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떠돌이 예인들이 남긴 예술과 삶의 지문2. 유랑 예인의 존재 양태, 연희와 매춘다양한 패거리들

솟대쟁이패

솟대쟁이패란 이름은 심우성의 글 이외에는 확인된 바 없다. 그는 높은 장대를 세우고 연희를 하는 일종의 서커스 패로 곡예를 주로 하는 서커스의 원류라 하였다. 풍물을 치면서 무동타기 같은 곡예를 부리며 땅재주(공중회전)·얼른(요술)·줄타기(곡예 위주)·병신굿·솟대타기(물구나무서기·두손걷기·한손걷기·고물묻히기 등)를 보여 주었다.

김준근(金俊根)의 『기산풍속도첩(其山風俗圖帖)』으로 보아 이를 솟대쟁이패라 명명할 수 있다면, 전형적인 서커스꾼으로 보인다. 솟대쟁이패는 높은 장대를 중심에 세우고 줄을 늘어뜨려 놓고 곡예를 선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최영년(崔永年)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 장대에서 춤을 춘다고 하여 무간장(舞竿場)이라 하면서, “한들한들 추는 춤, 사지와 허리가 나긋나긋 열 길 되는 긴 장대 흔들리지도 않는다.”라고 뛰어난 재주를 노래하였다.316) 무간장이라는 말은 어떤 패거리 명칭이라기보다는 레퍼토리 자체를 말하는 것 같으며, 솟대쟁이패란 말도 실제로 그러한 패가 있었는지, 아니면 명칭은 없었으되 솟대 타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패가 있었는지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한계를 전제로 하면서 솟대쟁이패를 서술해야 옳을 일이다.

솟대쟁이패가 가장 완벽하게 처음 선보이는 자료는 역시 감로탱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그들의 연희는 이랬다. 풍물은 남사당 풍물과 유사하나, 무동(舞童) 등 곡예에 가까운 체기가 돋보인다. 땅재주는 불이 담긴 화로를 양손으로 앞에 들고 공중회전을 할 정도로 숙달된 재주를 보였으며, 얼른은 갖가지 요술이 있었으나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줄타기는 남사당패나 사당패의 줄타기나 재담보다 곡예 위주였다. 병신굿은 부자나 머슴이 엮는 무언극으로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면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가 병신이란 내용의 아주 해학적인 극이었다. 솟대타기는 높은 장대에 평행봉 넓이의 두 가닥 줄을 양편으로 장치하고, 그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두손걷기·한손걷기·고물묻히기 따위의 묘기를 보이는 것이었다.317)

<솟대타기>   
19세기 말에 김준근이 솟대타기하는 장면을 그린 풍속화이다. 솟대쟁이패는 높은 장대를 중심에 세우고 줄을 늘어뜨려 놓고 곡예를 선보였다.

솟대타기가 감로탱을 비롯한 제반 회화 자료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독립적인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즉, 솟대쟁이패라는 정확한 이름이 존재하였는가와 무관하게 긴 장대를 타는 전문적인 서커스꾼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론을 제기한다면, 솟대쟁이패란 명칭과 무관하게 당대의 유랑 예인들은 대부분 이런 정도의 레퍼토리는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대 예인들은 전천후 ‘탤런트’로서 많은 다중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오늘날보다 기량의 절대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필자] 주강현
316)최영년(崔永年), 『해동죽지(海東竹枝)』, 1921.
317)솟대쟁이패와 관련하여, 송순갑의 회고담(1968년 구술)이 중요하다. 심우성, 앞의 책, 99쪽 재인용 “경상도 진양이 우리나라 솟대쟁이패의 본거지로서 내가 8세 때 고아로 이 패거리에 들어갔을 때, 이우문(진주 사람)이란 사람으로부터 살판을 배웠는데…… 내가 이문우패에 들어갔을 때, 솟대쟁이패로는 하나밖에 없다고 하였으며 남사당패는 세 패가 있었다.” 송순갑의 증언 밖에는 별개의 증언이 나온 바 없다. ‘진양’이 솟대쟁이패의 본거지라는 말도, 송순갑의 개인 경험의 반영일 뿐이다. 당대의 전국 사찰에서 그려진 수많은 감로탱화 안에 솟대타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진양 지방 한 군데로 축소하여 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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