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
고려의 太祖 王建은 泰封國의 弓裔를 축출하고 새로이 나라를 개창한 데(918) 이어서 신라를 평화리에 합병하고(태조 18년, 935), 이듬해에는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그는 지방세력인 호족들을 회유, 규합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거니와, 뒤를 이은 역대 왕들도 그를 위해 노력을 기울인 결과 成宗朝(982∼997)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기반이 잡히고 지배체제도 정비될 수 있었다. 이처럼 성종조에 와서 국가의 체제가 일단락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의 6두품 출신인 崔承老의 보필이 컸지마는, 그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때 국왕에게 올린 바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로 요약되는262) 그의 시무 28조는 지니는 의미가 매우 크다.
이후 발전을 거듭한 고려의 門閥貴族社會는 11대 국왕인 文宗朝(1047∼1083)에 접어들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睿宗(1106∼1122)·仁宗(1123∼1146) 때에는 벌써 사회가 동요를 면치 못하더니 毅宗 24년(1170)에는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과 文·武臣 간의 대립으로 촉발된 武臣亂으로 인하여 문신 중심의 귀족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들이 흔히 고려 전기로 분류하는 시기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
무신란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제부터는 무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武臣政權時代가 되었다. 이후 그것은 꼭 100년간(明宗 원년, 1171∼元宗 11년, 1270) 지속되거니와, 이 시기에는 정치뿐 아니라 경제·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일대 변혁이 초래되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高宗 18년(1231)에는 몽고족의 침입이 시작되며, 이에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저들과 전쟁을 치르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 끝에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고려조정은 1271년에 개경으로 환도하지만, 이때부터는 저들의 내정간섭을 받아 나라의 자주성이 위축됨을 면치 못하였다. 그 같은 상황하에서 정치질서는 더욱 문란해지고, 사회경제적 모순은 한층 심화되어 갔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고자 恭愍王(1352∼1374)은 反元改革政治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운동은 원(몽고)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문제를 비롯한 제 모순을 근본적으로 타파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신흥 무장과 손을 잡은 新進士類勢力에 의하여 고려는 34왕 475년만에 종언을 고하고 마는 것이다(1392년).
封建制度와 農奴制 생산양식, 기독교 문화 등을 특성으로 하는 서양의 ‘中世社會’와 내용을 좀 달리하는 것이긴 하지만 고려도 많은 사람들이 ‘중세사회’라 일컫고 있다. 아마 단순한 시간의 원근이나 신라사회와의 차별성 또는 田主-佃戶制와 地代의 수취 등에 무게를 둔 이해가 아닌가 싶다. 어떻든 이처럼 흔히들 중세사회로 분류하는 고려는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변천과정을 밟았지마는, 생각해 보면 그것 자체가 시대가 지니는 한 특성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 속에 드러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사상상의 특징적인 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고려사회의 역사적 위치를 이해하는데 한 걸음 더 가까이 접근하여 보고자 한다.
262) | 李基白,<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大東文化硏究≫6·7 합집, 1969·1970:≪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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