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의 관대 벗김, 생애 최고의 호사스러운 평상복
혼인이 결정되면 사주단자(四柱單子)가 오가고 혼인 날짜가 정해지면 신랑 집에서는 신랑이 입을 옷의 치수를 적은 의양단자(衣樣單子)를 보낸다. 그러면 신부 집에서는 신랑의 치수에 맞추어 옷을 준비한다. 조선 후기에는 대략 도포의 치수와 신발의 치수 등을 보냈다.
신랑은 초례청에서 입었던 예복인 사모관대를 벗은 후에 신부 집에서 마련한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를 ‘관대 벗김’, ‘관대 벗음’ 또는 ‘신발 벗음’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어서 ‘큰상’을 받는다.
최상품의 관대 벗김 옷의 사례를 들어 보자. 1791년(정조 15) 6월, 가난하여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는 노총각 김희집과 노처녀 신씨의 혼례가 정조의 특명에 따라 치러지게 되었다. 관아에서는 신랑 김희집에게 갓을 비롯하여 청색 모시 도포, 흰 모시 중치막, 소창의, 한삼, 그리고 초록색 허리띠에 두록대단 두루주머니, 흰 모시 겹바지, 세포 홑바지, 흰 무명 버선, 흰 모시 행전, 초록 당사 세조대, 망건, 붉은 대모관자, 자주색 당줄까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신랑복 일습을 준비해 주었다.207)
삼베 홑바지에 흰 모시 겹바지 입은 후 한삼을 입고 허리에는 주황색 나비매듭 장식 끈을 꿴 두록색 비단주머니를 매단 초록색 허리띠를 졸라매
고 앉는다. 뽀얀 새 버선을 신고 모시 행전 둘러 바짓부리를 가뿐하게 정리하여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중치막과 푸른색 모시 도포를 맵시 있게 겹쳐 입고 허리에 은은한 광택의 상품 초록색 진사 세조대를 겨드랑이까지 올려 맵시 있게 두른다. 말끔하게 빗어 올려 튼 상투, 붉은 대모관자에 자주색 당줄 건 망건으로 눈초리가 올라가게 잡아당겨 맵시내고 날아갈 듯발 고운 갓을 쓰는구나.
옷의 종류나 형태는 시대의 유행을 따르기 마련이지만 18세기 말 김희집을 위해 고운 갓에 모시 도포까지 갖춘 신랑 옷은 조선 후기 최고의 신랑 옷차림이었다. 아마도 신랑 김희집은 이 옷을 차려입고 신랑의 위엄을 과시했을 것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반가 남자의 세련된 차림새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관대 벗김용으로 제작되는 신랑 옷은 평생 다시는 입어 보기 어려운 호사스러운 차림이었다.
| 207) | 이능화(李能和), 『조선 여속고(朝鮮女俗考)』, 한국학연구소, 1977 영인본, 12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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