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발해의 옷감
신라는 삼국 중에 문화 수준이 가장 낮았으나 삼국을 통일한 후 통일의 주역답게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더불어 다양한 직물 문화도 영유하였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직물 관련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직관조(職官條)」에는 통일신라의 직물 생산 실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있는데, 당시 직물 생산을 관장하기 위하여 내성(內省) 안에 기능에 따라 세분화된 관서를 두었다.63)
마전(麻典)에서는 저포(苧布)와 마포(麻布)를, 조하방(朝霞房)에서는 조
하주(朝霞紬)나 조하금(朝霞錦)을, 기전(綺典)에서는 무늬 있는 비단인 기(綺)를, 금전(錦典)에서는 중조직의 무늬 비단인 금을, 모전(毛典)에서는 계·탑등·전(氈) 등의 모직물을 직조하였다. 그 밖에 옷감을 바래고 염색하기 위하여 표전(漂典)과 염궁(染宮), 염곡전(染谷典), 찬염전(攢染典)을 두었는데 특별히 홍화 염색과 소목 염색을 중요하게 여겨 이를 위한 홍전(紅典), 소방전(蘇芳典)을 두어 별도로 관리하였다.
이들 관서에는 여자 장인 모(母)를 두었다. 모는 관청에 소속된 고급 기술직으로 일반 수공업자들을 관리하고 기술을 지도하였다. 내성에 소속된 관서 중 조하방에 23명의 모를 두어 가장 많은 인력이 있었으니, 이는 독특한 조하의 무늬가 있는 조하주나 조하금 같은 신라 특산품의 생산량이 많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에는 다양한 직물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데 견섬유, 마섬유, 모섬유, 면섬유의 4대 천연 섬유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견섬유로는 백(帛)·채(彩)·면주·시(絁)·겸·견·능(綾)·나·금 등이 있고, 마섬유로는 세(繐)·저포·마포 등이 있으며, 면섬유로는 백첩포가 있다. 그 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오색의 구유를 만들었다는 기록과 일본에 보낸 물품에는 모전(毛氈)이라는 명칭도 있다.
백이나 채는 보편적인 견직물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삼국사기』에 “금채 300필과 백 2,500필을 주어…….”64)라는 문장으로 미루어 볼 때 백과 채는 별도의 옷감을 구분하는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은 염색하지 않은 소색의 평견직물 종류이며, 채는 금채·능채·오색라채와 같이 평견직물이 아닌 무늬 있는 고급 직물의 접미사로 사용하였다. 또한, 계량 단위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백은 모두 필(匹)을 쓴 것과는 달리 채는 단(段)을 썼는데, 단은 옷 한 벌을 지을 수 있는 분량을 의미한다.
평견직물을 가리키는 것으로는 초(綃)·견·시·면주 등이 기록되었는데 사용한 실의 종류와 치밀한 정도에 따라 옷감 명칭을 구분하였다. 초
에 관하여는 “아달라왕 4년(157)에 세초로 제사를 지냈다.”65)고 하니 일찍이 초라는 직물을 귀하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평견직물이라 하더라도 834년(흥덕왕 9)의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에 기록된 신분별 옷감 사용을 비교해 볼 때 견, 시, 면주의 순서로 고급품이었다.
무늬 있는 견직물에는 기·능·나·금이 기록되었다. 기는 평직 바탕에 능직(綾織)으로 무늬를 짠 직물로 능의 전신으로 생각된다. 기를 직접 사용한 실례는 없으나 신라의 직관 제도에 기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기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능은 능직으로 직조되어 사선의 줄이 나타나는 옷감인데 무늬가 있는 문릉(紋綾)과 무늬가 없는 소릉(素綾)이 있다. 흥덕왕 복식금제에서 4두품 이상의 남녀는 모두 사용할 수 있으나 평민은 요대(腰帶)와 요반(䙅襻)에만 사용하고 그 밖의 의복에는 견·시·주·포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므로 평견직물보다는 고급품이었다. 신라에서는 나를 사용한 기록이 없어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나 직물의 발달 정도가 늦었다고 생각되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흥덕왕 복식금제에 귀족 계급 남녀 의복의 여러 품목에 걸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결국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금제를 가할 정도로 많이 애용되었던 직물이다. 834년에 내린 복식금제에 기록된 나 종류만 하더라도 야초라(野草羅), 금라(錦羅), 포방라(布紡羅), 세라(繐羅), 계라(罽羅), 월라(越羅), 승천라(乘天羅) 등 다양하다. 색상, 문양, 조직, 소재 등의 특색에 따라 명명된 것으로, 야초라는 단색으로 들꽃무늬를 넣어 짠 무늬 있는 것이며, 금라는 오색실로 무늬를 짠 것이다. 그 밖에 원료에 따라 마섬유로 짠 포방라와 세라도 있고, 모섬유로 짠 계라도 있었다.
이 지역의 나 유물로는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된 작은 조각과 석가탑에서 나온 직물 조각이 있는데,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일본이나 중국 옷감과도 조직법이 거의 동일하였다.
금은 고구려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직물인데 남쪽에서도 사용되어
통일신라까지 이어졌다.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스스로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이를 무늬로 제직한 금을 당나라에 보냈다.”66)는 기록으로 미루어 4∼6세기경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문자금’의 유형이 신라에서도 생산되었다고 추측된다. 또한, “금군(錦裙)을 주고 꿈을 샀다.”67)는 기록을 통하여 금을 치마용 옷감으로 사용하였던 것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직관 부서에 금전을 별도로 설치할 정도로 금이 중요한 옷감이었다. 또한, 흥덕왕 복식금제에서는 진골부터 5두품 남녀에 이르기까지 금을 이용하여 만든 표의(表衣), 고(袴), 내상(內裳), 표상(表裳), 내의(內衣), 반비(半臂), 배당(褙襠)의 사용에 제한을 두었다.68) 이처럼 각종 의복에 사용을 금지할 정도로 금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매우 유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869년(경문왕 9)에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 소화어아금(小花魚牙錦), 조하금을 당나라에 보냈다고 하며,69) 『일본서기』에도 천무천황(天武天皇, 673∼686) 때 신라에서 하금(霞錦)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70) 중국의 문헌에도 현종 연간(712∼756)에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로부터 조하주와 어아금을 받은 기록이 있을 정도로71) 금은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특산품이었다.
대화어아금과 소화어아금은 크고 작은 꽃무늬가 직조된 아름다운 금직물이며 조하는 아침에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습을 의미하므로 조하금은 이와 유사한 조형적 특성을 보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천을 짜기 전에 실 자체에 무늬를 염색한 다음 직조하여 무늬가 아른거려 마치 아침 햇살이 퍼져 나가는 느낌을 주는 비단으로 후대에 일본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생산한 이카트가 하금에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금이 신라에서 활발하게 생산되고 널리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화된 상태로 천마총에서 발굴된 경금(經錦)이 신라 유물의 전부이며 직물 물성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다행히도 일본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팔괘배입면종(山水八卦背入面鐘)의 뚜껑에 바른 보상화문금(寶祥花紋錦)에 ‘고려금(高麗
錦)’이라 묵서되어 있어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직물임을 알 수 있으며, 무늬의 조형적 특성이 통일신라의 공예품과 유사하여 통일신라 때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모직물은 구유(氍毹), 모전(毛氈), 화전(花氈)을 들 수 있으며 당시에 이러한 직물은 지금의 양탄자와 같은 깔개 용도로 사용하였다. 773년 경덕왕은 당나라 대종(代宗)에게 신라 직공이 만든 오색전(五色氈)을 보냈다고 한다.72) 구유는 대부분 모섬유와 마섬유를 섞어 제직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씨줄에는 마사(麻絲), 날줄에는 모사(毛絲)를 사용하여 문양을 나타낸다.73) 전(氈)은 양털을 겹쳐서 열과 압력을 가하여 축융(縮絨)시킨 펠트(felt) 직물이다. 일본에서 신라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작성한 일본인의 물품 구입 신청서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는 신라의 모전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어 인기 상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일본 쇼소인에는 신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색전(色氈)과 화전을 합해 약 50점이 남아 있다. 금직물의 제직을 위해 금전이 마련되었듯이 모전은 이와 같은 모직물을 생산하기 위한 관서였을 것이다.
마직물은 신라의 가장 대중적인 옷감으로, 8월 한가위에는 연중행사로 한 달에 걸쳐 길쌈 대회를 할 정도로 베 짜는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요즈음 특산품으로 생산되는 안동포보다 더 섬세한 마포의 생산이 가능하였다. 이는 흥덕왕 복식금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진골대등(眞骨大等)과 진골녀(眞骨女)가 마포(麻布) 28승(升)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진골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12∼28승의 포를 계급별로 차등을 두어 사용을 허락하였다.
발해는 지리적 특성상 초피(貂皮)·해표피(海豹皮)·서피(鼠皮)·웅피(熊皮)·호피(虎皮)와 같은 가죽 및 모피류 등이 유명하였으며 당나라와 오나라, 일본에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출하였던 중요 품목이었다. 발해의 모피 제품은 윤이 나고 품질이 좋아 이웃 나라 귀족들이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 선호하였다.
그런데 발해의 특산물 중에는 “현주(灦州)의 포, 옥주(沃州)의 면, 용주(龍州)의 주 …….”74)라 하여 직물도 포함되었다. 특히, 상경 용천부 관하 용주가 주의 생산지로 유명하였고 잠사의 집산지였다. 또한, “발해 초기에 해마다 추포 10만 단, 세포 5만 단을 거란에 보냈다.”75)고 하며, “백저를 거란에 보냈는데 이것도 발해에서 생산된 것이었다.”라고 기록되어 포·면·주·모시는 발해에서 생산할 수 있었던 옷감임에 틀림없다.
또한, 뒤늦게 발해에 흡수된 흑수말갈에서도 748년(문왕 12)에 당나라에 60종포(六十綜布)와 어아주(魚牙紬), 조하주를 보냈다고 한다. 60종포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섬세한 직물이며, 조하주와 어아주는 통일신라의 특산품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에서 당나라로 보낸 직물이다. 당나라에 사여하였다는 기록만을 가지고 이들 옷감이 과연 발해에서 직접 생산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가까운 통일신라로부터 구입한 옷감을 발해에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발해의 직물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은 이유로 통일신라와 같이 다양한 옷감을 생산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와의 교역에서 수차례에 걸쳐 가죽이나 모피를 수출하고 채련(綵練)·금·풀솜·백·견을 수입하였으며, 일본에서 들여온 물품도 주로 견직물 종류였으므로 견직물은 발해의 중요한 수입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63) | 『삼국사기』 권39, 잡지8, 직관(職官). |
|---|---|
| 64) | 『삼국사기』 권8, 성덕왕 30년. |
| 65)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1, 연오랑세오녀(延烏郞細烏女). |
| 66) |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
| 67) | 『삼국유사』 권1, 기이1, 문무왕. |
| 68) | 『삼국사기』 권33, 잡지2, 색복(色服). |
| 69) |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9년 ; 권11, 신라본기11, 경문왕 9년. |
| 70) | 『일본서기』 권29, 천무왕(天武王) 10년. |
| 71) |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 제145, 동이 신라. |
| 72) |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4, 사불산(四佛山). |
| 73) | 周汛·高春明 編著, 앞의 책, 537쪽. |
| 74) | 『신당서』 권219, 열전 제144, 발해. |
| 75) |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권17, 식화고(食貨考)제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