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족·친족과 여성
고려 때의 가족제도를 살펴감에 있어서는≪고려사≫등에 전해지는 단편적인 자료들에 의해서 물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몇몇 호적이나 호구단자·准戶口 등은 주로 후·말기의 것들이다.342) 그러므로 고려 전기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들 자료를 이용하는 데는 조심스런 면이 없지 않다고 하겠는데, 그러나 가족제도의 경우 두 시기 사이에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지금의 연구자들도 호구자료들을 많이 활용하고 있지마는, 거기에 의하면 우선 가족의 유형으로는 소가족도 있고 대가족 내지 중가족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혹자는 고려 때 가족의 기본형태가 소가족이었다고 보기도 하고,343) 혹자는 대가족 내지 중가족 형태가 많았다고 보고도 있는344)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견해차는 자료의 해석과도 관계가 있다. 소가족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가족에 이미 혼인했음직한 구성원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대가족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자료 역시 소가족들을 하나의 戶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 사회 전반의 문제와 관련시켜 천착함으로써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데 우리들은 이들 가족 구성에서 특히 조선시대와 견주었을 때 매우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여성이 호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녀가 여럿인 경우 딸이 아들보다 나이가 위면 딸부터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혼인한 딸이 친정 부모와 한 가족을 구성하는, 바꾸어 말하면 사위가 장인·장모와 가족을 구성하여 모시는 率婿家族이 흔히 보인다는 것 역시 커다란 차이점이다. 이 후자는 “男歸女家”·“婿留婦家” 등으로 표현된 혼인의 습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마는, 어떻든 고려 때는 가족 가운데에서 여자의 지위와 역할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345)
가족의 형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혼인이 한 중요 계기가 되거니와, 고려시대의 그 연령은 개인에 따라 차별이 컸지만 대체적으로 여자는 16∼18세 전후, 남자는 20세 전후였던 듯하다.346) 그리하여 이들은 대개 一夫一妻制에 입각한 가정생활을 영위했던 것 같다. 기사 가운데는 多妻의 습속이 있었던 듯한 서술도 보여 이를 긍정한 논자도 있으나347) 그것은 예외적인 사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서 원칙적으로는 일부일처제였음이 재확인되고 있다.348) 이와 같은 제도 아래에서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남편과 사별하였을 경우 再嫁도 자유로웠다.
近親婚 내지 同姓婚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후대와는 다른 고려 때 혼인 풍습의 하나였다. 왕실에서 극도의 근친혼을349) 했다 함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거니와, 양반·귀족층에서도 이와 유사한 혼인이 성행했던 것이다. 內外 4촌간이나 6촌간에 혼인을 하지 말라는 禁令이 자주 내려지는 것으로 미루어 그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이들 금지 조항은 주로 양반층을 대상으로 한 것에 불과하고 일반 백성들은 혼인에 있어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혼인이 이와 같았으므로 동성혼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동성동본혼의 사례가 찾아지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350) 고려 때의 婚俗은 여러 모로 특징적인 면이 많았다고 하겠거니와, 여성이라 하여 불합리한 억압을 받는 일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지위가 이처럼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사실은 재산의 상속에도 드러나 있다. 고려 때의 가장 중요한 재산의 하나인 노비는 자녀에게 균분상속하도록 되어 있었으며,351) 민전과 같은 개인 소유지의 상속형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352) 부모의 의지가 적힌 文契가 있거나 “田丁 連立”이 되던 군인전 등은 이와 상속의 형태가 좀 달랐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財産·家業은 子女에게 균분상속되었던 것이다.
고려는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사회였으므로 그것이 친족조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친족조직은 相避制나 5服制度 및 호적에 있어서의 世系推尋 범위 등을 통해 살필 수 있는데, 그 하나로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음으로 해서 관직 취임 등에서 서로 피해야 하는 범위를 규정한 상피제는353) 本族뿐 아니라 外族·妻族도 상당한 범위에 걸쳐 포함시켜 놓고 있다. 아울러 주로 4祖戶口式과 8조호구식을 채택하고 있던 세계추심과354) 喪服을 입는 기간의 장단에 따라 친족관계의 親疎를 5등급으로 나누어 나타내던 5복친제에서도355) 母側과 妻側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연구자는 고려의 친족조직을 ‘兩側的 親屬’의 구조로 파악하고 있거니와356) 그에 따른 기능도 후대의 사회에서와는 여러모로 달랐음을 지적하고 있다.357) 고려의 가족제도 역시 남다른 특성을 지닌 것이었다.
342) | 許興植,≪高麗社會史硏究≫(亞細亞文化社, 1981). 吳英善,<高麗末 朝鮮初 戶口資料의 形式 分類>(≪韓國古代中世古文書硏究(下)≫, 서울대출판부,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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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 | 李佑成,<高麗時代의 家族-친족집단·사회편제 문제와의 관련에서->(≪東洋學≫5, 1975:≪韓國의 歷史像≫, 創作과 批評社, 1982). 崔弘基,<高麗時代의 戶籍制>(≪韓國 戶籍制度史 硏究≫, 서울대출판부, 1975). 盧明鎬,<가족제도>(≪한국사≫15, 국사편찬위원회, 1995). |
344) | 許興植,<國寶戶籍으로 본 高麗末의 社會構造>(≪韓國史硏究≫16, 1977:≪高麗社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81). |
345) | 崔在錫,<高麗後期家族의 類型과 構成-國寶 131號 高麗後期 戶籍文書 分析에 의한 接近->(≪韓國學報≫3, 1976:≪韓國家族制度史硏究≫, 一志社, 1983). 金銀坡,<高麗時代 法制上 및 社會通念上에서의 女子의 地位>(≪全北史學≫3,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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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 許興植,<高麗時代의 親族構造>(≪高麗社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81). 盧明鎬,<高麗의 五服親과 親族關係 法制>(≪韓國史硏究≫33, 1981). 崔在錫, 앞의 글(1982). |
351) | 旗田巍,<高麗時代における土地の嫡長子相續と奴婢の子女均分相續>(≪東洋文化≫22, 1957:≪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
352) | 崔在錫,<高麗朝에 있어서의 土地의 子女均分相續>(≪韓國史硏究≫35, 1981;≪韓國家族制度史硏究≫, 一志社, 1983). 李羲權,<高麗의 財産相續形態에 관한 一考察>(≪韓國史硏究≫41, 1983). |
353) | 許興植, 앞의 글(1981). 金東洙,<高麗時代의 相避制>(≪歷史學報≫102, 1984). |
354) | 白承鍾,<高麗 後期의 ‘八祖戶口’>(≪韓國學報≫34, 1984). 權斗奎,<高麗時代 限品制와 世系 推尋範圍>(≪한국중세사연구≫창간호, 1994). |
355) | 盧明鎬, 앞의 글(1981). |
356) | 盧明鎬, 위의 글. |
357) | 盧明鎬,<高麗時代의 親族組織>(≪國史館論叢≫3, 1989). ―――, 앞의 글(1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