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불교 조각의 제작과 후원1. 제작 과정을 통해 본 신앙과 조형 의식의 결합

도상과 신앙의 결합, 기적을 바라는 복장물

이상의 재료와 제작 기법은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를 토대로 예술품을 제작하는 데는 그 이상의 정신성이 요구되며 신앙의 힘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나라 시각 미술의 대부분은 불교 신앙에 의한 예배 대상으로서의 미술이 많으며 이에는 신앙과 조형이라는 중요한 제약이 담겨 있다. 종교 조각은 종교적인 규범에 따라야 하며 이를 표현하기 위한 내재적이고 신앙적인 힘도 필요하다.108)

종교적인 규범이란 여래와 보살의 차이가 무엇이며 부처의 초인적인 힘을 나타내는 삼도(三道)와 백호(白毫) 등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부처가 입는 옷과 보살이 입는 옷의 차이를 비롯 하여 그 권속(眷屬)들의 의미와 표현의 차이도 알아야 한다. 이를 도상(圖像, iconomy)이라고 한다.

<금동 반가 사유상(국보 제83호)>   
삼국시대 불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부드러운 살붙임과 신비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살아 있는 듯한 표정이 특징이다. 이 상은 일본 고류지(廣隆寺) 목조 반가 사유상과 거의 비슷한 점에서 고류지 반가 사유상이 우리나라에서 건너 간 도래불(渡來佛)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종교 미술에서는 도상의 이해와 더불어 종교적인 신념이 미술에 크게 반영되는 예가 많다. 아무리 최고의 재료와 제작 기술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신앙심의 유무에 따라 작품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의 표현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신념과 체험에서 우러나는 경험이 어우러져 나타나게 된다. 이는 종교 조각에서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 사유상은 조각 기법이나 주조 기술에서의 완벽성을 기본으로 한국적인 미감과 신앙이 힘과 생명력으로 표현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얼굴에 표현된 살아 있는 듯한 부드러운 살붙임과 둥근 맛 그리고 유연한 자세와 곡선적인 손가락의 표현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는 반면, 단순한 신체에 투박한 팔과 발 등의 대조적 표현에서 세부적 정교함보다는 전체적인 형상에서의 자연스러움과 조화를 택한 조각가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다.

<서산 마애 삼존 불상>   
예배자와 눈을 마주하며 바라보는 웃음 가득한 표정이 압권으로 ‘백제의 미소’라는 고유 명사로 불린다.

신앙과 규범 이외에도 장인이 가져야 될 가장 중요한 표현 요소는 조형성이다. 조형성은 시대적 미감과 관련되며 시대적 성향은 외래 요소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여기에서 시대 양식이 성립된다. 예를 들어 같은 7세기라도 백제와 신라는 공통적인 옆면과 상이성을 보이는데, 이는 중국과의 교섭 창구가 달랐 기 때문이다. 즉, 서산 마애 삼존 불상의 본존불은 7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면서도 예배자를 앞면으로 바라보며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표정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백제의 미소’라는 고유 명사로 불릴 정도인데 중국과 비교해 보면 이전의 남조에서부터 유입된 전통적인 양식을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다.109) 그러나 같은 시기 신라의 불상은 귀여우면서도 짧은 단신의 비례에서 ‘아기 부처’라는 애칭을 가진 부처에서부터 불신을 S 자로 굴곡 있게 굽히는 자세 등 다양한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중국의 북주, 수 그리고 인도로부터 동남아시아를 거치는 남쪽 바닷길을 따라 유입된 대외 교섭의 결과이다.

<양평 출토 금동 여래 입상>   
몸체에 양감이 많은 불상으로 원통형의 목에 불룩한 배, 길쭉하면서도 퉁퉁한 얼굴에서 다른 불상과는 구별되는 작가의 개인적 성향을 작품에 담아낸 독특한 작품이다.
<운주사 천불천탑>   
1,000개의 불상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불상군이다. 도상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기존의 불상과는 달리 과감하게 생략된 추상적인 불상의 형상에서 신비로우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이 밖에 우리나라의 불상 가운데는 시대 양식에 기반을 두면서도 작가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다수 전한다. 각 장인마다의 독특한 표현 능력에 의해 나타나는 특성을 장인의 개인 양식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역시 시대 전반에 나타나는 시대 양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거창과 양평에서 출토된 불입상 두 구는 옷주름이라든지 비례 면에서 7세기의 시대성을 보이면서도, 앞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라든가 굵은 목 등에서 작가의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남 화순 운주사(運舟寺) 천불천탑(千佛千塔)도 같은 유형의 작품으로 분류된다. 이 불 상군은 도상과 시대 양식을 무시하듯 토속적이면서도 해학적이며 시대성보다는 작가, 내재적 힘, 민중적 요소들이 함축적으로 나타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불상 내 오장 육부(복제품)>   
984년에 제작한 일본 청량사 소장 목조 석가여래 입상(크기 160㎝)의 뒷면 등 부분에 28×14㎝ 크기의 복장공에서 발견된 복장 납입물 중의 일부이다. 마치 인간의 장기와 같이 비단으로 오장 육부를 만들어 몸의 제 위치에 넣었다.

불상의 신앙적인 옆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 등장하는 복장물(腹藏物)이다.110) 복장이란 불상의 몸 안에 넣는 모든 물건을 말한다. 불상의 몸 안에 물건을 넣는 복장물은 우리나라보다 먼저 중국에서 등장하였다. 즉, 송대에는 불상의 몸 안에 인간의 몸과 같은 오장 육부(五臟六腑)를 비단으로 만들어 넣거나 각종 경전 등을 집어넣어 인간과 같은 생명력을 부여하려고 하였던 전통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985년(성종 3) 일본 승려 죠낸(周然)은 비단으로 만든 오장 육부를 집어넣은 불상을 처음 일본으로 가져왔는데, 이후 일본에서도 오장 육부를 만들어 넣는 복장 전통이 생겨났다. 그리고 산시성(山西省) 잉셴안(應縣)의 불궁사 목탑(佛宮寺木塔)의 4층에 모셔진 소조 석가불 좌상의 몸 안에서도 경전, 사경, 불화, 사리, 불아 등이 발견됨에 따라 비슷한 시기에 복장을 넣는 전통이 요(遼)나라에서도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송나라나 요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유행하였던 복장물 납입 전통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고려로 전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복장물>   
동물들이 불상의 몸에 들어가 훼손하면서 우연하게 발견된 요대의 복장물이다. 불상 몸 안에서 경전, 사경, 불화, 사리, 불아, 후령 등 다수가 발견되었다. 오장 육부를 넣는 송과는 다른 법사리 전통을 보여 주는 사례로서 고려와 비교된다.

고려시대의 복장물에 대해서는 어디에 근거하여 넣으며, 무엇을 넣었는지, 왜 넣었 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통일신라 하대 이후 계속된 전란과 왕권 투쟁, 가뭄으로 인한 천재지변의 대두 등은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뒤이은 고려 역시 전쟁과 자체적 투쟁, 거란의 칩입으로 인해 민심 황폐화와 왕권의 약화가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과 더불어 불상만으로 신앙심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기복 신앙이 발달함에 따라 즉각적인 후원자의 서원(誓願)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교리적 개념이 강한 관념적 모습의 불상보다는 현현성(顯現性)이 뛰어난 즉물적(卽物的) 매개체의 형상화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사실 복장에 따른 목적을 밝힌 발원문의 내용 중에는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내용보다는 구체성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1274년(충렬왕 1)경의 서울 개운사(開運寺) 불상 발원문에는 “남섬부주 고려국 중부속 진사정동1리(南贍部洲高麗國中部屬進士井洞一里)”라는 구체적인 주소와 함께 병 없이 오래 살고 재앙이 소멸되고 재상을 만년 전하게 해 달라는 구체적인 발원을 담고 있다. 1395년(태조 4) 이전에 제작된 장륙사 건칠 보살상의 발원문에도 “간과영식(干戈永息)”이라 하여 전쟁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현실적인 바람을 담고 있다. 장륙사 보살상이 제작된 경북 영덕은 고려 말 당시 “연해 지방 중에서 가장 궁벽하고 오랫동안 왜적의 노략질이 심해 촌락이 빈터가 되었다.”라는 권근(權近, 1352∼1409)의 글처럼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으로 경제적으로 심한 곤란을 당하던 지역이었다.111)

<문수사 금동 여래 좌상 내 복장 발원문>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처음 넣은 당시 그대로 발견된 처녀 복장물의 예로 1346년에 쓴 것이다. 불상 복장물 제작에 돈을 낸 200명 이상의 후원자의 이름 및 수결 등이 5m가 넘는 긴 비단 바탕에 가득 쓰여 있다.

고려시대 복장물 가운데 처음 넣어 둔 상태 그대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예는 충남 서산 문수사(文殊寺) 금동 여래 좌상에서 나온 복장물이다. 발원문도 그대로 나와 조성 목적에서부터 후원자의 이름까지 알 수 있는 중요 한 자료이다. 이 불상의 복장 발원문은 520㎝×50㎝나 되는 긴 길이의 황백색 생초(黃白色生綃) 위에 돈을 낸 후원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위와 아래 방향에서 마치 아무렇게나 격식 없이 각자 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고려 후기만의 특징이기도 한데 자신의 이름을 잘못 써서 다시 쓰거나 삐뚤삐뚤 쓴 이름도 있으며, 이름 대신 수결(手決)을 쓴 예도 상당수이다. 이는 각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면서 원하는 바람을 직접 전달하려 한 행위로 여겨지며 복장물에 대한 신앙심의 정도를 헤아릴 수 있게 한다.

<문수사 금동 여래 좌상 복장물 중 후령>   
복장물 중의 하나인 후령이다. 작은 구멍이 나 있는 방울로 범자원권다라니 4매에 쌓여 불상의 목 부분에서 수습되었다.

이 불상의 복장물은 팔엽통(八葉筒)을 비롯해서 후령(候鈴), 오방(五方)의 곡식, 약, 향, 보석, 생사(生絲) 등 전 방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채워져 있으며, 복식과 다라니(陀羅尼)도 다수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복장물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옷의 납입이다. 옷을 넣는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였다. 1346년(충목왕 2)에 제작된 충남 서산 문수사 금동 여래 좌상 안에서 출토된 복장물 가운데 사저 교직 답호(絲紵交織搭胡)가 나왔는데 옷의 안쪽에 시주자의 이름이 먹으로 쓰여 있지만 그 목적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다.112) 이후 복장물에 옷을 납입하는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지는데, 옷을 반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고 완전한 채로 넣는 경우도 있다.

<사저 교직 답호>   
문수사 금동 여래 좌상의 복장물 중의 하나로서 답호 안에 시주자의 이름인 조돈과 유씨, 노씨 등의 이름이 묵서로 써 있으며 그 밑에는 수결도 있다.
<사저 교직 답호에 쓰인 글>   
<명주 적삼>   
목조 문수동자상의 몸 안에서 나온 세조의 어의로 추정되는 적삼이다. 세조는 등창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는데 상처 부위인 어깨 부분 등에 실제의 피고름이 묻어 있어 원래 입었던 옷을 그대로 복장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복장 복식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강원도 상원사(上院寺) 소장의 목조 문수동자상에서 나온 복장물 중 명주 적삼을 들 수 있다. 이 적삼에는 피고름이 심하게 묻어 있는데 세조가 앓던 피부병과 관련하여 세조의 어의(御衣)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13)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쓴 상원사 중창기(重創記)의 세조가 중병을 얻게 되자 왕비인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상원사를 왕실의 원찰로 삼아 중창하면서 국왕의 치병을 기원하였고,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일화와 관련된다. 1466년(세조 12) 세조와 왕비, 문무 대신들이 상원사 중창 낙성 법회에 친행(親幸)하면서 이때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병이 완쾌되었다는 것이다.114) 즉, 세조가 앓으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흔적인 피 묻은 옷을 복장물에 그대로 넣어서 병의 완쾌를 서원했고 기도 후에는 실제로 기적처럼 나았다는 이야기를 통해 옷을 넣은 당시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는 시기의 불복장에 주술성이 강한 다라니 등이 포함되는 의미 역시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해인사 목조 여래 좌상에서 나온 고려시대의 사경(寫經) 말미에 마치 부적(符籍)처럼 보이는 범어의 일종인 실단(悉檀, 싯단) 문자들이 쓰여진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무생계첩(無生戒牒)>   
불상의 복장물에서 나온 지공(指空, ?∼1363)의 무생계첩으로 조각보 지갑 안에 정성스럽게 넣어져 있었다. 계첩의 마지막 부분에 범어의 일종인 실단 문자들이 그려져 있다.
<무생계첩(無生戒牒)>   

이상과 같은 불복장물의 다양한 물목은 좀 더 포괄적인 시주의 형태를 통해 현세와 사후까지도 보장받으려는 신앙의 형태이며 무엇보다도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로 해석된다.

이로 인해 복장물 도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범죄도 있었던 것 같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낙산관음복장수보문병송(洛山觀音腹藏修補文竝頌)에 실린 낙산사 관음보살상의 복장이 침략군에 의해 없어졌다거나115) 도적이 대자암(大慈庵)에 있는 두 불상의 복장을 훔쳤으므로 도성문을 닫고 수색하여 잡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116) 남아 있다.

복장물에 대한 신앙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불상의 점안(點眼)과 더불어 복장물 납입이 중요한 의식의 하나로 지켜지고 있다. 현재의 복장물은 『조상경(造像經)』의 내용에 따라 실제로 만들어 정성을 다하여 제작하기도 하지만, 의례적인 납입으로 인식되어 이미 제작된 레디메이드 상자에 든 물목을 넣기도 한다. 이 상자는 현재 3만 원 또는 5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다.

[필자] 정은우
108)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조형성에 대해 자세하게 고찰한 논문은 김리나, 「한국의 고대(삼국·통일신라) 조각과 미의식」, 『한국 미술의 미의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59∼98쪽 참조.
109)서산 마애불의 외래적 요소에 대해서는 김춘실, 「백제 조각의 대외 교섭」, 『백제 미술의 대외 교섭』, 1998, 예경, 110∼116쪽 참조.
110)복장물에 대해서는 정은우, 「고려 후기 불상의 복장물과 후원자」, 『고려 후기 불교 조각 연구』, 문예출판사, 2007, 53∼88쪽 참조.
111)정은우, 「고려 후기 보살상 연구」, 『미술 사학 연구』 236, 한국 미술사 학회, 2002, 117쪽 : 『고려 후기 불교 조각 연구』, 문예출판사, 2007, 149쪽 재수록.
112)수덕사 근역 성보관 편, 『지심귀명례 한국의 불복장』, 2004, 14∼19쪽.
113)월정사 성보 박물관, 『유물로 보는 오대산 문수 신앙』, 2004, 62쪽.
114)문명대, 「상원사 목문수동자상의 연구」, 『월정사 성보 박물관 학술 총서』, 월정사 성보 박물관, 2001 : 『한국의 불상 조각-삼매와 평담미-』 4, 예경, 2003, 349∼359쪽 재수록.
115)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5, 「낙산관음복장수보문병송(洛山觀音腹藏修補文竝頌)」.
116)『세조실록』 권23, 세조 7년 1월 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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