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

남사당패는 본래 남자만으로 구성된 연희 집단이었다. 이들은 꼭두쇠
(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이) 등을 공연했다. 옛날에는 이 여섯 연희 외에 요술(환술)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과 다소의 노자만 제공받게 되면 마을의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208) 현재 남사당패는 중요 무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위의 여섯 가지 연희를 전승하고 있다.
유랑 예인 집단은 수입을 위해 경제력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주로 장터, 파시, 마을 행사 등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경기도 안성 청룡사 근처에 남사당패의 근거지가 있었던 배경은 청룡사라는 절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삼남의 물산이 집결되고 유통되던 안성 시장과의 관련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경남 하동 목골의 사당패도 쌍계사와 화개 장터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할 듯하다.
남사당패는 파시도 찾아가서 공연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파시는 어류 등을 거래하기 위해 바다에 서는 장이다. 파시는 조기처럼 조류를 따라 다니는 회유성 어류 어장 부근의 섬에 섰으며, 주로 서해와 남해에 많이 섰다. 파시가 서는 섬에는 수백 척의 배가 몰려들기 때문에 어부들이 묵는 임시 숙소가 만들어지고 수십 채의 음식점과 주점 등이 들어서며, 창기와 작부들이 모여들어 큰 번화가가 형성되었다.209)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창(漕倉, 조선시대에 세곡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창고)을 열려고 할 때 포구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파(優婆, 사당), 창기(娼妓), 주파(酒婆), 화랑(花郞, 무당의 지아
비인 광대), 악공(樂工), 뇌자(櫑子, 초라니), 마조(馬弔, 투전), 도사(屠肆, 소나 돼지의 도살) 등 팔반천류(八般賤流)가 그것이다.210) 이 가운데 사당, 광대, 악공, 초라니 등 유랑 예인에 해당하는 연희자를 거론한 것은 이들이 조창에서 곡식을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배가 들고날 때 포구들을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는 주로 마을이나 장시를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지만, 한편으로 마을 공동체 등의 공적 행사에 초청되어 일종의 계약을 통해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전남 완도군 금당도에서는 18세기 말 국가에 묶여 있던 봉산(封山)이 풀리면서, 새롭게 개간한 경작지와 풍부한 목재를 기반으로 동계(洞契)와 목계(木契)가 설립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그런데 1862∼1927년까지의 지출 내역을 기록하고 있는 『동계책』에 1880년에서 1905년 사이에 남사당과 가객에게 여섯 번 돈을 지출한 항목이 보인다. 이는 이 마을의 공동체 행사 때에 남사당과 가객을 초청하여 공연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211)

남사당패의 연희 종목 가운데 버나는 대접돌리기, 살판은 땅재주인 근두, 어름은 줄타기로서 산악·백희의 곡예에 해당하는 종목들이고, 풍물 역시 악기 연주로서 산악·백희에 해당한다. 또한 지금은 전승되지 않고 있지만 옛날에 있었다는 요술도 환술로서 역시 산악·백희의 종목이다. 덧뵈기는 양주 별산대놀이와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을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덜미는 흔히 꼭두각시놀이라고 불리는 인형극이다. 가면놀이나 인형놀이도 이미 산악·백희의 종목에 있었으나, 현재 전승되고 있는 덧뵈기나 덜미의 내용은 조선 후기에 기존 가면놀이나 인형놀이를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에 맞는 내용으로 환골탈태하여 재창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