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의 제도에 근거한 ‘개성 원삼’의 등장
세속에서 신부가 홍장삼인 활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법에 맞는 복식 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유학자들은 홍장삼이 예서에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중국의 옛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복식 제도로 바꾸고 싶어하였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이재가 그러한 생각을 했으며, 19세기의 박규수223) 또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인의 예복으로는 소의(宵衣)를 권장하였으며, 신부에게는 소의의 밑단에 붉은 선을 두른 염의(袡衣)를 입도록 권하였다. 중국의 소의는 흑색의 제복(祭服)으로 주나라 때 입던 옷이다. 주부가 입으며 초(綃)라는 직물을 사용하여 ‘초의(綃衣)’라고도 하였다.224) 『사례편람』에는 검은 색상의 소의에 붉은 선 장식을 한 신부용 염의와 염의에 사용하는 띠를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섶과 무가 달린 것이 마치 소매 넓은 장옷과 유사하다.
이처럼 유학자들은 부인들이 검은색 소의를 입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지만, 세속에서는 이미 이단하(李端夏, 1625∼1689) 부인의 것과 같은 녹원삼이 예복으로 확산되어 있었으므로 이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원삼에 붉은 선만 두르면 처녀의 예복을 만들 수 있으니 붉은 선을 두른 녹원삼을 신부의 예복으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가잡복고』에는 당시 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신부복을 사규삼처럼 만드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규삼과 같다고 지적한 것은 선 장식이 있는 옷일 것이므로 곧 개성 원삼225)과 유사한 형태가 된다. 즉, 염의를 염두에 두고 만든 신부의 예복일 가능성이 크다. 소매는 여러 층의 색동만 있을 뿐 한삼이 없으며 앞·뒷길의 길이 차이도 거의 없다. 이는 소매가 짧고 앞·뒷길의 길이에 차이가 없는 처녀용 배자의 특징을 살린 것이다. 개성 이외의 지역에서도 개성 원삼과 같은 신부복을 착용하였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226) 붉은 선을 두른 신부용 원삼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개성에서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