 및 민무늬토기문화의 요소가 반영되고 있으며, 이 문화가 한강 중류에 있으므로 이 유적의 토기가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아 왔다.

 그러나 최근 오산리유적이 조사되고 나서는 토기 중에서 무늬의 유형·시문기법·기형·태토·정면수법·구연과 구순의 끝마무리기법 등이 서로 같거나 유사하며, 또 특징적인 이음식낚싯바늘이 모두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 유적의 연대가 신석기시대 전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아) 함경도와 양강도지방

(가) 신포 강상리유적

 신포시 胡滿浦 호숫가의 사구 일대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포함층유적이다.487) 모래층 30㎝ 밑에서 나타난 약 30㎝ 두께의 검은 모래층이 문화층이었다. 이 곳에서 채집된 유물은 도끼·밧돌·활촉·흑요석제의 타제석기편 등 석기류 외에 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채색토기 등의 토기류와 토제방추차가 있었다.

 토기의 종류는 배뚜리·단지·대접·보시기·목있는단지·손잡이달린그릇 등이 있으며, 그릇 밑창은 둥근 것과 납작한 것이 있다.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것은 대체로 둥근밑이고, 통이 깊은 것은 납작밑이다.

 이 유적의 빗살무늬그릇에는 무늬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의 2종류가 있다. 빗살무늬는 그릇의 윗부분에만 시문하였는데, 시문수법에 따라 시문구를 굴리거나 눌러서 새긴 무늬, 침선무늬, 침선무늬와 누른무늬를 복합한 무늬 등으로 구분된다. 굴리거나 눌러 새긴 무늬에는 점선물결무늬·점삿자리무늬·곧은점선무늬·점사선띠무늬·점선능형무늬 등이 있고, 침선무늬에는 어골문·사선띠문·번개문 등이 있으며, 침선무늬와 누른무늬가 복합된 것으로는 점선무늬와 어골문이 결합된 것·손톱무늬와 사선띠무늬가 결합된 것·점선어골문과 침선어골문이 결합된 것 등이 있다.

 이 강상리유적 빗살무늬토기의 특징은 침선무늬는 극히 적고 대부분 굴리거나 눌러서 새긴 무늬라는 점인데, 특히 그 중에서도 압도적 다수는 톱니바퀴모양의 시문구로 굴려서 새긴 무늬들이다. 이런 장식수법은 서포항 유형의 무늬수법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그러나 무늬를 누르거나 굴려서 새기는 수법은 이미 서포항 2기층과 3기층출토 토기들 중에 보이고 있어 두 유적이 상호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동해안 일대에서 B.C.3000년대 이후 시기부터 등장하는 타래무늬나 번개무늬가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강상리유적은 동해안지역에서 타래무늬나 번개무늬가 등장하기 이전에 형성된 유적임을 알 수 있고, 그 시기는 서포항 3기층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강상리유적의 독특한 빗살무늬토기문화는 주변의 일정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조사자들은 함경남도 일대에 고유한 특징을 가진 하나의 지역적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 어랑 용평리유적

 용평리의 장연호 호숫가에 위치한 신석기시대의 포함층유적이다.488)

 유적은 수로공사에 의하여 파괴되어 문화층이 드러나 있었는데, 층위는 20∼30㎝의 표토층 밑에 40∼50㎝ 두께로 검은 점토에 유물과 숯, 재가 섞인 문화층이 퇴적되어 있었으며, 여기에서 토기조각과 석기들이 채집되었다. 채집된 10여 점의 토기조각은 모두 적갈색의 빗살무늬토기로 기형은 구연부 아래에 목이 잘록하고 배가 부르며 밑이 납작한 단지이다. 토기 위쪽에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눌러 찍은 방형 혹은 장방형의 점렬문이다. 이러한 무늬는 서포항유적에서도 보이고 있다.

 석기로는 단면이 타원형인 돌도끼·자귀, 날부분에 깊은 홈이 팬 끌과 날의 자른 면이 마름모꼴이고 뿌리 쪽으로 잘록하게 허리가 만들어져 있는 창과 칼이 채집되었다. 토기무늬와 석기의 형태로 보아 이 유적은 신석기시대 말기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다) 경성 원수대유적

 농포유적에서 서남쪽으로 3㎞ 정도 거리에 있는 梧村江 하구의 해발 약 5m의 낮은 골짜기에 형성된 패총유적이다.489) 층위는 30㎝ 정도의 표토층 아래 유물포함층이 40㎝ 정도에 이르는데, 조개껍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유물은 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채색토기 외에 석기류, 貝製品과 자연유물이 채집되었다. 주류를 이루는 빗살무늬계통 토기는 황갈색과 회흑색이 많고 회백색과 적갈색이 다음으로 많다. 바탕흙은 고운 점토를 사용하였고 매우 가는 모래알이 섞여 있으며 운모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릇의 형태로는 원통형·항아리형·깊은바리형·바리형·사발형 등 다양하였고, 바닥이 납작한 것 일색인데, 그 중 10% 정도는 올림바닥이며, 아가리부분은 직립아가리가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가장 특징적인 무늬는 2조의 평행선으로 직선적인 번개무늬띠를 가로로 연속하여 돌리고 그 안이나 밖을 점 혹은 평행선으로 채운 것인데, 이는 동북지방 특유의 무늬이다. 이런 경우에는 무늬가 전면에 시문되지 않고 몸통부에만 무늬띠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 밖에 뾰족한 무늬새기개로 여러 줄의 물결횡선문을 그리거나, 옆으로 돌려진 어골무늬·점줄무늬·손톱무늬·빗금무늬 등이 있다. 이 밖에 가락바퀴가 발견되었는데, 주판알의 하반부 2분의 1을 잘라낸 듯한 형태에 주위에 연호문을 새겼다. 또 네모난 토기편 양쪽에 홈을 내어 만든 그물추도 있었다.

 석기로는 뗀석기와 간석기가 모두 출토되었으나 전자가 대부분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흑요석제가 우세하다. 간석기로는 돌도끼 1점, 숫돌편 3점, 석영제 공이가 1점뿐이고, 뗀석기로는 형태가 다양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흑요석제의 돌날·격지·송곳 등이 있으며, 날이 톱날처럼 요철이 있는 것도 있다. 모두 실용품이지만 무기류는 보이지 않는다. 장식품으로는 지름 3.2㎝ 정도의 납석제 돌고리가 있으며, 이 밖에 탄화된 만주호두가 많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가축화된 중간 크기의 개뼈가 나왔으며 줄무늬밤조개로 만든 고리도 1점 발견되었고, 또 농경의 존재를 말해주는 가리비로 만든 반달모양의 돌칼파편과 기타 노루의 발등뼈로 만든 토기무늬새기개도 발견되었다.

 원수대와 성격을 같이하는 유적은 농포패총, 검은개봉, 웅기 서포항 Ⅳ·Ⅴ기, 송평동 등이 있는데, 이 유적들은 회령군·경성군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함북지방 특유의 빗살무늬토기유적으로서, 연해주의 신석기시대의 유적인 Zaisanovka Ⅰ기 및 만주 일대의 유적들과 같은 문화영역에 속한다. 부근유적인 농포패총은 이 유적과 문화내용이 거의 같고 지리적으로도 아주 가까운데, 원수대의 경우 그릇의 종류가 줄어들고 무늬가 간략화되는 점 등으로 보아 농포유적보다 약간 늦은 듯하다. 또한 농포에서 많이 보이는 뼈뿔연장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이 유적은 신석기시대 말기의 것으로, 이 시기에는 이미 만주로부터 채도와 농경이 한반도에 전해져 본격적인 농경이 이루어졌으며, 반달돌칼·납작밑토기·번개무늬토기 같은 요소들이 보이고 있어 그 연대는 대체로 서기전 2000년대로 간주되고 있다.

(라) 청진 농포동유적

 청진평야의 서쪽 끝 康德 뒷산의 높이 약 30m 정도인 작은 구릉의 북쪽 경사면과 남쪽 경사면에 형성되어 있는 유물포함층유적이다.490) 1956년에 4개 지점을 발굴하였는데, D지점 1곳만 교란되지 않은 패총유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흘러내려 쌓인 교란층이다.

 유물로는 흑요석제의 타제석기가 가장 많으며 마제석기는 극히 적어 석부·석촉 등 몇 점뿐이다. 출토유물 가운데 석촉류의 수렵도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 등과 토제품·골각기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흑요석기는 搔器를 비롯한 찔개·조각칼·삼각형창끝도 있고, 刃部가 칼날 같은 것, 톱날 같은 것 등 석인을 가공한 석기가 많다. 골각기류는 첨두기가 대부분이며 종류는 바늘·송곳·작살·이음식낚시 등의 突刺用漁具類와 멧돼지이빨로 만든 토기시문구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토제품으로는 방추차와 어망추가 대부분이며 토제인형과 개와 같은 동물의 彫塑品도 발견되었다. 토기류는 약간의 민무늬토기와 채문토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빗살무늬토기계통의 것이다. 빗살무늬토기의 저부는 모두 평저인데 간혹 굽이 있는 것도 보인다. 토기종류로는 壺·甕·鉢·盞·접시 등 다양하다. 대부분이 구연부에서 약간 사이를 띄우고 기복부 상단 쪽에 가로로 무늬띠를 돌린 것이 공통되는 점이다.

 출토유물을 통하여 이 유적의 성격을 살펴보면, 검은개봉·삼봉·원수대유적 등과 함께 뇌문을 비롯한 횡대문토기·골각기·타제석촉 등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방의 전형적인 중기 빗살무늬토기유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적은 연해주지역과 중국 흑룡강성지역의 昻昻溪유적에도 분포되어 있어 이 일대가 같은 문화권이었음이 확실하다. 유적의 연대에 대하여서는 다른 학설이 많으나 서포항유적 4·5기층에서 이러한 뇌문토기가 처음 보이고 있고, 토기에서 구연부의 무늬가 소멸되는 점 등으로 보아 서기전 2000년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마) 웅기 송평동·용수동 유적

 이 유적은 웅기 서쪽에 있는 龍水湖 동안의 낮은 모래구릉지 일대의 여러 곳에 포함층과 패총이 점점이 분포하고 있다.491)

 송평동유적의 층위는 표면의 담흑색부식토층 다음에 패각을 포함한 흑갈색층이 있고 그 밑에 흑색층이 있는데, 이 흑색층 가장 아래층에서 노지와 온돌지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발굴기록에 의하면 동일유적내에서 빗살무늬토기는 무문토기와는 포함지역을 달리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빗살무늬토기의 형태는 구연이 가볍게 외반한 평저원통형토기이며 무늬띠를 돌린 것이 대부분이고 작은 자돌점문과 회령부근에서 유행하는 깊고 큰 자돌점문 외에 단사선문도 있다. 몸통의 무늬로는 침선어골문이 많다.

 용수동에서는 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각선문토기·채색토기 외에 밧돌·흑요석제석기·활촉·창끝·갈돌·고석 등의 석기와 골촉·골검·송곳 등의 뼈연장, 석제방추차 등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또 이 유적에서는 유물이 부장된 東枕仰臥伸展葬의 분묘 14기가 확인되었다.

(바) 선봉 서포항동유적

 이 유적은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의 西浦項洞마을 동북쪽 산기슭에 위치한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5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문화층 2개, 신석기시대의 문화층 5개, 청동기시대의 문화층 2개 등 시기를 달리하여 퇴적된 9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492) 이 중 신석기시대의 문화층에서는 움집터의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조개더미유적의 1기층에서 1기, 2기층에서 4기, 3기층에서 9기, 4기층에서 5기, 5기층에서 2기 등 모두 21기가 조사되었다.

 유물로는 1기층에서 빗으로 찍어 넣은 점무늬가 몸통의 윗부분에 들어 있는 납작밑토기가, 괭이·화살촉·칼·긁개·어망추·망치 등의 석기, 창·작살·장신구 등의 골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2기층에서는 1기층과 마찬가지로 모두 납작밑의 토기이나 새로이 줄무늬가 들어 있는 것이 출토되었고 아가리가 약간 바라진 것이 보인다. 새로운 기형으로 잔과 대접이 만들어졌다. 석기와 골기는 대체로 1기층과 유사하나 종류가 약간 증가하였다. 3기층에서는 토기의 형태 및 문양이 다양해졌는데 능형문·원형문·손톱문·톱날문·渦文 등이 보이고 아가리 주변에 점토띠를 덧붙인 것도 있다. 각암제석기가 사라지고 대신 흑요석제석기가 등장하고 있다. 원추형·주산알모양의 토제방추차가 새로이 나타나며 강아지·뱀·여자를 조각한 예술품과 여러 가지의 장신구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4기층에서는 토기의 무늬에 와문이 없어지고 번개무늬가 출현하고 민무늬토기의 수가 증가하며, 또한 겉면을 붉게 칠한 적색토기가 새로이 등장한다. 대리석으로 만든 팔찌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뼈장식품 등도 출토되었다. 5기층에서는 몸통 윗부분에 어골문을 넣은 것과 아가리에 돋을무늬를 넣은 것이 출토되었으나 대부분 민무늬토기들이다. 斜刃石斧와 조개껍데기로 만든 반월형석도 등도 새로이 제작되고 있다.

 이 유적은 한반도 동북지방의 신석기시대 전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1기와 2기는 전기로, 3기는 중기로, 4기는 후기 전반으로, 5기는 후기 후반으로 편년되어 연대는 각각 B.C.5000∼4000년대, B.C.3000년대 전반기, B.C.3000년대 후반기, B.C.2000년대 초로 비정되고 있다.

 이 유적의 신석기시대문화는 연해주·아무르강의 중류지방문화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한반도 동북지방의 대표적인 문화로 밝혀지고 있다. 서포항의 신석기시대인들은 출토된 유물에서 볼 때, 농경·어로·수렵에 경제적 기반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사) 회령 오동유적

 두만강 중류 오른쪽 연안 평야지대에 형성되어 있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주거지이다.493) 이 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 조각들이 발굴지역 전체에 걸쳐서 각 층에서 한두 편씩 출토된 것이 총 150여 점에 달하는데, 그 질은 무늬없는 갈색토기와 대체로 비슷하다고 한다. 그릇의 형태는 구연부가 외반한 화분형과 직립한 단지종류가 있고 밑은 납작한 것 같다.

 무늬는 크게 점렬문·자돌문·침선문의 3종류가 보이는데, 점렬문은 아가리 주변에 주로 시문되어 있고, 구연부가 외반한 것이 많으며, 자돌문은 영선동식의 어골문과 단사선문이 있고, 침선문에는 격자문·어골문·거치문·사선문 등이 있는데 다른 무늬에 비해 시문수법이 조잡한 편이다. 일부 토기의 구연 선단부 안쪽에는 각목이 새겨져 있는 것도 있다.

 청동기시대 취락지가 형성되기 이전에 이 곳에는 원래 신석기시대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늬의 종류로 보아 자돌점렬문과 침선문계무늬토기가 시기를 달리해서 존재했을 가능성이 많으며 이와 같은 토기의 출토양상은 흑구봉유적의 경우와 비슷하다.

(아) 무산 호곡동유적

 이 유적은 함경북도 무산 虎谷洞의 두만강 상류계곡에 위치한다. 1959∼1961년의 3년 동안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신석기시대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반출되는 움집터 10기가 조사되었다.494) 움집의 평면형태는 방형 또는 장방형인데, 면적은 큰 것은 180㎡ 이상이고 작은 것은 20㎡ 정도이며 깊이는 100∼50㎝이고 주로 가운데에 화덕이 있었다.

 주거지에서는 토기·석기·골각기 등의 유물들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항아리·바리·잔·사발 등으로 그 겉면에는 집선무늬·번개무늬·고기뼈무늬 등이 일부에 베풀어져 있다. 빗살무늬토기와 공반된 민무늬토기에는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구멍무늬토기가 보여 신석기시대 최말기의 유적으로 생각된다. 석기로는 흑요석기·석촉·도끼·그물추·갈판·갈돌대·톱·창끝·괭이 등이, 골각기로는 활촉·바늘·송곳·대롱구슬 등이, 토제품으로는 가락바퀴가 보인다.

 북한에서는 이 유적을 신석기시대 말기인 B.C.2000년대 초로 편년하고 있으나 구멍무늬토기가 출현하고 겉면이 마연되어 있는 민무늬토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B.C.1000년 이상 올라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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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