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호환(虎患)과 사냥

조선시대 군사체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호랑이 사냥부대의 창설과 활동이다. 고려와 달리 조선왕조는 정규군 이외에 별도로 호랑이 사냥을 위한 전문 부대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호환’이라고 불리는 호랑이(범)나 표범의 피해를 막기 위해 호랑이 사냥부대를 만들어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爲民除害)’함으로써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민본과 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375)
원래 동아시아에서 호랑이 피해의 연원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맹자가 일찍이 “가혹한 정사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라고 표현했듯이, 자연 공간속에 동물과 공존하는 인간에게 호환의 피해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호랑이의 주 서식지로 알려진 만주와 한반도를 무대로 살아온 한민족에게도 호환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호랑이는 ‘산림의 짐승’이라는 말처럼,376) 산림이 우거진 숲속에서 서식하였다. 따라서 전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인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의 출몰과 피해는 도성과 궁궐로부터 각 지방의 곳곳에서 그칠 날이 없었다.
그 결과 호환에 대한 공포와 우려는 일찍부터 호랑이신에 대한 민간 신앙을 발달시키는가 하면 각종 신화와 전설, 그리고 민담과 속담 등 수많은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또한, 호환을 피하기 위해 도시의 한옥 구조를 폐쇄형인 ‘ㅁ자’나 ‘ㄷ자’ 형태로 지어 집 밖과 완전히 차단하는 등 생활상의 많은 영향을 미쳤다.377)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왕조가 바뀌어도 호환이 줄어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가장 무서운 일이 ‘호환·마마(천연두)’라는 표현까지 생겨날 정도로, 조선시대에 호랑이의 피해는 가장 큰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로 호랑이가 먹고 남은 시신을 모아 장례를 치르는 호식장(虎食葬)이나 그 영혼을 달리는 범굿이 민간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불교 사회였던 고려와 달리 유교적 민본주의를 내세운 조선왕조는 사람과 가축에게 해를 끼치는 호랑이·표범과 같은 사나운 맹수를 제거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왕조가 개창하자마자 ‘착호갑사(捉虎甲士)’ 또는 ‘착호군(捉虎軍)’과 같은 별도의 부대를 창설하여 포상 제도를 실시한 까닭도 ‘호환’을 줄여 민생과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전근대사회에서 호환은 단순한 사회문제를 넘어 정치적·군사적·경제적·신앙적 측면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아래 일본인 사냥꾼들에 의해 호랑이가 대거 남획되면서 점차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호랑이에 대한 공포는 비단 전근대 사회로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 어릴 시절 서울 토박이인 할머니께 간혹
밤에 울 때 ‘호랭이가 물어간다.’는 말씀을 듣고 울음을 그치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인들은 어린 시절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아마 호환에 대한 잔재가 얼마 전까지도 한국인의 심성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