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03. 우윳빛 달항아리에 푸른 새가 날고

저변 확대와 장식화의 심화

정조 연간에는 무엇보다 서울의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사대부, 중인 등의 생활 관습도 변화하였다. 이들은 분재를 키우거나 서책과 그림, 골동을 수집, 완상하고 차를 마시며 여가를 즐기는 도시민의 취미활동을 영위하였다.300) 특히, 중국 골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당시 북경을 다녀온 연행 사신들의 연행일기에 중국의 도자와 골동 등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많은 물건들을 구입해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듯이 중국 도자에 대한 열망이 강하였다.301) 중국의 골동을 제대로 고르기 위해 사는 장소와 구입 방법에 대해 조언을 주고받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302)

<화유옹주(和柔翁主)묘 출토품>   
영조의 열 번째 따님인 화유옹주묘에서 출토된 일군의 청화백자와 분채황지장미문병은 당시 중국 자기에 대한 조선 사회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화유옹주(1740∼1777)의 부군인 황인점은 1732년에 태어나 1753년에 귀인 조씨의 딸인 화유옹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었고, 1802년에 타계하였으므로, 이들 그릇은 영조 후반에서 정조 연간 황인점이 연행 당시 구입하였거나 선물로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국립고궁박물관, 중국 청 18세기 후반, 높이 14.3㎝.]

이러한 분위기는 당연 조선백자에 영향을 미쳐 더욱 화려하고 장식적이거나 중국 자기의 장식을 모방한 양식이 등장하게 만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양각이나 첩화기법을 사용하여 장식을 더하거나 마름모꼴, 사각형 등으로 형태를 변형시키고 그릇 전체에 채색 안료를 칠하고 백자 유약을 시유하기도 하였다.

한편, 영조 이래 사치품으로 규정된 청화백자와 갑발에 넣어 구운 그릇들은 검소함을 덕으로 여긴 정조에 의해 호된 규제를 받기도 하였다. 정조 17년(1793)에는 갑발에 넣어 구운 그릇과 청화백자 같은 기이하고 교묘한 그릇들을 다시는 번조하지 말라고 하였고,303) 정조 19년(1795)에도 갖가지 기교가 나타난 갑발에 넣어 구운 그릇들이 제작되어 이를 정식으로 다시 금지하였다.304) 정조의 정책 배경에는 분원에서 원래 진상하는 자기 이외에 별도로 제작하는 별번자기와 갑발에 넣어 굽는 갑번자기의 생산 증가에 따른 분원 장인들의 고통을 덜어줌과 동시에 사치품 생산 억제를 통한 물가 조절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05)

그러나 왕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분원 경영에 깊이 관여하였던 종친 제조들은 이전처럼 사익을 위해 시책을 어겼으며 일부 관리들 은 기교자기의 제작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었다.306)

당시 분원에서 생산된 백자의 종류는 더욱 다양해서 제기와 항아리와 병 같은 저장기, 각종 크기의 사발, 대접, 접시, 종지 등이 반상(盤床)을 이루어 진상되었다.307) 특히, 반상기의 유행은 경제적인 여유와 다양해진 식생활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백자의 장식은 기교와 화려함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았다.

장식적인 분위기와 기교는 왕실을 상징하는 운룡문청화백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정조기 청화백자운룡문항아리들은 궁궐 행사가 빈번해지면서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높이가 50㎝를 넘는다. 이러한 대형의 백자는 당연 의례용으로 궁궐의 연회에 꽃을 꽂는 화병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용의 선묘도 17세기보다 훨씬 정교하고 농담 표현도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구름이나 종속문도 채색이 가해져 선묘만으로 이루어진 17세기 철화백자와는 사뭇 다르다.

<청화백자운룡문항아리>   
용의 발톱 수는 원래 중국 황제를 상징할 때 5개, 황태자는 4개, 왕은 3개였으나 조선백자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주로 3개만 나타나다가 17세기 후반 이후에 조선의 분위기와 중국과의 관계를 말해주듯 5개와 4개 짜리가 등장하였다. 이 항아리는 크기도 상대적으로 작고 발톱 수도 적어서 아마도 왕세자용이 아닐까 추정된다.[일본 고려미술관, 조선 18세기 중반, 높이 43.5㎝.]
<청화백자운룡문항아리>   
대형의 운룡문항아리로 여의두문이 보다 화려한 영지 문양으로 바뀌었으며, 하부 종속문은 3단으로 증가되었다. 육중한 몸무게를 지닌 것 같은 용은 움직임이 둔화되어 엉금엉금 여의주를 쫓아가는 형상이고 눈은 동그랗고 작은 안경을 낀 모습이다. 5개의 발통이 선명한데 이는 왕실 연회용 백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8세기 후반, 높이 54.6㎝.]

예를 들어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 청화백자운룡문항아리는 사실적인 표현과 정교한 붓질이 입체적이고 화려한 용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구연부가 직립한 당당한 풍채의 항아리로 18세기 청화백자에 자주 등장하는 문양 구도인 하단부에 두 줄의 지선을 그어서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 용과 구름을 그려 넣었다. 여의두문을 상부에 종속문으로 배치하고 그 아래 바람에 날리어 뒤로 빗겨진 갈기와 수염을 가진 용을 묘사하였다. 비늘과 수염에 나타난 정교한 선묘와 농담 조절에 의한 비늘의 입체감이 잘 살고 있으며 쭉 뻗은 다리와 날카로운 발톱은 용의 위엄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청화백자산수문병신명(丙申銘) 팔각병>   
이 병은 굽바닥에 정조의 즉위년인 ‘병신(丙申)’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어 177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색은 연한 청백색에 팔각의 두툼한 병으로 키는 작은 편이다. 3면에 걸쳐 능화형을 앞뒤로 그리고, 그 안에 소상팔경 중 산시청람과 동정추월의 두 장면을 각기 시문하였다.[삼성 미술관 리움, 조선 1776년, 높이 22.2㎝.]

소상팔경문은 정조 연간에도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능화형 안에 산수문을 그려 장식적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문양의 각 요소들이 일부 도식화되거나 생략이나 변용이 더욱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소상팔경문 이외에 적벽부도(赤壁賦圖) 같은 산수문이 그려지거나 길상문양 등과 합쳐져 산수 본연의 은둔이나 와유보다는 장식적인 효과가 더욱 중시되었다.

또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듯 이 시기 백자에는 장식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길상적 의미의 상징 도안을 첨가하거나, 아예 수(壽)·복(福) 두 글자를 도안화하여 문양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글자 도안은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백수백복(百壽百福)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전서나 해서체의 문자를 사각 테두리 안에 넣어 여백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길상 문양으로는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와 복숭아,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봉황이 그려졌고 당시의 서정성을 반영하듯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관상용 장미가 홍 채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청화와 산화동, 석간주 중 두 가지 이상을 동시에 사용하는 기법은 항아리나 병뿐만 아니라 연적과 필통 같은 문방구에도 행해져 화사함을 더해 주었다.

<청화백자동채복숭아형연적>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 형태의 연적으로, 복숭아 위에 앉아 있는 매미는 별도로 조각하여 부착하였다. 유백색 백자에 청색의 매미와 잎, 녹홍색의 가지까지 한껏 기교를 부린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중국에도 유사한 모티프의 연적이 있지만, 비례와 색상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삼성 미술관 리움, 조선 18세기, 높이 10.8㎝.]
<청화백자까치호랑이문항아리>   
조선시대 까치 호랑이는 새해를 맞이하여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 여러 상징물 중의 하나였다. 그림으로 그려 세화(歲畵)로 선물하거나 집의 대문에도 그림을 붙이기도 하는데, 이 경우 그림을 문배(門排)라 부른다. 호랑이는 이미 17세기 철화백자에서도 보았듯이 해학적인 모습으로 도자기에 그려진다.[국립중앙박물관, 조선 18세기, 높이 42.5㎝.]

정조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 문양에는 동 시기 민화나 궁중화에 보이는 것들도 있다. 이런 문양들은 대개 화려한 화조화나 까치, 호랑이 등의 영모화가 대부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화백자까치호랑이문항아리>의 문양은 각 모티프의 길상적 의미뿐 아니라 까치와 호랑이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 설화와의 결합에 관심이 가는 문양이다. 먼저 구도를 보면 이단 횡선의 상하에 문양을 배치하고 횡선 아래에는 변형 여의두문만을 시문하였다. 상단에는 세밀하게 붓질한 길게 뻗은 소나무가지가 화면 중단까지 내려와서 잔뜩 얼굴을 찡그린 호랑이의 머리와 닿을 듯한 지경에 이르렀고 바로 위 가지에는 유유자적한 까치가 앉아 있다. 이 도상 과 동일한 문양이 민화에 시문되어 이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청화백자송죽록문항아리>   
복록수(福祿壽) 중 장수를 상징하는 육상과 수상, 천상의 상징물들이 모여 이룬 것이 십장생이다. 조선시대에는 새해 왕이 신하들에게 십장생 그림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병풍으로 제작되어 왕실에 장식되기도 하였다.[일본 고려미술관, 조선 18세기 말, 높이 42㎝.]

그런가 하면 장수를 상징하는 길상문들이 집단을 이룬 십장생이 이 시기 청화백자에 등장하였다. 고려미술관 소장 <청화백자송죽록(松竹鹿)문항아리>는 십장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요소를 거의 갖추고 있는 항아리다. 직립한 구연부에 상하 접합기법으로 완성한 풍만한 항아리로 어깨에는 여의두문 종속문대를 그렸고 그 아래 소나무와 사슴, 영지, 구름, 대나무를 준수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가장 눈에 띄는 소나무는 수직으로 뻗은 나무에 수평으로 길게 늘어진 가지와 방사선 형태의 솔잎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러한 구도와 필치는 단원 김홍도의 소나무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소나무 뒷면의 대나무는 조선 전기와 달리 마치 버드나무 와 같은 죽엽과 죽간을 묘사하여 화풍의 변화를 더욱 느끼게 한다.

결국 18세기 청화백자에 나타난 문양들은 동시대 화보 등을 참조하면서 이전과 다른 수요층의 미감을 잘 반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 운룡문과 매조문, 송죽매문 등이 주를 이룬 반면, 17세기 철화백자의 운룡문과 초화문, 당초문 등이 18세기 들어 산수문의 등장과 함께 사군자와 보다 다양한 길상문 등으로 대체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또한, 필치와 구도, 농담 등은 당대 회화의 경향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도자만이 갖는 표현의 특수성을 잘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 방병선
300) 정우봉, 「강이천의 한경사에 대하여」, 『한국학보』 75, 1994, pp.43∼45.
301) 이압, 『燕行記事』, 聞見雜記.
302) 박지원, 『열하일기』, 「盛京雜識·古董錄」.
303) 『정조실록』 권38, 정조 17년 11월 병진.
304) 『일성록』 정조 19년 8월 6일.
305) 『정조실록』 권48, 정조 22년 3월 28일 임진.
306) 『일성록』 정조 19년 8월 1일.
307) 『승정원일기』 1737책, 정조 18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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