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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200여 종에 달하는 많은 책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책 이름과 저자, 간단한 내용 및 역사적 의의 등이 간략히 기술되어 있을 뿐입니다.
<영상 책 이야기>는 교과서 안에 소개된 책을 주제로 하여 시각적으로 이해를 돕는 동영상과 함께 전문가의 해설을 제공함으로써 교과서 서술 내용에 대한 심화 학습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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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총길이 38cm, 총 227행
닥종이 9장을 이어붙인
두루마리 문서

1908년 중국 간쑤성 둔황
막고굴 제17호 장경동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석실 가득히 차 있는 문서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

그는 이 두루마기의 글이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혜초가
쓴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왕오천축국전

8세기 중국으로 유학을 간
신라승 혜초는 불법을 얻기 위하여
부처의 나라 인도로 순례길에 올랐다.

두루마리 문서는 앞 부분이 손상되어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서는
중천축국의 쿠시나라가라부터 순례길이 시작된다.

쿠시나가라(拘尸那國)
<부처가 열반한 곳>

매년 8월 8일이 되면
비구와 비구니, 재가 신자들이 모두 모여
대대적으로 불공을 드린다.
그때 공중에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바라나시(彼羅痆斯國)
<부처가 최초 설법한 곳>

부처의 설법을 듣고 최초의 제자가 된
다섯 비구의 상이 탑 안에 있다.

바이샬리(毗耶離城)
<암라팔리가 부처에 귀의한 곳>

탑이 있는 것은 보았으나
절은 황폐해지고 승려는 없었다.

카필라바스투(迦毘耶羅國)
<부처가 태어난 곳>

그 성은 이미 황폐되어 탑은 있으나
승려도 없고 백성도 없다.

스라바스티(舍衛國)
<부처가 설법을 펼친 곳>

사위국(舍衛國)의 급고원(給孤薗)에
절도 있고 승려도 있음을 보았다.

상카시아(僧伽施)
<부처가 도리천에서 설법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곳>

삼도보계탑(三道寶階塔)의 왼쪽 길은 금으로
오른쪽 길은 은으로 가운데 길은 유리로 장식하였다.

나시크(納昔克)
중천국국보다 덥고, 그곳의 산물로는
전포, 코끼리, 물소, 황소가 있다.

수쿠르
보리, 밀, 콩 종류 등이 많이 생산되며
벼는 아주 적다.
음식은 대개 떡, 보리가루, 우유, 버터 등이다.

잘란다르(闍蘭達羅國)
그 나라 서북지방은 평평한 하천 지방이고
동쪽으로는 설산에 가깝다.

와칸(胡密國)
용문엔 폭포수마저 얼어 끊겼고
우물테두리는 뱀이 도사린 것처럼 얼어붙었도다.
불을 벗 삼아 조금씩 오르며
노래로 위안을 삼지만
저 파미르 고원을 넘을 수 있을는지...

드디어 시안(長安)에 도착한 혜초는
부처의 나라를 순례한 발걸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후, 중국 간쑤성 둔황의 동굴에서 천 여년을 잠들어 있던 왕오천축국전은 20세기 초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어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

세계 3대 여행기중의 하나인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500여 년이나 앞선 고대 인도 여행기

승려 혜초가 쓴 고난의 순례길에 대한 기록

왕오천축국전

해설

『왕오천축국전』의 발견

프랑스의 젊은 동양학자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중국 서북부 간쑤성(甘肅省)의 둔황(敦煌) 천불동(千佛洞)에 도착한 것은 1908년 2월이었다. 그는 약 13개 언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22세의 젊은 나이에 베트남 극동학원의 중국어 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학자로서 영국, 스웨덴, 독일, 일본에 이어 뒤늦게 중앙아시아 탐사에 가세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탐험대를 이끌 인물로 발탁되어 급파된 것이었다.

1900년에 우연히 발견된 조그만 석실 장경동(藏經洞)에서 엄청난 양의 두루마리 문서들이 쏟아져 나온 일로 인하여 당시 둔황 천불동은 중앙아시아의 유물 탐색에 열중이었던 유럽 탐험대의 관심을 끌고 있었고, 펠리오보다 앞서서 이미 영국의 오럴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이 이곳을 두 차례 방문하여 수천 점의 문서를 매입해 가기도 하였다.

스타인보다 한 발 늦게 천불동에 도착한 펠리오는 한 달여 동안을 더 기다린 후에야 장경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좁은 방 안에 천정까지 가득 차 있는 두루마리 문서 더미를 처음 본 순간의 심경을 펠리오는 스스로 “완전히 넋을 잃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곧바로 문서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반드시 입수해야 할 귀중 문서들을 추려내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어둡고 비좁은 석실 안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3주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펠리오는 앞부분이 상당량 떨어져 나간 잔권(殘卷) 상태의 두루마리 필사본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제목과 저자명이 남아있지 않았음에도 그는 이것이 혜초(慧超, 8세기, 생몰년 미상)가 지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몇 해 전인 190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펠리오는 『왕오천축국전』에서 사용된 어휘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의 한 구절을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이 사본에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어휘를 발견하고는 이것이 바로 그 『왕오천축국전』의 실물임을 확신한 것이다.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이 넘도록 좁은 석실 속의 문서 더미에 파묻혀 있었던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된 순간이었다.

펠리오는 프랑스로 귀국한 후, 1908년에 발표한 글에서 자신이 장경동에서 『왕오천축국전』 필사본을 발견하였으며, 여러 가지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펠리오의 발견은 곧장 세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중국, 일본, 독일 및 한국의 학자들에 의한 연구 성과가 속속 발표되면서 『왕오천축국전』과 그 저자인 혜초에 대한 이해가 점차 심화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필사본 『왕오천축국전』의 성격

펠리오가 발견한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Pelliot chinois 3532’라는 문서번호를 달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로 약 28.5cm, 가로 약 42cm 크기의 담황갈색 닥종이 9장을 이어붙인 두루마리에 행초서(行草書)로 써내려간 필사본으로서 제목과 저자명이 적혀 있었을 첫머리를 포함한 전반부와 끝부분 일부가 훼손되어 없어진 잔권 형태이다. 첫 장의 남은 부분 19cm와 마지막 장의 남은 부분 35cm를 포함하여 총 길이는 358.6cm이며, 1행에 대략 26~30자씩, 총 227행이 기록되어 있다.

펠리오는 사본을 발견한 당시에 9세기의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이후 일본인 학자 다카다 도키오(高田時雄)는 용지의 상태나 서체 등을 근거로 8세기의 것으로 추정하면서 혜초 본인이 직접 작성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물론 혜초가 직접 쓴 것인지, 혹은 혜초의 저작을 후대에 누군가가 베껴 쓴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 문서가 혜초가 활동하던 동시대 혹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되어 『왕오천축국전』의 옛 형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는 변함이 없다.

『왕오천축국전』은 ‘다섯 천축(인도)의 나라들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를 여행하며 보고 들은 내용들을 적은 여행 기록이다. 전통적으로 인도는 다섯 부분으로 구분하여 각각 동천축ㆍ서천축ㆍ남천축ㆍ북천축ㆍ중천축으로 불렸으며, ‘오천축’은 인도 전체를 일컫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인 현장(玄奘, 600~664)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천축’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신독(身毒)’, ‘인도(印度)’ 등으로도 불린다고 설명하면서 ‘오인도(五印度)’라고도 지칭하고 있는 것이나, 역시 당나라의 승려인 의정(義淨, 635~713)도 또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서 중인도ㆍ북인도 또는 중천(中天)ㆍ북천(北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왕오천축국전』은 인도 전역을 목표로 한 순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정작 펠리오가 발견한 사본에서 오천축에 대한 서술은 남아있는 분량의 1/3 수준에 그칠 뿐, 대부분은 서역(西域), 즉 실크로드 상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한 기술이다.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 법현(法顯, 337~422 추정)의 여행기인 『불국기(佛國記)』나 『대당서역기』가 인도 내에서의 순례 내용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왕오천축국전』의 이러한 비중 할애는 서역에 대한 견문을 보다 넓혀준다는 측면에서 특색 있는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

『일체경음의』에 의해 『왕오천축국전』의 저자가 혜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으나, 그의 생애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장경동에서 발견된 필사본이 학계에 보고된 직후 일본의 동방학자 후지타 도요하치(藤田豊八)에 의해 혜초가 당나라 밀교 고승인 불공금강(不空金剛, 705~774)의 제자로서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승려였다는 점이 지적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1915년에 일본의 불교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 혜초가 신라의 승려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카쿠스 준지로는 불공금강이 자신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 6명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 금각(金閣) 함광(含光), 신라(新羅) 혜초, 청룡(靑龍) 혜과(慧果) ……”라고 한 구절이 포함된 자료를 찾아내고, 이때의 ‘신라’가 혜초의 국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다카쿠스 준지로의 학설이 알려지면서 혜초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관심이 고조되었고, 『왕오천축국전』 자체에서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근거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어졌다. 구체적으로 『왕오천축국전』에는 일반적인 한문 문법에 어긋나거나 표현이 부자연스러운 구절이 종종 보이는데, 이것이 곧 저자 혜초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나아가 본문 중에 수록되어 있는 5편의 오언시(五言詩) 중 혜초가 남천축을 여행하면서 읊은 시 구절에 주목한 견해도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月夜瞻鄕路]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浮雲颯颯歸]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緘書參去便]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風急不聽廻]
내 나라는 하늘 가 북쪽에 있고 [我國天岸北]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他邦地角西]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日南無有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誰爲向林飛]
(번역 : 정수일)

위 시의 마지막 구절 중 ‘수풀 림(林)’자에 대하여 최초의 현대어 번역본을 출간한 독일인 학자 발터 푹스(Walter Fuchs, 1902∼1979)는 ‘상림(森林)’이라고 해석하는 등 대체로 일반적인 의미의 숲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나, 한국의 역사학자 고병익(高柄翊, 1924~2004)은 ‘계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계림’은 신라의 별칭으로서 당시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더구나 저자가 고향을 굳이 숲에 비유한 것을 생각하면 이 글자가 ‘계림’, 즉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고향 나라가 “하늘 끝[天岸]”에 있다고 한 것도 혜초의 고향이 신라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여러 연구 성과에 힘입어 혜초가 신라 출신의 승려라는 사실은 현재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혜초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인도 순례를 시작한 시기가 언제인지 등 그의 생애 초반의 행적은 전하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왕오천축국전』의 후반부에서 당나라의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위치한 쿠차(龜玆)에 도착한 것이 727년 11월이라고 하였으므로 혜초의 인도 순례행은 720년경에 시작하여 728년 무렵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에 혜초는 아마도 20대 전후의 젊은 수도승이었을 것이다.

중국으로 귀국한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혜초가 스승 금강지(金剛智, 671~741)와 함께 번역한 『대교왕경(大教王經)』(대정신수대장경 20책, T.1177A)의 서문 및 몇몇 단편적인 자료들에 의해 개략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혜초는 인도 순례에서 돌아온 지 약 5년 후인 733년에 당나라 장안(長安)에 있는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로부터 『대교왕경』을 배웠으며, 이때부터 8년간 스승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740년에는 금강지가 당나라 현종(玄宗)의 칙명(勅命)을 받아 경전의 번역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혜초도 금강지가 읊어주는 경전 구절을 받아 적는 필수(筆授)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얼마 후인 741년에 금강지가 입적하자 그의 제자였던 밀교승 불공금강을 스승으로 모시어 가르침을 전수받았으며, 774년 불공금강이 입적할 당시에는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전해 받은 6대 제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주요 밀교 사원과 내도량(內道場)에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는 등 당시 밀교 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다가 780년에 중국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 들어가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입적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대산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혜초가 멀리 인도에까지 다녀온 사실은 8세기 초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역동적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법승의 활동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가 비록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입적하였지만, 중국 밀교의 기틀을 잡았다고 평가받는 금강지와 불공금강을 차례로 사사하여 밀교 고승의 경지에 올랐다는 점과 장안과 오대산을 중심으로 경전 연구와 번역에 기여한 점은 밀교 승려들의 국가적 활동이 확대되어 가던 당시 신라의 불교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혜초의 인도 순례 목적

동진의 법현, 당나라의 현장이나 의정 등 인도를 순례한 승려들은 대체로 불교 교리를 배우거나 새로운 경전을 구하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났다. 그러나 혜초의 경우는 『왕오전축국전』 그 어디에도 교리 수학이나 경전 입수에 대한 언급이 없이 인도 각지와 서역 지방에서 보고 들은 사실을 서술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단지 유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걸어서 머나먼 천축까지 다녀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혜초가 인도를 순례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왕오천축국전』에서 혜초는 마가다국(摩揭陀國; Magādha)의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마하보디(Mahabodli) 사원)에 도착한 순간의 감회에 대해 “본래의 소원에 맞는지라 무척 기뻤다.”라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不慮菩提遠]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焉將鹿苑遙]
가파른 길 험하다고만 근심할 뿐 [只愁懸路險]
업연(業緣)의 바람 몰아쳐도 개의치 않네. [非意業風飄]
여덟 탑을 친견하기란 실로 어려운데 [八塔難誠見]
오랜 세월을 겪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參差經劫燒]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何其人願滿]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目睹在今朝]
(번역 : 정수일)

혜초가 “본래의 소원”이라고 한 것이나, 시에서 여덟 탑을 직접 보고자 하는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의 탑을 비롯한 8대 탑을 참배하는 것이 혜초가 인도에 간 중요 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의 8대 탑은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지인 라자그르하(Rājagṛha), 깨달음을 이룬 곳인 마하보디(Mahabodhi), 최초의 설법지인 사르나트(Sarnath), 열반에 들어간 곳인 쿠시나가라(Kuśinagara) 등 석가모니의 주요 행적과 관련된 8대 불교성지에 건립된 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혜초는 이들 탑의 소재지를 아래와 같이 일일이 밝히고 있다.

구분 『왕오전축국전』의 지명(명칭) 현재의 지명(명칭) 비고
4대 영탑(靈塔) 녹야원(鹿野苑) 바라나시(Vārāṇasī)의 사르나트(Sarnath) 부처의 최초 설법 장소
구시나(拘尸那) 쿠시나가라(Kuśinagara) 부처의 열반처
사성(舍城) 라자그르하(Rājagṛha), 라즈기르(Rājgir) 마가다국(Magādha)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부처의 설법지 영취산(영취산(靈鷲山),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위치한 지역
1차 불교경전 결집 장소
마하보리(摩訶菩提) 보드가야(Bodhgayà)의 마하보디(Mahabodli) 사원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곳에 건설된 불교사원
4대 탑 사위국(舍衛國)
급고원(給孤薗)
쉬라바스티(Śrāvastī)의 사헤트(Saheth)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가 부처에게 보시한 기원정사(祇園精舍)
부처가 가장 오래 머무르며 설법한 곳
비야리성(毘耶離城)
암라원(菴羅薗)
바이샬리(Vaiśālī), 바사르(Basarh) 부처가 외도들을 교화한 곳
2차 불교경전 결집 장소
가비야라국(迦毘耶羅國)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의 룸비니(Lumbinī) 부처의 탄생지
삼도보계탑(三道寶階塔) 상카시야(Sānkāśya), 상키사(Saṅkisa) 부처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한 후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곳에 세워진 탑

근래의 연구 성과의 따르면 혜초가 인도를 순례하던 무렵 인도에서는 8대 탑이 불교도들의 성지 순례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중국 장안 불교계의 밀교 승려 사이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밀교 승려들은 각각의 탑과 관련된 석가모니의 행적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고 하는 수행의 일환으로 8대 탑을 직접 찾아가고자 했다는 것이다. 혜초가 험난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인도 곳곳을 누볐던 것 역시 8대 탑 순례를 통한 불제자로서의 수행의 일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초의 순례 경로

펠리오가 발견한 필사본은 전반부가 결락된 까닭에 명칭이 확인되는 첫 번째 나라는 석가모니의 열반처인 동천축의 구시나국(拘尸那國, 쿠시나가라(Kuśinagara))이지만, 『일체경음의』에서 인용하고 있는 『왕오천축국전』 앞부분의 어휘 중에 남방의 해안가나 도서 지방에 관련된 것이 다수 확인되는 점을 보면 혜초가 바닷길을 통해 인도에 도착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혜초 보다 앞서서 인도를 순례한 법현과 의정이 해로를 통해 인도로 들어갔고, 의정의 기록에 보이는 인도 순례승 65명 중 40명이 해로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인도를 왕래하는 통로로서 바닷길이 선호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를 거쳐 인도 동해안에 상륙하였을 혜초는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을 차례로 순례하고 건타라(建馱羅; 간다라(Gandhāra))와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을 거쳐 실크로드 중 하나인 천산남로(天山南路)를 통해 장안으로 귀국하였다. 이 과정을 기록한 『왕오천축국전』 본문에 등장하는 나라 혹은 지역은 44개소에 달하며, 이를 언급된 순서에 따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구시나국(拘尸那國; 쿠시나가라(Kuśinagara))→피라날사국(彼羅痆斯國; 바라나시(Vārāṇasī))→마게타국(摩揭陀國; 마가다(Magādha))→중천축 왕성(王城) 갈나급자(葛那及自; 카냐쿱자(Kanyakubja))→남천축 왕성→서천축 왕성→사란달라국(闍蘭達羅國; 잘란다라(Jālandhara))→소발나구달라(蘇跋那具怛羅; 수바르나고트라(Suvarnagotra))→탁사국(吒社國; 탹샤르(Takshar))→신두고라국(新頭故羅國; 구르자라(Gurjara))→가라국(迦羅國; 카슈미르(Kaśhmīra))→대발률국(大勃律國)·양동국(楊同國)·사파자국(娑播慈國)→토번국(吐蕃國)→소발률국(小勃律國)→건타라(建馱羅; 간다라(Gandhāra))→오장국(烏長國; 우디아나(Udyāna))→구위국(拘衛國; 사마라자(Śamarājā))→람파국(覽波國; 람파카(Lampāka))→계빈국(罽賓國; 카피시(Kāpiśī))→사율국(謝䫻國; 자불리스탄(Zābulistān))→범인국(犯引國; 바미얀(Bamiyana))→토화라국(吐火羅國; 투카라(Tukhāra))→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Persia))→대식국(大寔國; 아랍(Arab))→소불임국(小拂臨國)→대불임국(大拂臨國)→안국(安國; 부하라(Bukhāra))·조국(曹國; 카부단(Kabūdhan))·사국(史國; 킷쉬(Kishsh))·석라국(石騾國)·미국(米國; 펜지켄트(Penjikent))·강국(康國; 사마르칸트(Samarkand))→발하나국(跋賀那國; 페르가나(Ferghāna))→골탈국(骨咄國; 쿠탈(Khuttal))→돌궐(突厥; 투르크(Turk))→호밀국(胡密國; 와칸(Wakhan))→식닉국(識匿國; 쉬그니(Śhigni))→총령진(葱嶺鎭; 타슈쿠르간(Tāshukurghān))→소륵(疎勒; 캬슈가르(Kashgar)→구자국(龜玆國; 쿠차(Kucha))→우전국(于闐國; 호탄(Khotan))→언기국(焉耆國; 카라샤르(Kharashar))

위와 같은 열거 순서가 혜초의 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 지역을 혜초가 모두 방문하였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열거된 모든 지역을 직접 방문했다고 보기에는 그 경로가 지나치게 복잡하며, 특히 대식국(아랍)처럼 일반적인 인도 구법 경로에서 크게 벗어난 곳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문명교류사적 시각에서 대식국 방문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려는 입장도 없지는 않으나, 위의 지역 가운데 직접 방문이 아닌 전문(傳聞)에 의한 기술이 섞여있을 것이라는 점은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직접 가보지 않고 전해들은 바를 적은 내용이 섞여 있다고 해서 『왕오천축국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비록 직접 답사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답사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정보까지도 폭넓게 수록하였다는 점이 오히려 이 기록을 더욱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겠다.

도착하기까지 걸린 기간이나 이동 방향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어 혜초가 직접 답사하였음이 확실한 지역과 직접 방문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는 곳을 구분하여 순례 경로를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김상영, 「慧超의 求法行路 檢討」, 『(혜초스님 기념 학술세미나 자료집) 世界精神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慧超’』,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p.47, [그림 1])

『왕오천축국전』의 의의

『왕오천축국전』은 전반부가 떨어져 나가서 내용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불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중국식 한문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신라 출신의 승려에 의해 저술되었기 때문에 다소 어색한 문장과 어휘가 사용되었지만, 8세기 전반의 유일한 인도 및 서역 여행기라는 점에서 발견 당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더불어 5세기 전반 법현의 『불국기』, 6세기 전반 송운(宋雲)의 여행기(『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권5 수록), 7세기 전반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7세기 후반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의 뒤를 이어 8세기 후반 오공(悟空)의 인도 기행과의 간격을 메워주는 구법기(求法記)로서 그 의미가 크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인도와 서역 지방의 정치와 종교, 풍속 등을 간명하면서도 폭넓게 기록하고 있어 현장과 의정 이후의 이 지역 상황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문헌으로서는 최초로 8대 탑의 구체적 소재지 혹은 명칭을 열거하였다는 점에서 문화사적ㆍ불교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서역 지방에 대하여 한문식 지명 외에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지명을 함께 기록한 점과 오언시를 통해 순례 과정에서의 감회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점은 이 기록이 언어학이나 한문학 분야의 연구에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요컨대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초 인도와 서역 지방의 불교계 현황과 지리 환경, 풍습, 산물, 언어, 정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멀고 험난한 구법의 길을 걷는 순례자의 감회를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사적 유산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 『왕오천축국전』(Pelliot chinois 3532, 필사본,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 고병익, 1970, 「慧超의 往五天竺國傳」,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 고병익, 1987, 「慧超의 印度往路에 대한 考察」, 『佛敎와 諸科學』, 동국대학교출판부
  • 김상영, 1999, 「慧超의 求法行路 檢討」, 『(혜초스님 기념 학술세미나 자료집) 世界精神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慧超’』, 가산불교문화연구원
  • 남동신, 2009, 「慧超의 『往五天竺國傳』」, 중앙유라시아연구소 문명아카이브 해제 프로젝트
  • 이주형 외, 2009,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 유적』, ㈜사회평론
  • 정병삼, 1999, 「慧超와 8세기 신라불교」, 『(혜초스님 기념 학술세미나 자료집) 世界精神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慧超’』, 가산불교문화연구원
  • 정수일, 2004,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2000, 『실크로드의 악마들』, 사계절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