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조선 진경의 정수, 후기 백자

04. 청화 반상기를 수놓은 길상문

[필자] 방병선

19세기는 정치, 경제, 사상적으로 급변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세도정치가 자리를 잡으면서 소수 문벌들이 정치를 좌우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한 소비가 이루어지고 국경 무역은 더욱 성행하였다. 고증학의 유행과 더불어 청 문물 선호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왕실을 비롯한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 일컬어지는 서울 거주 사대부와 중인 계층은 거듭된 연행(燕行)과 수입 중국 문물에 경도되어 새로운 기호의 백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수요층이 다양화되고 선호하는 자기의 장식이 이전과 변화하면서 이들의 기호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도자 양식도 19세기 들면서 새로운 경향을 띠게 되었다. 과장과 장식, 실용이라는 주제어가 어울릴 정도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제작뿐 아니라 유통도 다양화되어 분원자기뿐 아니라 지방 사기와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된 자기를 사고파는 사기전(沙器廛)이 서울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한편, 왕실의 공식 연회에도 18세기 말부터 중국 그릇이 등장하였는데 19세기 들어 그 수와 종류가 급격히 늘어나서 이전과 다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먼저 순조 27년(1827)의 진작(進爵)에서는 중국 그릇인 당사발(唐砂鉢)이 410개 사용되었다.308) 1828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사순(四旬)을 경축하기 위해 거행된 진작에는 중국 그릇과 유사한 모란화준과 헌천화병, 화병 등이 사용되었다.309) 다음 1848년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을 축하하기 위해 베풀어진 진찬에는 모두 9,465개의 자기가 소용되었다.310) 이 중 중국 그릇은 520개로 순조 27년(1827)에 비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어 고종 연간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회갑연을 위해 열린 1868년 진찬에는 총 5,593점의 그릇이 쓰였고,311) 이 중 중국 그릇은 345점이었다.312) 고종에게 존호를 올린 것을 축하하기 위해 거행된 1873년의 진작시 사용된 중국 그릇은 485점이었다.313) 그러나 고종의 보령 망오(望五)를 축하하기 위해 거행된 1892년의 진찬에는 총 48,159개의 자기가 사용되었지만,314) 일본 그릇인 ‘왜화자기(倭畵磁器)’가 새로이 등장하여 강화도 조약 이후 변화된 대외 환경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양식적으로는 중국 자기의 기형을 모방한 병과 항아리, 길상적 문양을 위주로 한 과장된 문양 시문과 포치, 중국 채색자기를 흉내 낸 청화와 철화, 동화의 혼용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이전 시기의 산수문 이외에 다양한 길상문이 선을 보였고 화조문과 기하문 등이 장식 문양 소재로 이용되었다. 또한, 반상기의 유행과 함께 다양한 음식기명이 선을 보였고 크기와 품질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 유통되었다.

<진찬의궤 화준(규장각 14372, 1848)>   
조선시대 왕실 연회 장소의 한 가운데 놓이는 화준이 중국 자기라는 사실은 중국 자기에 대한 왕실의 취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화준처럼 몸체 가득 연화당초문과 박쥐문 아래 ‘쌍희(囍)’자가 시문된 것은 동일한 청대 자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백자의 유통과 관련하여 끌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한글로 간지·사용처와 시기·수량 등을 표기해 놓은 일련의 접시와 합·발 등이 있어 주목된다. 이들 명문백자들은 주로 헌종(1834∼ 1849) 이후 나타나는데, 한글 명문은 백자뿐 아니라 왕실용 목기와 칠기 등 기타 공예품에도 동시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바닥이나 측면에 한글로 수량과 최종 진상처, 시기 등이 정각되었다.315) 정각을 한 이유는 당시 궁궐의 각 사와 전에서 소용되는 자기들은 상호 대여해 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때 분실을 방지하고 제대로 돌려받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대여 관습은 이전부터 있던 것이지만 이 시기 들어 중간 유실의 증가로 보다 눈에 띄기 좋게 표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청화백자임자큰뎐고간오명사각접시>   
한글 명문으로 임자년인 1852년 대전 곳간에 사용된 다섯 개의 접시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들 한글 정각자기는 대부분 가례와 궁의 신축을 기념하는 연회에 주로 사용된 별번(別燔)의 고급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명문을 새긴 것도 분원에서 제작할 당시가 아니라 이들 자기들이 최종적으로 진상된 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일본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조선 1852년, 높이 2.8㎝.]
[필자] 방병선
308) 『慈慶殿進爵定例儀軌』 정해(규14362) 권2, 기용조.
309) 『戊子進爵儀軌』(규14364) 권2, 기용조.
310) 『戊申進饌儀軌』(규14371) 권2, 기용조.
311) 『戊辰進饌儀軌』(규14374) 권2, 기용조.
312) 『무진진찬의궤』권2, 찬품조 .
313) 『癸酉進爵儀軌』(규14375) 권2, 기용조.
314) 『壬辰進饌儀軌』(규14428) 권2, 기용조.
315) 한글 명문 자료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조된다. 나선화, 「분원리요 말기 청화백자에 나타난 명문 자료」, 『광주 분원리요 청화백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94, pp.106∼107 ; 최경화, 「편년자료를 통하여 본 19세기 청화백자의 양식적 특징」, 『미술사학연구』 212, 1996, pp.77∼107 ; 장경희, 『조선왕조 왕실가례용 공예품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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