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한국문화의 특성
1. 언어
우리 민족은 오늘날 한반도에서 한국어를 말하며 살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大書特筆해도 모자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한국어를 대대로 지켜왔기에 오늘날까지 한민족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자기 민족 본래의 언어를 잊어버리고 다른 언어를 말하게 된 예가 지구 위의 도처에서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유럽의 라틴어(Latin)나 동아시아의 中國語와 같은 大文明語의 존재다. 일찍이 로마제국의 세력이 프랑스·스페인을 비롯한 서유럽 지역에 미쳤을 때, 로마의 언어가 이 지역의 언어들을 물리쳤으며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고전 라틴어(Classical Latin)가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을 지탱하였을 뿐 아니라 서유럽 전역 대학들에서 학문을 지배했던 것이다. 서유럽의 모든 대학에서는 라틴어로 된 책을 라틴어로 강의했으며 文法이라면 으레 라틴어 문법이었다. 그리하여 라틴어는 서유럽 언어들의 밑바탕을 이루게 되었다.492)
동아시아에서는 고대로부터 중국어가 대문명어의 위세를 떨쳤다. 우리 민족은 중국에 인접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민족사의 여명기로부터 중국과 접촉을 가졌다. 우리 조상들은 누구보다도 일찍 중국의 문자인 漢字와 이 문자로 적힌 글(漢文)을 받아들였다. 그 때에 한자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문자여서 記錄의 절실한 필요를 메우기 위해서는 이 문자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계 문자의 역사를 보면 이웃 나라에서 문자를 받아서 그것을 조금 고쳐서 자기 나라 말을 표기한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한자는 單音節 단어들의 배열로 문장이 이루어지는 중국어의 표기에 적합한 문자로서 우리 민족의 언어를 표기하기에는 지극히 부적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선조들은 漢文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입으로 하는 말과 글로 쓰는 말이 다르게 된 것이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억지의 상태를 19세기 말 開化期의 학자들은 言文二致라 부르기도 하였다. 言文一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우리 민족처럼 2000년 동안이나 이런 언문이치의 어려움을 겪어온 예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한다. 그런데 이처럼 오랫동안 漢文으로 글을 쓰면서도 말을 중국어로 하는 사람이나,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없었음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우리 민족이 영어를 알게 된 지가 19세기 말로 헤아리면 100여 년이요, 광복으로 헤아리면 50여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영어를 公用語로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음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우리 나라의 전통사회에서 중국어를 말할 줄 안 사람은 소수의 譯官뿐이었다. 선비들은 중국에 가서 筆談으로 의사를 소통함이 예사였다.
한국어가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나라를 유지해왔다고 함은 조금도 지나침이 없는 말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깨달은 사람이 周時經이었다. 그는 일찍이 域은 독립의 基요, 種은 독립의 體요, 言은 독립의 性이라 하고 이 성이 없으면 체가 있어도 그 체가 아니요, 기가 있어도 그 기가 아니니 그 국가의 盛衰도 언어 성쇠에 달렸고 국가의 存否도 언어의 존부에 달렸음을 설파한 것이다.493)
여기서 우리는 특히 1910년에 우리 나라를 강점한 日本이 일본어를 ‘國語’라 하고 한국어를 ‘朝鮮語’라 하여 이를 아주 없애버리려고 갖은 핍박을 가한 사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어로서는 크나큰 受難期였다. 1945년에 이 수난기가 끝이 났음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으나 그동안 입은 상처는 쉽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지구 위에서 인류가 말하고 있는 언어는 대충 5000을 헤아린다고 한다.494) 과거에 소멸한 언어들을 합하면 이 숫자는 늘어날 것이다. 이 많은 언어들 중에서 한국어는 열 다섯 안에 드는 大言語의 하나로 꼽힌다. 그 중에서 단일 민족이 국가를 이루고 있는 예만을 꼽는다면 한국어는 세계에서 몇째 가는 언어가 될 것이다. 실상 지구 위에 많은 언어가 있다고 하지만 국가를 이루고 있는 버젓한 언어는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한 국가 안에 한 언어가 쓰이고 있는 예는 뜻밖에 적다. 한 나라 안에 복수의 언어가 쓰이고 있는 예들이 있으며 심지어는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예도 있다.495)
이렇게 볼 때, 한반도의 유일한 언어인 한국어의 존재가 새삼 돋보인다. 오늘날 7천만의 국민이 한국어를 쓰고 있음은 참으로 대견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492) | A. Meillet, Les langues dans I'Europe nouvelle, Paris, 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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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 | 周時經,≪國語文法≫(1910). |
494) | 세계 언어의 수는 2000 내지 3000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5000을 웃도는 것으로 본다(M. Ruhlen, A Guide to the World's Languages, Vol. 1. Stanford, 1991). |
495) | 가령 영어의 나라인 영국 안에 웨일스어(Welsh), 콘월어(Cornish), 게일어(Gaelic)와 같은 옛 켈트어(Celtic) 계통의 작은 언어들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스위스에 독자적인 언어가 없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