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03. 우윳빛 달항아리에 푸른 새가 날고

[필자] 방병선

숙종 말기 정치, 경제적 안정에 힘입어 분원제도 정비가 완성되면서 그릇 생산도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백자의 색상도 회백색에서 정갈한 유백색으로 변하였으며 뽀얀 바탕의 표면에 우아한 필치와 화격(畵格)이 풍겨 나오는 문양이 그려졌다.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철화백자포도문항아리는 상하로 접합된 것으로 한 폭의 묵포도도를 연상시키는 포도가 시문되었다. 항아리 상반부에 횡으로 길게 늘어진 가지와 포도알, 포도잎이 어우러진 전체 구도는 16세기 황집중과 이계호의 포도도와 유사하다. 잎맥의 표현에서 보이는 정교함과 가지의 굴곡과 구도, 선명한 포도알 하나하나에 나타난 철화, 농담 조절에 의한 묵법의 변화는 정제가 잘된 유백색의 유색과 어우러져 회백색의 백자가 유행하던 17세기와는 다른 새로운 국면을 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포도가 지니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명 초기 명필가이자 포도 그림의 명가로 활약하였던 악정(岳正, 1418∼1472)이 쓴 「화포도설(畵葡萄說)」에서 포도를 청렴함과 강직함, 겸손과 화목 등의 사군자에 버금가는 것으로 인식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277)

<철화백자포도문항아리>   
조선 백자는 번조 후 수축률이 20%에 가깝고 강도가 그리 높지 않아 대형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는 상하 접합 방법을 이용한 대형 항아리의 제작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이는 원료 정제와 성형 기술 발전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조선 18세기 전반, 국보 제107호, 높이 53.8㎝.]

숙종기를 지나 흔히 문예부흥기라 부르는 영·정조기에 들어서면 정치·경제적 안정과 학문과 예완(藝玩)을 겸비한 군주들의 후원을 바탕으로 조선백자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수요층이 확대되었고 문인풍의 양식이 개화를 맞이하였다. 1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던 철화백자뿐 아니라 청화백자와 동화백자, 또한 두 가지 이상의 안료를 사용한 그릇들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한편, 18세기 중반부터는 많은 수는 아니지만 왕실 행사에서 중국 그릇의 사용이 발견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영조 35년(1759) 『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는 당보아(唐甫兒), 당대접, 당사발, 당종자 등의 기록이 등장하고,278) 당사기고(唐沙器庫)가 1칸이 별도로 마련되었다.279) 이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던 1795년에는 분원의 각종 갑번자기뿐 아니라 화당대접, 화당사발, 화당접시, 채화동사기(彩花銅沙器)가 사용되었다.280) 이를 통해 영조와 정조 모두 사치풍조를 염려하여 청화백자와 갑번자기 등의 제작 금지를 명하고 중국 자기의 사용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위하여 각종 연회에서 이들 그릇이나 이들 그릇을 모방한 그릇을 사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필자] 방병선
277) 백인산, 「선조연간 문인화 삼절-황집중, 이정, 어몽룡」, 『간송문화』 65, 한국민족미술연구소, 2003, pp.103∼112.
278)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 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4, p.117, p.156, p.197, p.245 ;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 하, p.11, p.72, p.134, p.142.
279)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 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4, p.196.
280) 『승정원일기』 1746책, 정조 19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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