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02. 세시 풍속의 계급적 성격

[필자] 정승모

세시 풍속은 그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내용은 물론 그 성격도 달라질 수 있다. 앞서 『수서』의 예에서처럼 고구려의 왕은 놀이판에 직접 들어가 민중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시대가 내려올수록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그와 같은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갔다. 고려 말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禑王)은 단오 때 시가의 누정에 올라 격구 등 잡희를 관람할 수 있었으나(『高麗史』 卷134, 列傳47, “禑以端午登市街樓觀擊毬火炮雜戲”), 이는 조선의 국왕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관료화가 더욱 진행된 조선 후기에는 같은 지배 계급이지만 도시 생활을 해온 고위 관료들과 지방의 양반들 간에도 세시에 대한 인식과 경험에서 차이가 났으며, 후자의 경우도 농민들의 행사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대응하였던 것 같다.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외관으로 나간 사대부들이 지방에 머물면서 보거나 겪은 세시 풍경들은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대부분 낯선 것들이었다.

민간의 풍속을 긍정적으로 보는가 아니면 미신적이고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가는 양반 사족들 사이에서도 서로 인식의 편차 가 있었지만 <격양가(擊壤歌)>에서 볼 수 있듯이 농사의 수고로움에 대해서는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므로 세시 풍속은 군왕과 사대부, 그리고 일반 백성의 3자 관계에서 보면 우선 각각의 세시 행사가 있는 반면 군신(君臣)과 민(民)이 구별되는 것, 군과 신민(臣民)이 구별되는 것, 그리고 군신민 모두가 공통되는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식과 추석은 대표적인 속절이기도 하지만 묘제(墓祭)가 보편화하면서 군신민 모두가 지켜온 세시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식을 맞아 이우(李堣, 1469∼1517)는 “온 나라 백성들이 조상 무덤을 찾는 때 산소마다 소지한 재 날리네(擧國民風上塚時 墦間多見祗灰飛).”(『송재집(松齋集)』, 「洪川寒食」)라고 하였다. 뒤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조선 후기에는 오랜 전통이기도 한 추석이 한식을 앞지르고 가장 보편화된 세시 명절이 된다.

농사일이 끝나고 민중의 축제가 벌어지는 백중날은 망혼일(亡魂日)이라고 부른다. 여염 백성들은 이날 달밤에 채소·과일·술·밥 등을 차려놓고 돌아가신 어버이 혼을 불러 제사를 모신다(備蔬果酒飯 招其亡親之魂也). 이날 사대부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박은(朴誾, 1479∼1504)의 문집을 보면 그는 이날 서울 잠두봉(蠶頭峯) 아래에서 3명이 모여 “뱃놀이를 하며 보냈다”(『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題蠶頭錄後」).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7월 15일은 세속에서 백종(百種)이라 하여 시골 백성들이 부모를 위해 영혼을 불러다가 제사를 지낸다(七月十五日 俗號百種 村民爲父母招魂以祭之)”고 하였다(『서애집(西厓集)』, 「百種」). 이는 뒤집어보면 자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제봉집(霽峯集)』에서 이날의 우란재(盂蘭齋) 행사는 조선 이전의 비속(鄙俗)이라고 하여(中元日雨 好是金風玉露時 中元佳節雨偏奇 … 盂蘭舊俗雖堪鄙 君子應添怵惕思)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중원이 농민들의 여름철 축제일이면 상원(上元), 즉 정월 보름은 농민들의 겨울철 축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와 그 까닭을 묻자 달을 점쳐보니 길하다 하여 그런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는 “길흉(吉凶)이란 선비를 얽매어 어둡게 하는 것(吉凶覊士昧)”이라고 하였다(『소재집(蘇齋集)』, 「上元」). 김종직도 이날이 농가에서 달을 보고 농사점을 치는 날(農家 是日望月占年)임을 알았지만 행사와는 무관하게 하루를 보냈다.(『점필재집(佔畢齋集)』, 「上元」).

그러나 재경(在京)사족들과는 달리 향촌에 거주하는 재지사족들은 농사와 관련하여 농민들과 좀더 밀착되어 있었다. 기준(奇遵, 1492∼1521)은 “향촌에 살던 어느 해 정월 보름 저녁에 농사일을 이야기하면서 달이 뜨는 것을 기다리는데, 달이 뜰 때에 높고 낮음으로 풍흉을 미리 알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달이 낮게 떠서 금년도 매우 걱정스럽다(月出有高卑 年年踰水旱 豐凶先自知 此月出亦卑 今年深可憂)….”(『덕양유고(德陽遺稿)』, 「上元」)고 하였다.

재지사족의 농촌 생활에 대한 적응은 농사 방식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강석기(姜碩期, 1580∼1643)는 정치에 불만을 품고 고향 경기도 금천으로 내려갔는데 대략 1617년부터 1622년 사이다. 그는 하향한 후에 농사와 잠사에 뜻을 두었으나 요령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노복의 말을 듣고 배웠다. “노복이 아침에 와서 말하기를 농촌에는 봄에 할 일이 많다. 소를 먹여 황폐한 땅을 갈고 말을 목장으로 몰고 비가 내리면 우선 논에 가두고 누에가 자면 뽕나무를 채취해야 한다(老僕朝來告 田家春事忙 飯牛耕廢地 驅馬牧荒場 雨足先留稻 蠶眠必採桑).”(『월당집(月塘集)』, 「春事忙」).

4월 초파일 경우는 조선시대에서도 전기와 후기가 달라 전기까지는 군현 전체가 행하는 행사였던 것이 후기로 가면 일반민들만의 잔치가 된다. 조선 전기를 살았던 김종직은 “초파일에 수령을 비롯 한 관아 사령들과 백성들이 모두 장등(長燈)을 하는데 어긴 자는 벌을 내렸기 때문에 기름이 없는 백성들은 솔기름으로 겨우 횃불을 밝힐 수 있었다(縛松明炬於長竿上達夜).”(『점필재집』, 「四月初八日」)고 하였다. 이행(李荇, 1478∼1534)은 초파일에 관등 행사를 즐겨 보았으며, 칠석을 노래한 시에서는 유술(儒術)로는 부족하여 복서(卜書)를 보게 된다는 내용도 있다. 속절로 간주되는 추석을 즐겨서 지우(知友)들과 중팔완월회(重八翫月會)를 만들기도 하였다(『용재집(容齋集)』). 그는 농사를 권면(勸勉)하는 뜻을 높이 평가하여 입춘날에 토우(土牛)를 만드는 데에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기우제 때 토룡(土龍)을 제작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내려오면 지배층들은 그날이 초파일인 것은 알지만 무료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유두(流頭) 천신(薦新)은 단오와 마찬가지로 시기가 내려오면서 양반들의 속절 행사에서 제외되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이들은 유두일이 되면 그 유래나 수단떡(水團餠)의 제조 과정 등을 형상화하는 등 관심을 보였을 정도로 그 전통은 지속되었지만 후기에 오면 이날에 대한 언급 자체가 드물거나 사라진다. 그리하여 유두는 민간의 속절로만 남게 되는 듯이 보이나 이날 임금도 차가운 수단떡을 먹는다고 하여 한편으로는 궁중에서 이러한 전통을 귀중히 여겨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민속이 단순히 지배층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여 확대·재생산하는 낮은 단계의 문화 수준이 아니라 역으로 지배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필자]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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