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의 변모(19세기 중반∼ )

19세기 판소리의 성격 변모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판소리에 양반층이 열광하였다는 사실이다. 양반층이 판소리 광대를 유가에 이용한 것은 성장기의 양상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에는 필수적이었으며 양반층이 판소리 판의 좌상객으로 등장하여 감상자와 비평가 역할을 하면서 직접 판소리 사설의 수정에도 참여하였다.148) 양반들의 판소리 감상은 하나의 교양이 되었다. 철종, 고종 등 왕들도 판소리를 즐겼으며, 광대들에게 후한 상이나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왕이 판소리를 감상한 다음 오수경(烏水鏡)을 선물로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판소리 광대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청중은 민중이 아닌 양반이었다. 따라서 민중 출신인 광대는 민중보다는 양반층을 위한 예술 활동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민중과는 거리를 두고자 노력하였다. 양반층이 판소리의 애호가가 되면서 판소리 사설에 심각하고 중요한 변모를 가져왔다. 거칠고 건강한 민중 의식을 담고 있던 판소리 사설이 양반층의 미의식을 담게 되면서 전아하고 고상하며 봉건적 질서를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19세기에 판소리 사설이 변모하는 양상은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첫째, 판소리의 줄거리를 플롯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개작한 독서물이 등장했다.149) 양반층이 판소리의 줄거리를 염두에 둔 채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나 「광한루기(廣寒樓記)」 등의 작품으로 개작한 것이 하나의 축을 이루며, 우리말의 율격을 철저하게 조합할 수 있는 능력과 센스를 갖춘 문사나 교방(敎坊)의 소리 선생이 『남원고사(南原古詞)』 계통으로 개작한 것이 다른 한 축이다. 이 책은 판소리의 중요한 전승 단위인 더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서풍의 율격이 있으나 판소리 창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 판소리 연행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설에 양반 의식을 담아서 더늠을 수정하거나 창작하여 사설의 방향을 일정하게 변모시킨 것이 다른 하나의 형태다. 이와 같은 사설의 변모는 특히 신재효나 박유전 등 판소리 자체의 전승 구조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는 명창이나 후원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판소리 창본이 시중에 돌아다니다가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완판계의 소설본으로 정착하게 되면서 독서물화하기도 하였다. 판소리로 불리던 작품이 독서물로 되었다는 것은 판소리와는 다른 매체 즉 그 작품이 소설로서 기능하였으며, 좀 더 다른 수식과 서사적인 내용의 가감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재효는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큰 몫을 해낸 인물이다. 그는 아전 출신으로 한문에도 능했으며, 판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김세종을 소리 선생으로 초빙하여 판소리 전문 교육을 마련했으며, 충·효·열 등의 봉건적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판소리의 사설을 전아한 한문 투의 문장으로 일관되게 수정하였다. 신재효의 이러한 작업에 대하여 “판소리의 동적인 발랄함을 보수적 교양으로 감퇴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신재효는 어느 경우 한문에 대한 일정한 상식을 가진 이가 주석을 붙여야 할 정도의 고사를 인용하여 노랫말을 개작했다. 판소리 사설은 이제 이전의 경험적이고 직접적이며 골계적인 내용 대신에 전아한 한문 투로 대체된 부분이 많아졌다. 어려운 한자, 고사, 경전의 구절들이 많아지면서 기왕의 민중층 청중은 쉽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판소리 사설의 내용은 보수적인 봉건 이념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개찬되었다. 그것은 조잡한 것을 전아하게 바꾼다는 명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한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도 있다. 예컨대 춘향이나 심청이 가문의 신분을 상승시킨다거나 주인공의 행동을 삼강오륜이라는 당
대의 지배 이념에 맞게 재구성하고, 이러한 이념에 맞지 않은 내용은 삭제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민중의 삶을 반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판소리는 이념이라는 잣대로 규정된 형식을 수용하여 우아하고 세련된 방향으로 변모되었다. 심청가의 ‘시비따라’ 대목이나 춘향가의 ‘춘향집 가리키는데’에서 보이듯, 양반들의 음악 문화인 가곡창의 발성을 판소리로 끌어들여 가곡성 우조를 등장시킨 것은 이 같은 판소리 변모 양상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형태다.
판소리의 이와 같은 변모는 기왕의 판소리가 민중의 삶을 역동적으로 반영하면서 함께 즐기는 가운데 자연스레 현실 세계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가지게 해주는 능동적인 예술이라는 사실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이는 대체로 19세기 중반 이후의 양상이라고 생각된다. 이때는 이미 판소리가 민중의 삶과 욕망을 반영하고 있었지만 변혁을 지향하는 예술 형태는 아니었다. 자연히 판소리 청중의 성격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위치에서 광대가 부르는 소리를 감상만 하는 수동적 위치로 바뀌었고, 음악적 세련미에 경탄과 갈채를 보내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판소리는 사설의 내용도 한문 투로 어려워졌고, 음악성도 고도의 기교와 시김새 등이 더해지며 세련을 거듭하여 서민층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없는 고급 예술이 되었다.
148) |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나 『광한루기(廣寒樓記)』의 서문에는 양반층이 가지고 있던 판소리 사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판소리 사설을 그들의 입장에서 개작한 텍스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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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 판소리는 철저하게 ‘더늠’의 개념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대체로 판소리의 진정한 전승 단위인 더늠에 주목하지 않은 채 단순히 작품의 줄거리나 플롯에 따라서 선후 관계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판소리 창본과 문장체 소설본을 단순히 플롯으로만 비교, 분석하여 두 텍스트 사이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변별적 특징과 차이점은 부각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