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 기획 | 자료해설 | 시나리오 | 특수편집 | 구축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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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 | 류주희 | 이정란 | 양윤경 | 리더스 미디어 센터 | 2013 |
난중일기 | 정성희 | 안지은 | |||
서유견문 | 김윤희 | ||||
경국대전 | 윤덕영 김성희 이규리 구영옥 |
김윤주 | 유영수 | (주)블루디씨 | 2014 |
북학의 | 김창수 | ||||
한국통사 | 김윤희 | ||||
왕오천축국전 | 윤덕영 이규리 구영옥 |
임혜경 | 송미숙 | (주)블루디씨 | 2015 |
삼강행실도 | 이광렬 | ||||
택리지 | 김현정 | 유영수 | |||
매천야록 | 서동일 | 송미숙 | |||
조선상고사 | 박준형 |
40여 년 동안 계속된 대몽항쟁
원의 압박으로 행해진 두 번의 일본 원정
나라가 위태로울 정도로 피폐해진 고려
그러나 국정을 장악한 세력은 부패했고 임금은 사냥과 유흥에 빠져 민생을 돌보지 않았다.
고금의 전적이 많고 끝이 없으며 또한 앞뒤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러니 진실로 요점만 간추려
시로 읊을 수만 있으면
열람하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
其善可爲法
선한 것은 법이 되고
惡可爲誡者
악한 것은 경계가 되게 하고자
제왕(帝王)이 갖추어야 할 덕목(德目)을 운율(韻律)이 있는 시(詩)로 기록한 글
제왕운기
충렬왕의 실정을 비판한 상소로 파직
삼척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 이승휴
하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까지 접어둘 순 없었다.
왕을 위해 다시 글을 썼다.
7언 절구와 5언 절구의 시로 엮은 역사서
제왕운기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와 단군 이래 고려까지 역사를 정리
이는 중국과 우리 역사를 나란히 기술해 대등한 나라임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지역은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었네
큰 파도 넓은 바다 삼면을 둘렀고
북쪽에 있는 대륙과 끈처럼 이어져 있네
가운데 사방 천리 여기가 조선이니
강산의 뛰어난 모습은 천하에 이름이 높네
농사지어 먹고살고 우물 파서 물 마시며
예의 바른 국가여서
중국인들도 소중화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
개국 시조는 단군이었다.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비바람을 다스렸는가
석제의 손자 이름은 단군일세
우리 민족은 하늘의 신
석제의 후손이었다.
단군신화가 실려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
일연의 삼국유사
환웅과 곰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
유학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실린
다른 내용의 단군신화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간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게 했으니
이를 단군이라고 한다.
환웅의 손녀와 단수신이 혼인하여 단군 탄생
우리 민족이 하느님의 후손임을 강조했던 제왕운기
단군이 나라를 세운 시기도
중국 요임금의 건국과 같은 해
특히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
최초로 한국 역사에 포함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강조한 대서사시
제왕운기
난세의 희망이었던 역사서를
자신을 파직시켰던 충렬왕에게 바치며
그가 남긴 말
“신이 제왕운기를 편수하여
두 권으로 나누고 깨끗이 써서 바치는 것은 …
개똥벌레 같은 희미한 빛이나마
해와 달의 밝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함이니 …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스러운 지혜를 너그럽게 미루시어
사람 때문에 글까지 버리지 말아 주소서”
『제왕운기』의 저술 동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품 덕분에 말년의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삼척의 두타산에 은거하며 농사로 소일거리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64세의 나이였다.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생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 나이였다. 더구나 뇌물을 받아먹은 관리를 탄핵했다가 도리어 좌천된 적이 있어, 옳은 일을 하는 것조차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이미 뼈저리게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놈의 성질은 늙어도 고쳐지지 않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근심이 하루하루 더해만 갔기 때문이다. 무자비하게 계속된 몽골군의 살육과 약탈도 견디어 내어 끝내 ‘복속’되는 길만은 모면했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런 나라가 원나라를 따르는 부패한 무리와 무능한 임금 때문에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다.
관직에서 쫓겨나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아직 자신이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자신의 마음을 잘 전하기만 하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다만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현직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또한 그 방법은 이미 수년 전에 써보았는데 별로 효험이 없다는 사실을 익히 경험하였다.
사실 이승휴는 1280년(충렬왕 6)에 임금의 실정을 10개 항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비판한 적이 있었다. 몽골에게 오랜 동안 약탈을 당하고 이후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도 오랜 전통과 유구한 역사를 잃지 않았던 것이 고려였다. 그런데 충렬왕이 즉위한 이후부터는 무언가 상황이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라의 전통이나 관습 따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무조건 원나라만을 칭송하며 따르는 세력이 나라 안에 넘쳐났다. 또한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제 뱃속만 채우느라 바쁜 사람들이 널리 농장(農場)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충렬왕(忠烈王)은 주위의 측근들이 저지르고 있는 온갖 악행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국정을 맡긴 채 사냥과 유흥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충렬왕에게 “나라의 형편이 매우 곤란하고 날이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사냥하며 유흥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사냥하시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이시고 백성은 돌보지 않으십니까?”라며 충심을 다해 간언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화살이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파직되었다. 7년 전의 일이었다.
다른 방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서술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임금의 잘못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글을 읽음으로써 임금이 저절로 잘못을 깨닫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제왕(帝王)이 갖추어야 할 덕목(德目)을 운율(韻律)이 있는 시(詩)로 기록한 글”이라는 의미에서 『제왕운기』로 정했다.
유구한 역사의 나라, 독자적인 왕조
이것이 단군신화(檀君神話)를 소개한 사서(史書) 중의 하나로 유명한 『제왕운기』가 저술된 동기이다. 『제왕운기』는 1287년(충렬왕 13년)에 이승휴가 저술한 사서(史書)인데, 정확히 말하면 역사책은 아니고 역사시(歷史詩)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7언 절구와 5언 절구의 운율로 읊은 독특한 형식의 시집인 것이다. 이 책은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은 신화 시대부터 원나라에 이르는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7언 절구의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 하권은 동국 군왕 개국 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 군왕 세계 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로 나누어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중 전자는 고려 왕조 이전까지의 역사를 칠언시(七言詩)로, 후자는 고려 태조의 탄생 설화에서부터 이승휴의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의 역사를 오언시(五言詩)로 정리한 것이다.
그는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를 통해 임금이 어찌 하면 성군(聖君)이 되고 어찌 하면 폭군(暴君)이 되는지를 여실히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제왕운기』 저술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싶기도 했다. 당시는 그러한 마음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찬란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였고 오랜 동안 외적과 싸워 지켜낸 나라였건만, 몽골에 항복한지 수십 년도 되지 않아 국정은 부패 세력의 손에 넘어갔고 민족 의식은 뿌리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제왕운기』의 곳곳에서 빼어난 자연 환경과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로 우리나라를 기록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려 했다.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지역은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었네
큰 파도 넓은 바다가 삼면을 둘렀고
북쪽에 있는 대륙과 끈처럼 이어져 있네
그 가운데 사방 천리 여기가 조선(朝鮮)이니
강산의 빼어난 모습은 천하에 이름이 높네
농사지어 먹고 살고 우물 파서 물 마시며
예의바른 국가여서
중국인들도 소중화(小中華)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네”
(『제왕운기』 권하 지리기)
그는 고려가 오랜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어 중국과는 엄연히 다른 ‘별천지’라고 생각했다. 요동을 기점으로 중국과는 지리적으로 구분되며 농사를 지어 먹고 살고 있지만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했다. 거기에다가 중국의 “장성(長城)과 황하(黃河)의 혹독함을 견딜 수 없었던” 이승휴에게 있어 “채찍을 드리운 채 말 가는 대로 맡겨두고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동안거사집』 행록 권4 빈왕록) 빼어난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려의 풍경이었다.
또한 고려는 ‘요동의 별천지’일 뿐만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제왕운기』의 동국 군왕 개국 연대의 전조선(前朝鮮) 부분을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일세”라는 문구로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역사의 개국 시조가 단군이라는 사실을 전한 것인데, 그것은 결국 우리가 하늘의 아들인 천손(天孫)의 후손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사실 이승휴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시기가 중국과 대등하다고 했다. 단군이 나라를 연 시기를 중국 요 임금이 건국한 해인 무진년(戊辰年, B.C. 2333)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요 임금 50년을 단군의 건국 시기로 삼은 것과는 다르다. 이는 이승휴가 우리나라의 역사 편년을 중국과 대등하게 파악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그는 단군 이후의 나라들을 모두 단군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 인식하여 체계적으로 계통을 정리하였다. 즉, 단군이 세운 전조선이 기자의 후조선(後朝鮮)으로 이어지고 이후 부여·옥저·예·맥 등을 포함한 삼한(三韓)의 시기를 지나고 삼국(三國)의 시대를 거쳐 신라와 발해에까지 이어졌으며 마지막에 고려에 전해졌다고 하였다. 발해를 단군의 후손으로 인식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에 발해를 처음으로 편입시킨 사실은 『제왕운기』가 후대에 주목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더구나 단군조선의 맥이 고려에까지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진 것으로 서술한 점은 우리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측면에서 더욱 흥미를 끄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승휴의 입장은 위에서 제시한 “그 가운데 사방 천리 여기가 조선이니”라는 시구에서도 드러난다. “북쪽에 있는 대륙과 끈처럼 이어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나라를 고려가 아니라 ‘조선’으로 지칭했다는 사실 자체가 고려를 단군조선의 연장으로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해를 단군 기원으로 계산하여 3,288년이 지난 뒤의 일이라고 강조한 서술도 주목되는데, 그것은 고려의 독자성과 유구성을 강조하였던 이승휴의 역사 인식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려 당대인으로서의 이승휴
이처럼 이승휴는 중국과 대등할 만큼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나라임을 강조하여 고려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내세웠지만, 한편으로 고려가 처한 당시의 국제적 현실을 잊지 않았다. 세계의 중심에 원나라가 있고 고려는 그 테두리 안에서 그들에게 사대(事大)를 해야만 하는 현실을 그는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제왕운기』의 곳곳에 드러나 있다. “우리 상국(上國) 대원(大元)이 일어나서, 만백성들을 노래하게 하였으니, 높고도 넓은 성스러운 덕을 어찌 다 이르리오.”라거나 “모든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오고, 중국의 모든 땅에서 모두가 예물을 바치네, 토지가 광대하고 인민이 많으니,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비교할 나라가 없다네.”라고 하여 원나라 황제의 성스러움과 원나라의 위대함을 극찬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대를 살고 있던 대다수 고려인과 마찬가지로 이승휴도 세계의 중심에 몽골(원나라)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휴는 그 한편으로 고려가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 전통을 고수하기를 바랐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해 6월에 고려의 임금 원종(元宗)이 사망하자 임금의 장례식은 고려의 풍습에 따라 거행하게 해달라고 원나라 황제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이승휴였다. 그는 당시 원종의 아들이자 훗날에 충렬왕이 되는 세자가 원나라의 부마가 되어 몽골식 복장으로 일을 본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려의 상복(喪服)과 장례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 나머지 그와 같은 일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일화로 보건대, 이승휴는 몽골에 사대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애쓴 인물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제왕운기』의 저술을 통해 그가 배격하고자 했던 세력은 단순히 ‘친원파(親元派)’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의 관습 따위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무조건 원나라만을 칭송하면서 한편으로는 제 뱃속만 채우기에 바쁜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 당시 충렬왕의 주변에는 그러한 사람이 많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제왕운기』를 저술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신 승휴는 아뢰옵니다. (중략) 이마로부터 발뒤축에 이르기까지 온몸에 충만할 정도로 임금의 은혜를 입었고 전하를 보필하였는데, 운수가 나빠 도리어 몸이 한가롭게 되었사옵니다. 임금님을 뵈올 길이 없음이 슬프고 만수무강을 축원할 수 있는 터전이 있는 것이 기뻤습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스러운 지혜를 너그럽게 미루시어 제가 못났다고 해서 글까지 버리지 마시고 잠깐 밝은 눈을 돌려 밤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외부에 회부하여 시행하게 하시어 후세의 권면(勸勉)과 경계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제왕운기』 제왕운기진정인표(帝王韻紀進呈引表))
이승휴는 자신의 글이 임금이 어진 정치를 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듭 “제가 못났다고 해서 글까지 버리지 마시고 부디 읽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청하며 마지막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충렬왕이 자신의 글을 보고 깨우친 바 있기를 바랐던 그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제왕운기』는 운 좋게도 저술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1296년(충렬왕 22년)에 간행되었다. 윤보(尹珤, ?~1329년)가 충렬왕에게 건의하여 이루어낸 일인데, 그 간행 과정을 보건대 아마도 충렬왕이 『제왕운기』를 읽어보았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충렬왕은 사냥을 멈추지 않았고 아들 충선왕(忠宣王)에 의해 측근 세력들이 제거될 때까지 자신의 주변에 그들을 계속 그대로 두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20여 년 동안 파직된 상태에 있던 이승휴를 다시 정계에 등용시킨 것은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이었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2월에 충선왕은 이승휴에게 고위 관직을 주며 자신의 개혁에 참여하게 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승휴는 민간의 이해와 시정의 잘잘못을 모두 아낌없이 임금에게 말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충렬왕 일파의 방해로 충선왕은 곧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승휴도 퇴직하고 말았다. 그 뒤 2년이 지난 1300년(충렬왕 26년) 겨울에 그는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