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
佛·儒가 논의되는 자리에는 으레 道가 따라 나오듯이 도교 역시 우리 나라에서 크게 유행된 사상체계의 하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고대의 민간신앙과 神仙說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道家나 음양·오행의 이론 등이 가미되어 성립된 신앙으로 불로장생 및 현세 이익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였는데, 특히 고려에서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의식과 관련하여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벌써 태조 7년(924)에 수도인 개경에다 醮星處의 하나인 九曜堂을 창건한 것에서 그 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현종 3년(1012)에는 대궐 안의 毬庭에서 크게 醮祭가 행하여진 사례가 발견된다. 이후 계속하여 北斗醮·太一醮·星變祈禳醮·老人星祭 등의 각종 齋醮가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다.379)
이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도교에 많은 관심을 가진 예종(1105∼1122)이 즉위함에 미쳐 새 전기를 맞는다. 그는 왕 2년에 연경궁의 후원에 있는 옥촉정에다 元始天尊像을 안치하고 月醮를 지내게 하고 있거니와, 얼마 뒤에는 道觀인 福源宮(福源觀)을 건립하고 있는 것이다.≪高麗圖經≫권 17·18의 福源觀 및 道敎條에 의하면 그곳에 功行이 높은 道士 10여 명이 있어 일을 보았다 한다. 이렇게 도교의 총림격인 복원궁의 건립은 도교사상 매우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인데, 그 뒤에는 비슷한 도관인 神格殿이 설립되고, 또 祈恩色과 大醮色 및 祈恩都監·淨事色380)·大淸觀 등의 여러 도교기관도 마련되어서381) 도교사상은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382)
하지만 이 같은 도교기관과 도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승려들과 같은 강한 교단을 형성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도교의 비조직성에다가 고려 후·말기에 들어와 그도 불교와 함께 사대부들의 배척을 받음으로써 위축되기 시작하였다.383)
한편 풍수지리와 도참사상도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한 사상체계이었음이 알려져 있다. 이중 풍수지리설은 산세·수세를 살펴 도읍·주택·능묘 등을 선정하는 일종의 相地學과 같은 것으로서, 그 선정한 지역의 衰旺·順逆에 따라 국가나 인간의 길흉과 화복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羅末의 道詵과 관련을 가지면서 널리 전파되어 각 지방의 호족들이 자기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었으며,384) 태조 왕건 또한 그의 돈독한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같은 풍수지리설은 그후에도 줄곧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데, 더구나 여기에 도참사상이 결합되면서 그 비중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圖讖이란 원래 徵候·前兆 또는 神託·占言 등의 뜻을 지닌 말로 그것은 장차 닥쳐올 길흉화복을 예언·암시 혹은 약속하는 신비적·미신적 성격이 농후한 사상체계이었거니와,385) 이러한 관념이 풍수지리설과 결부되어 정치·사회 및 일반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태조대 이후의 그와 같은 사례로는 우선 정종의 서경천도계획을 들 수 있다. 이는 개경의 정정에 불안을 느낀 정종이 서경(평양)은 명당이라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추진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대인 인종조에 妙淸 일파가 일으킨 서경천도운동 역시 자기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표면에 지리도참설을 내세우고 획책한 사건이었다.386) 그 외에 개경에 이어서 서경과 동경(慶州)·남경(楊州:지금의 서울) 등 3경을 두는 것도 吉地說과 延基觀念에 따른 조처였으며, 三蘇宮을 경영한 것도387) 유사한 연유에서였다.
비슷한 유형의 지리도참설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계속된다.388) 그리고 조선조에서도 묘지의 선정 등 여러 방면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시대에 도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이 줄곧 성행되어 온 것에서 당시 사상체계의 복합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379) | 李能和,≪朝鮮道敎史≫(東國大, 1955:李鍾殷 역, 普成文化社, 1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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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 梁銀容,<高麗道敎의 淨事色考>(≪韓國宗敎≫7, 1982). |
381) | 梁銀容,<高麗時代의 道敎와 佛敎>(≪韓國宗敎≫8, 1983). |
382) | 車柱環,<高麗의 道敎思想>(≪韓國의 道敎思想≫, 同和出版公社, 1984). 金澈雄,<高麗中期 道敎의 盛行과 그 性格>(≪史學志≫28, 1995). |
383) | 梁銀容,<도교사상>(≪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
384) | 崔柄憲,<道詵의 生涯와 羅末麗初의 風水地理說-禪宗과 風水地理說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韓國史硏究≫11, 1975). |
385) | 李丙燾,<圖讖에 對한 一二의 考察>(≪震檀學報≫10, 1939). ―――,<圖讖의 意義>(≪高麗時代의 硏究≫, 亞細亞文化社, 1980). |
386) | 李丙燾,<仁宗朝의 妙淸의 西京遷都運動과 그 叛亂>(≪高麗時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亞細亞文化社, 1980). 金南奎,<高麗 仁宗代의 西京遷都運動과 西京叛亂에 대한 一考察>(≪慶大史論≫창간호, 1985). |
387) | 李丙燾,<明宗의 世와 三蘇造成>(≪高麗時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亞細亞文化社, 1980). |
388) | 崔柄憲,<高麗時代의 五行的 歷史觀>(≪韓國學報≫13, 19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