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시전 상인의 조직과 도성 문화2. 시전 상업의 시기적 변화도성 3대 시장과 경강 상업

점포 상업의 발달

18세기에는 시전 상업 외의 점포 상업도 발달하였다. 19세기 초에 작성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현방(懸房), 약국(藥局), 서화사(書畵肆), 책사(冊肆), 금교세가(金橋貰家) 등을 포사(舖肆)로 독립 항목을 설정하여 기술하고 있다. 이들의 영업도 분명 상업이지만, 시전 상업과는 달리 곳곳에 점포가 위치하여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영업한다는 점에서 따로 분류하였다.26)

현방은 소를 잡아 고기를 판매하는 곳으로, 성균관 전복(典僕)들이 판매를 주관하였다. 고기를 매달아 판매한다고 해서 현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중부에는 하량교, 이전(履廛), 승내동, 향교동, 수표교 5곳, 동부에는 광례교, 이교(二橋), 왕십리 3곳, 서부에는 태평관, 소의문 밖, 정릉동 근처 병문, 야주현(冶鑄峴), 육조 앞, 마포 등 7곳, 남부에는 광통교, 저동, 회현동, 의금부 등 4곳, 북부에는 의정부, 수진방, 안국방 3곳이 있었고, 여기에 성균관에 소재한 현방을 합하여 모두 23곳에서 푸줏간 영업을 하고 있 었다.

<종로의 약국>   
지금의 종로 3가쯤에 있던 약국으로 추정된다.

약국은 주로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銅峴) 근처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약방은 갈대로 만든 발을 내려뜨리고 신농유업(神農遺業), 만병회춘(萬病回春) 등의 옥호(屋號)를 붙였으며 약을 파는 사람을 모두 봉사(奉事)라고 불렀다.27) 약국은 단지 병자에게 약을 지어주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시정인(市井人)들의 약속의 장소, 만남의 장소로도 기능하였다. 그러므로 약국은 시정의 소문이 발생하는 근원지이면서, 그러한 소문이 빠르게 확산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발생하는 정치적 변란 사건의 주모자들이 모의하거나 만나는 장소로 대부분 약국을 활용한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약국과 비슷한 기능을 한 점포가 담배 가게(煙肆)였다. 담배 가게는 강독사(講讀師)들이 청중을 대상으로 소설을 읽어 주는 장소로도 제공되었다. 심노숭(沈魯崇)은 이러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방주연(妓房酒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전래된 담배는 조선 후기 남녀노소가 즐기는 기호품으로 정착하였다. 한량들이 자신의 팔 길이보다 훨씬 긴 담뱃대에 담배를 피우면서 기생들과 주연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의 밑그림이다.

『임경업전』은 서울 담배 가게, 밥집의 파락악소배(破落惡少輩)들이 낭독하는 언문 소설로 예전에 어떤 이가 이를 듣다가 김자점이 장군에게 없는 죄를 씌워 죽이는 데 이르러 분기가 솟아올라 미친 듯이 담배 써는 큰 칼을 잡고 낭독자를 베면서 “네가 자점이더냐.”라 하니 같이 듣던 시장 사람들이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28)

공연 장소가 따로 없었던 당시에 담배 가게는 그러한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림 판매점인 서화사는 대광통교 서남쪽 개천 변에서 각종 그림과 글씨를 판매하였으며, 책을 판매하는 책사(冊肆)는 정릉동 병문, 육조 앞 두 곳에 있었는데, 주로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판매하였다. 이 시기에는 직업적으로 책만을 판매하는 책장수도 등장하였고, 그 가운데 일부는 조선 후기 한문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여러 곳에 산재한 금교세가에서는 종친이나 공주, 옹주의 옛 저택을 혼인을 앞둔 신부 집에 빌려 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점포 상업 외에도 18세기 한양은 도시 상업의 발달로 새로운 기능을 지닌 영업을 출현시켰다. 서비스업 성격을 띤 주점, 음식점, 기방, 색주가 등이 대표적이다. 남대문에서 종로에 이르는 거리에는 주점, 팥죽집 등 음식점이 즐비하였으며, 종루 거리에는 천 냥짜리 기생집이 등장할 정도로 색주가가 번창하였다. 한양의 대표적인 색주가는 경강의 마포 지역과 홍제원, 남대문 밖 잼배, 탑골 공원 뒤편, 수은동 등지였다.

<기방쟁웅(妓房爭雄)>   
19세기에 기방에서 시비가 붙은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다. 18세기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주점, 기방, 색주가 등이 번창하여 종루 거리에는 천 냥짜리 기생집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음료식업(飮料食業) 업소 중에서도 ‘군칠’이라는 주점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산적 따위를 팔았고, 밤에는 불을 켜놓고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평양과 개성의 특미가 한양 주점의 메뉴로 등장할 정도였다.

이처럼 번창한 주점에서는 수십 가지 안주를 제공하였고, 젊은이들은 술값으로 가산(家産)을 탕진하여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와 더불어 쇠고기와 어물의 절반 이상이 주점의 안주로 소비되어 한양 시민의 찬거리 값이 폭등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주점과 음식점의 발달, 즉 상업적 외식업의 발달은 인구의 밀집과 유동을 전제로 한 조선 후기 도시 발달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의 하나였다.

이와 같은 점포 상업, 주점의 번성과 더불어 이 시기 노동력 청부를 주로 하는 영업이 새롭게 번성하였다. 18세기에는 유민들이 생계를 위해 대거 한양으로 몰려듦에 따라 이들을 노동력으로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마계(馬契), 운부계(運負契) 등의 하역 운수업과 겨울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판매하는 장빙업(藏氷業) 등도 독립적인 영업 분야로 발달하였다.29)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는 광경>   
얼음은 음력 12월이나 1월 중 오전 2시경부터 시작하여 해뜨기 전까지 채취한다. 얼음 한 매의 크기는 길이 1척(尺) 5촌(寸), 폭 1척 정도였다. 얼음의 두께는 한강 얼음이 두껍게 얼 때는 1척이 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7촌 정도면 좋은 것으로 쳤다. 18세기에 유민들은 생계를 위하여 장빙업에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필자] 고동환
26)『동국여지비고』 권2, 한성부(漢城府) 포사(舖肆).
27)유득공, 『경도잡지』 풍속.
28)심노숭, 『효전산고(孝田散稿)』, 「남천일록(南遷日錄)」 1802년 11월 8일.
29)고동환, 「조선 후기 장빙역(藏氷役)의 변화와 장빙업(藏氷業)의 발달」, 『역사와 현실』 14,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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