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6권 신문화운동 ⅡⅡ. 근대 종교운동5. 천도교3) 천도교의 민족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1) 신문 발간의 배경
          • 2)≪한성순보≫의 창간
            • (1) 박문국 설치
            • (2) 신문 발간의 목적
            • (3) 필화와 중국과의 관계
          • 3)≪한성주보≫의 발간
            • (1) 순보와 주보의 차이
            • (2) 국내소식과 의견기사 증가
            • (3) 기사의 출처
          • 4) 박문국의 운영
            • (1) 발행부수
            • (2) 주보의 폐간
          • 5) 개화와 국민교화의 기능
        • 2. 근대 언론의 발달
          • 1) 민간지 등장의 시대적 배경
          • 2) 최초의 민간지≪독립신문≫
            • (1) 서재필의 망명과 귀국
            • (2) 체재의 변화
            • (3) 광고
            • (4)≪독립신문≫의 역할
            • (5) 서재필의 추방
            • (6) 윤치호와 아펜젤러의 경영
          • 3) 외국인의 신문 발행과 잡지
            • (1) 일본인 발행의 신문들
            • (2) 기독교계통의 종교신문
            • (3) 잡지의 시초
          • 4) 일간지 ≪일신문≫
            • (1) 배재학당의 ≪협셩회회보≫
            • (2) 일간신문으로 발전
            • (3) 기사의 외교문제화
            • (4)≪상무총보≫발간
          • 5) 새로운 신문들
            • (1)≪경성신문≫·≪대한황셩신문≫
            • (2) 필화사건
        • 3. 언론의 구국투쟁
          • 1) 한말 언론과 계몽운동
            • (1) 국내신문
            • (2) 국외신문
          • 2) 한말 언론의 국권회복운동
            • (1)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
            • (2) 국채보상운동의 주도
            • (3) 국민계몽과 애국심의 고취
          • 3) 일제의 언론규제
            • (1) 사전검열
            • (2)<신문지법>의 제정
            • (3)<신문지법>의 개정
      • Ⅱ. 근대 종교운동
        • 1. 유교
          • 1) 유교개혁사상의 발생
          • 2) 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유교개혁사상
            • (1) 도학파의 유교개혁사상
            • (2) 애국계몽사상가의 유교개혁사상
            • (3) 심학(양명학)파의 유교개혁사상
          • 3) 유교개혁사상의 한계와 의의
        • 2. 불교
          • 1) 근대와 한국불교
          • 2) 문호개방과 한국불교
          • 3) 개화운동과 불교
          • 4) 일본불교의 침투와 입성 해금
          • 5) 입성 해금 이후의 교계 동향
          • 6) 임제종운동-반조동종운동
        • 3. 천주교
          • 1) 한국근대사와 천주교회
          • 2) 병인박해와 한국천주교회
          • 3) 그리스도 전교자유의 구현
          • 4) 교안과 신교자유의 문제
          • 5) 제도교회로의 발전과 새로운 고민
          • 6) 근대 천주교회의 사회적 기여
            • (1) 교육활동
            • (2) 근대적 출판·언론 문화활동
            • (3) 근대적 사회복지사업의 전개
        • 4. 기독교
          • 1) 기독교의 수용과 정착
            • (1) 중국과 일본을 통한 접촉
            • (2) 한미수호조약의 채결과 미국의 대한선교
          • 2) 교회의 발전
            • (1) 교회의 설립과 교단조직
            • (2) 선교지역 분할과 교파 연합활동
            • (3) 네비우스선교방법과 대부흥운동
          • 3) 기독교와 민족의식
            • (1) 민족의식의 태동
            • (2) 교회의 비정치화
          • 4) 기독교와 한국의 근대화
            • (1) 의료활동
            • (2) 교육활동
            • (3) 사회개혁운동
        • 5. 천도교
          • 1) 천도교의 성립
          • 2) 천도교의 중심사상
          • 3) 천도교의 민족운동
            • (1) 제1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 (2) 제2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 6. 대종교
          • 1) 대종교의 창립과 의의
          • 2) 대종교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1) 나철교조시기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2) 제2세 교주 김교헌시기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3) 대종교의 항일민족독립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1) 수학
          • 2) 물리학
          • 3) 화학
          • 4) 박물학
          • 5) 천문학과 기상학
          • 6) 세계관의 변화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1) 교통·통신·전기
            • (1) 근대적 교통·통신·전신 및 전기의 도입 배경
            • (2) 사회간접자본의 전개과정
          • 2) 근대 의료기술
            • (1) 서의한역서의 소개와 유입
            • (2) 일본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 (3) 서구 선교사들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 (4) 주체적인 서양의술의 수용
          • 3) 근대건축
            • (1) 19세기 말 양식건축의 이입
            • (2) 20세기 건축
          • 4) 근대 산업기술
            • (1) 개항 이전 서양식 무기기술의 개발
            • (2) 개항 이후 기계기술의 도입정책
            • (3) 대한제국시기 방직기술의 이식
            • (4) 1905년 이후 정미기술의 이식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제2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천도교 민족운동의 제2단계인 1919년 3·1독립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함께 동학·천도교의 민족운동사상 그 정점을 이루는 운동이었다.

3·1독립운동에 있어서 천도교측의 역할을 분석·검토해 보기로 한다. 주지하듯이 1919년 3·1독립운동은 3월 1일 오후 2시,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의 대표가 서울의 조선요리점 泰(太)華館에 모여 獨立宣言書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종교별로 구분해 보면 천도교인 15인, 기독교 15인, 불교 2인, 기타 1인이다. 이들 가운데 천도교인 15인의 주요 직력 및 경력을 분석해 보면 다음의<표 1>과 같다.349)

이 름 직     력 정  치  력
孫秉熙 천도교 제3세 교주

보성학원, 문종, 종학, 교남, 동덕, 일신,

보창, 명신, 양덕, 창동 각 학교 설립경영
동학농민전쟁(이하 동학)참가,

보국안민 3책제창
梁漢黙 탁지부 주사, 능주세무관, 보성전문, 동덕

여학교 경영
동학참가, 진보회조직, 헌정연구회

조직, 자강회참가, 이재명사건관여
朴準承 임실 천도교 접주, 수접주, 대교구장, 순

유위원, 지주
동학참가350)
崔 麟 함남관찰부 집사, 외사부 주사 활빈당가입, 일심회가입, 신민회

가입, 보호조약반대 구금처분
李鍾勳   동학참가, 갑진혁신운동, 계몽운동

참가, 이완용가방화사건 관여
金完圭 여수통신 주사, 한성부 주사, 봉도법암장  
洪基兆 천도교 황해·평안양도 수접주 동학참가, 창의대령 갑진혁신운동

참가
李鍾一 대한황성신문 사장, 정삼품 의관, 천도교

월보 과장
성수망세불경사건 관여
吳世昌 박문국 주사, 한성순보 기자, 군국기무소

비서관,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

광성학교 부교장
 
權秉悳 천도교 대접주, 시천교 종무장, 금융관장,

보문관장
동학참가
權東鎭 함안군수, 육군장교 임오군란참가, 개화당입당, 혁신운

동참가, 동학참가
羅龍煥   동학참가
羅仁協   동학참가
林禮煥   동학참가
洪秉基   동학참가

<표 1>천도교인 경력표

위의<표 1>에 의하면 15인의 천도교인 가운데 11인이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여 반봉건·반외세투쟁을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4인 즉 최린·김완규·이종일·오세창의 경우를 보면, 활빈당·헌정연구회·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 등 1900년대 활발히 전개되었던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3·1독립운동을 적극 주도하는 천도교인들은 동학농민전쟁 및 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의 투쟁이념 및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 및 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 투쟁이념을 계승하고자 했던 천도교인들은 3·1독립운동을 어떻게 준비해 왔는가. 그 구체적 준비 및 실행과정을 천도교측의 동향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910년대 말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던 민족자결 및 독립운동의 고양을 계기로 국내외 민족운동가들은 그것을 조선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개시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1918년 11월경에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 제창과 관련된 신문보도를 접한 천도교의 중견 간부 權東鎭·吳世昌·李鍾一·崔麟 등이 중심이 되어 그 해 12월에 이르러 민족자결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조선의 ‘自治’운동을 개시하기 위해 다음해 봄 동경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그 뒤 1919년 1월에 이르러 권동진 등은 국외 동포들의 독립운동 소식과 宋繼白(당시 일본 早稻田大學 학생이었다)을 통해 재일유학생들의 독립운동계획을 접하고 그것과 보조를 함께 하기 위해 당초의 ‘자치’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1월 말에서 2월 초경에는 최린을 중심으로 宋鎭禹(중앙학교교장), 玄相允(중앙학교교사), 崔南善(역사가) 등이 모여 독립운동 실행계획을 토의·결정했다. 그 내용은 ① 동지를 모을 것, ② 독립선언서를 작성·발표할 것, ③ 일본정부 및 일본의 귀족원과 중의원·조선총독에게 의견서를 제출할 것, ④ 미국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보낼 것 등이었다.351)

2월 초순경부터 그들은 독립운동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행동에 들어갔다. 즉 선언서의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며 선언서를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발표하기 위해 대한제국시대에 고관을 지냈던 朴泳孝·尹用求·韓圭卨·金允植·尹致昊·宋秉畯 등을 포섭 대상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운동계획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천도교 인사들의 제안을 모조리 거절했다. 이에 천도교측 인사들은 2월 8일경 기독교측과 제휴하기 위한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 무렵 평양의 장로교파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계획이 독자적으로 검토되고 있었는데 천도교측의 호소에 따라 五山學校長 李昇薰이 교섭에 나섰다. 그 뒤에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서울의 기독교도(감리교파)도 참여를 결정하여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결정되었으며,352) 기독교측의 참여가 결정되자 불교측도 그 연합에 참여하여 3교연합이 성립되었다.

2월 25일에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민족대표’에 대한 심사가 있었으며 선언서의 발표를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할 것, 그리고 선언서를 서울 및 각 지방에 배포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27일에는 천도교가 경영하고 있던 普成社 인쇄소에서 21,000매의 선언서가 인쇄되었으며, 28일부터 3월 초에 걸쳐 천도교를 비롯한 기독교 조직, 학생들을 통해 서울과 각 지방에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이들 천도교측·기독교측·학생측에 의해 각지에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지방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353)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는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본래 선언서가 발표될 예정이었던 탑골공원이 아닌 조선요리점 태화관에서 발표되었고, 선언서를 발표한 직후 민족대표들은 즉각 자수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의 이 같은 애매모호한 투쟁에도 불구하고,354)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 및 일반 민중에 의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높이 고양되어 갔으며, 그 열기는 이윽고 각 지방에까지 파급되었다. 각 지방에서 전개되는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은 특히 지방의 천도교·기독교조직 및 서울에서 파견된 학생들에 의해 지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전라북도 임실의 경우 천도교 임실교구가 임실지방의 만세시위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으며,355) 임실과 이웃한 남원에서도 천도교 남원교구장 柳泰洪 등이 남원지방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356)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천도교는 1905년 성립 직후부터 손병희의 지도 아래 근대적인 종교로 재정비되었으며, 그 같은 재정비과정에서 교육·문화·출판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교구조직을 정비하여 3·1독립운동의 전개 기반을 확립하였다.

또한 1919년 3·1독립운동에서 그 구체적인 전개 방법상으로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천도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교구 중심의 만세시위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3·1독립운동에 있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朴孟洙>

349)姜德相,<3·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と朝鮮人民>(≪思想≫537, 東京;岩波書店, 1969년 3월호), 336쪽.
350)姜德相이 작성한 표에는 없지만 필자가 보충하였다.
351)市川正明 編,≪3·1獨立運動≫1(東京;原書房, 1983), 116∼117쪽, 216쪽.
352)이 때 기독교측의 거사자금을 천도교측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353)天道敎는 당시 37개의 대교구 아래 북간도를 포함하여 지방에 194개의 교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 지방교구가 중심이 된 지방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금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354)민족대표들의 애매모호한 투쟁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엄격한 비판이 있어 왔다.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姜德相, 앞의 글.

康成銀,<3·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の活動に關する一考察>(≪朝鮮學報≫130, 朝鮮學會, 1989년).
355)≪天道敎任實敎史≫(프린트본, 1980).
356)崔炳鉉,≪天道敎南原郡宗理院史≫(筆寫本, 1924).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