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특수훈련반(미 OSS)의 훈련을 마치고 공작임무를 수행하러 적 후방을 향하여 떠나던날 대장 이범석장군을 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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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외탄 전경
상해 조계 표시(노란색이 프랑스 조계, 1943)
3·1운동 당시의 모습(경성 미국영사관 앞)
3·1운동 당시의 모습(덕수궁 앞)
독립 선언서(1919. 3. 1)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에서 발행한 대한 독립 선언서(1919. 3)
노령 국민 의회 선언서(1919. 3)
한성 정부 국민 대회 선포문(1919. 4)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사진엽서로 제작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첫 청사의 모습이다. 엽서에는 '상해 하비로 321호'라 적혀 있어 하비로 시절 청사 임을 알 수 있다.
국무 총리 이승만 임명장(1919. 4. 11)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당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1919. 4)’
1919년 6월 17일 설립한 임시 사료 편찬 위원회 위원들. 앞줄 왼쪽: ◯·우승규·이광수·김두봉·김병조/ 뒷줄 왼쪽: 이원익·장붕·◯·안창호·김여제·김홍서·박현환
《한일관계사료집》 표지. 임시 정부가 국제 연맹에 제출할 목적으로 편찬한 역사서이자 자료집이다.
《한일관계사료집》 서언
《한일관계사료집》 본문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 창간호. 우리 민족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 민심을 통일하며 여론을 환기할 목적으로 1919년 8월 21일, 상해에서 창간하였다. 1919년 10월 25일부터 제호를 《독립신문》으로 변경하였다.
미주 구미 위원부 발행 독립 공채. 구미 위원부는 1919년 9월 1일부터 공채를 발행하였다. 공채는 10, 25, 50, 100, 1천 달러 5종으로, 연리 6%에 미국이 한국 정부를 승인한 1년 뒤에 상환한다는 조건이었다.
미주 구미 위원부 발행 독립 공채 50$
미주 구미 위원부 발행 독립 공채 100$
미주 구미 위원부 발행 독립 공채 100$ 뒷면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6회 기념(1919. 9. 17)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1919. 10. 11). 앞줄 왼쪽: 신익희·안창호·현순/ 뒷줄 왼쪽: 김철·윤현진·최창식·이춘숙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원 일동(1919. 10. 11)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독립 공채 100원짜리 견본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독립 공채 1000원짜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신년 축하식을 마치고(1920. 1. 1)
3·1 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1920. 3. 1). 상해 정안사로 올림픽 극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기미 독립 선언문을 상해에 처음 들여온 현순이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김정극의 여행 증서(1920. 4. 22). 임시 정부 외무부 구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유학 갈 때 임시 정부에서 발행한 여권
여행 증서 뒷면은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로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 포고문 3호(1920. 12. 1). 간도 참변으로 변을 당한 간도 동포에게 보내는 임시 정부 국무원 포고문. 독립운동의 근본 방침은 오로지 혈전과 끝없는 투쟁뿐이었다.
상해 교민단 주최 이승만 대통령 상해 도착 환영회(1920. 12. 28). 왼쪽: 손정도·이동녕·이시영·이동휘·이승만·안창호·박은식·신규식·장붕
임시 정부와 임시 의정원 신년 축하식(1921. 1. 1)
3·1절 2주년 기념식(상해 정안사로 올림픽 극장, 1921. 3. 1). 이승만 대통령 이하 국무 위원들이 참석하였고, 김병조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다. 왼쪽: 신규식·◯·박은식·◯·김병조·이승만·장붕·이동녕·안창호
3·1절 2주년 기념식 객석(상해 정안사로 올림픽 극장, 1921. 3. 1)
파리 강화 회의 임시 정부 대표단.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파리 한국 위원부와 통신국을 병설하였다. 앞줄 왼쪽: 여운홍·사무실 주인 부부·김규식/ 뒷줄 왼쪽: ◯·이관용·조소앙·◯·◯·◯·◯·황기환
대한민국 임시 정부 명의로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독립 요구서(1919. 4)
신한 청년단 대표 김규식 명의로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13개조(1919. 4. 3)
대통령 이승만과 구미 위원부 위원장 김규식
필라델피아 한인 대회(1919. 4. 14~4. 16).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과 재미 동포들은 필라델피아 소극장에서 제1회 한인 대회를 개최하였다. 오른쪽부터 윤병구·이승만·정한경·노디김
필라델피아 한인 대회 태극기 행진. 독립 선언식을 마치고 회의장인 소극장을 출발하여 독립 기념관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 대회 태극기 행진
필라델피아 한인 대회에 참가한 대표들. 앞줄 왼쪽: ○·민찬호·정한경·○·서재필·이승만·윤병구. 오른쪽으로 천세헌·조병옥·유일한 등이 보인다.
구미 위원부 직원 일동(1920. 3. 1). 앞줄 왼쪽: ○·송헌주·이승만·김규식/ 뒷줄 왼쪽: ○·임병직·노디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통령 이승만 명의로 수여된 서재필 구미 위원 부위원장 임명장(1921. 4. 18)
워싱턴 군축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에 도착한 정한경과 이승만(1921. 11)
워싱턴 군축 회의 한국 대표단(구미 위원부 앞, 1921. 11). 첫줄 왼쪽: 이승만·매이본(Maybourne)·돌프(Frederic A. Dolph)/ 뒷줄 왼쪽: 서재필·정한경
워싱턴에 있었던 구미 위원부 공관
하와이 범태평양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단(1925. 6. 30)
하와이 범태평양 회의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1925. 6. 30). 왼쪽부터 유억겸·김양수·서재필·○·윤혜은·○·신흥우·송진우
하와이 범태평양 회의에 참가한 한국 대표단. 왼쪽: ○·○·○·송진우·신흥우
레드우드 비행 학교 훈련생과 교관(1920). 첫줄 왼쪽: 미국인 교관 브라이언트(Frank Bryant)·◯·◯·장병훈·한장호·이용선/ 뒷줄 왼쪽: ◯·오림하. 오른쪽에서 4번째 이초
비행기에 오른 한장호. 레드우드에 있는 민간 비행 학교인 레드우드 비행 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이 파일럿 자격증을 얻고 윌로우스 비행사 양성소 교관으로 부임하였다.
임시 정부 군무 총장 노백린
노백린 군무 총장과 한인 비행사 양성소 교관들(1920. 2. 5). 왼쪽: 장병훈·오림하·이용선·노백린·이초·이용근·한장호
레드우드 비행 학교 훈련장 전경(1920. 5. 1)
한장호(레드우드 비행 학교, 1920. 5. 1)
레드우드 비행 학교의 과정을 마친 비행사들(1920.5.1). 레드우드 비행 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사 자격을 획득한 이들은 윌로우스 한인 비행사 양성소의 교관으로 복무하였다.
임시 정부 산하 부대인 대한 군정서 사관 연성소 졸업식(1919. 9. 9)
북로 군정서 청산리 전투 승리 기념(1920.10)
육군 주만 참의부 대원(1923).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한 참의부는 임시 정부 산하 독립군 부대로 결성되었다.
대한 적십자회 제1기 간호사 양성 기념(1919. 8). 대한 적십자회는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발기되었고, 8월 29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설립을 인가하였다. 가운뎃줄 왼쪽: 김홍서·◯·정인과·◯·◯·◯·◯·이춘숙·여운형/ 뒷줄 왼쪽: ◯·김병조·김경희(초대 회장)·유상규
한국 노병회 회원. 한국 노병회는 장차 독립 전쟁을 내다보면서 여기에 필요한 군사와 자금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1922년 10월 22일에 조직되었다.
김옥인의 인성 학교 5회 졸업 증서(1925. 3). 인성 학교는 임시 정부의 직할 조직인 민단 소속의 초등 교육 기관이다.
인성 학교(1925)
인성 학교 제7회 졸업 기념(1925. 7. 9)
정교(停校 )를 앞둔 인성 학교 학생들(1935. 11. 11). 1932년 윤봉길 의거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해를 떠나면서 운영이 어려워졌고, 일제의 요구로 프랑스 조계 당국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인성 학교는 정교 조치되었다.
태극기 앞에 선 이봉창(1931. 12. 13)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을 들고 서 있는 이봉창(1931. 12. 13)
이봉창의 한인 애국단 선서문(1931. 12. 13)
이봉창(1931. 12. 17)
경시청에 연행되어 조사실로 가는 이봉창(1932. 1. 8)
일본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의거 현장을 검증하는 일본 경찰(1932. 1. 8)
동경 일일 신문 호외(1932. 1. 8)
동경 조일 신문 호외(1932. 1. 8)
한국 독립당 선언 '대 이봉창 저격 일황 사건'(1932. 1. 10). 한국 독립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민의 투쟁이 계속될 것임을 선언하였다.
재판정으로 호송되는 이봉창(1932. 9. 30)
한인 애국 단원 유상근
한인 애국 단원 최흥식
한인 애국단 단장 김구와 단원들(1932). 왼쪽: 최흥식·김구·유상근
윤봉길 선서문(1932. 4. 26)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과 권총을 쥐고 있는 윤봉길(1932. 4. 26)
한인 애국단 단장 김구와 단원 윤봉길(1932. 4. 26)
윤봉길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글(1932. 4. 27)
윤봉길이 의거 전, 김구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좋은 시계와 바꾸자고 했던 김구의 시계
윤봉길이 제안하여 김구와 바꾼 윤봉길의 시계
윤봉길 의거 전에 열병하는 일본군(1932. 4. 29)
의거 직전의 기념 식장(1932. 4. 29)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한 직후의 기념 식장(1932. 4. 29)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한 직후의 기념 식장(1932. 4. 29)
윤봉길이 미처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1932. 4. 29)
의거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
1932년 4월 29일자 동경 일일 신문 호외
1932년 5월 1일자 대판 조일 신문 호외 2면
1932년 5월 1일자 동경 일일 신문 호외 2면
1932년 5월 1일자 동경 조일 신문 호외 1면
1932년 5월 14일자 차이나 위크 리뷰
일본 상해 파견군 헌병 사령부에 압송되어 신문 받을 당시의 윤봉길
윤봉길 순국 장면(1932. 4. 29)
윤봉길 순국 장면(1932. 4. 29)
윤봉길 의거 후 중국인들에게 한인 애국단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중문으로 발간한 ≪도왜실기≫
안창호 생일 기념(1919. 11. 9)
김구·안창호·이탁
신채호·신석우·신규식
안태국 빈소. 안태국은 신민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3·1 운동 후 상해로 와서 임시 정부에 참여했으나 1920년 4월 11일에 서거하였다. 빈소는 서강리 안창호의 숙소에 마련되었다.
안태국 장례 행렬(1920. 4. 14)
안태국의 장례식에 참석한 상해 교민들과 임시 정부 요인들(1920. 4. 14). 장지는 장병로 외국인 공동묘지였다.
김구 가족(1921). 김구 아내 최준례의 모습이 담긴 한 장뿐인 사진. 왼쪽: 김구·큰아들 인·아내 최준례
1922년 7월 8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거행된 동농 김가진 장례식
김가진 장례 행렬(1922. 7. 8)
김가진 장례식(1922. 7. 8). 유해는 상해 서가회 만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신규식 묘비 앞에서(1923). 앞줄 왼쪽: 민필호와 아들 영수/ 뒷줄 왼쪽: 신명호(신규식 딸, 민필호 아내)·조정완(신규식 아내)·민필호 딸 영주
송종익 결혼식(1924. 1. 13)
김구 아내 최준례의 묘비를 세우고(1924). 왼쪽: 작은아들 신·김구·어머니 곽낙원·큰아들 인
엄항섭 결혼식(1927)
이탁 장례식(1889. 3. 18~1930. 5. 17)
이탁 묘소
임시 정부 요인 가족들(상해, 1931). 앞줄 왼쪽: ◯·연미당(엄항섭 부인)·정정화(김의한 부인)·신명호(민필호 아내)/ 2줄 왼쪽: 이헌경(민필호 어머니)·연미당 어머니·◯·◯
안창호 일기. 안창호가 임시 정부 노동국 총판으로 활동하던 시기 중, 1920. 1. 14~8. 20, 1921. 2. 3~3. 2의 8개월 분량이다.
침체된 독립운동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기로 한 김구가 어린 두 아들에게 유서로 쓴 《백범일지》 상권. 1928~1929년에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