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주생활
구석기인들은 산지의 동굴이나 지상의 간이천막 및 돌담그늘을 집으로 이용하여 생활하였으며768) 신석기인들도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한 인공 및 자연주거가 존재하였다. 의주 미송리,769) 단양 상시리770)·도담리 금굴771)·수양개,772) 부산 금곡동 율리,773) 청도 오진리유적774) 등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바위그늘을 이용한 자연주거이고, 춘천 교동유적775)은 인공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주거형식이다. 한편 새로이 땅을 파서 만든 움집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움집이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주거양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춘성 내평리유적776)에서는 일정한 범위에 돌을 깔아 만든 돌깐집(敷石住居)이 발견되고 있다. 움집은 발견된 기둥자리·서까래조각 등을 토대로 집의 모양을 추정할 수 있는데 대개 집터 바닥에 세운 기둥 사이에 가로로 굵은 나뭇가지를 엮은 후 이것에 서까래를 땅위에서부터 걸쳐 풀·나무·흙 등으로 지붕을 이어 만든 형태로 복원할 수 있다. 따라서 종전의 지상천막과 비교해 볼 때 거의 반영구적이라는 사실에서 당시 생활이 매우 안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착된 생활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움집터(竪穴住居址)의 유적수는 그다지 많지 않으나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을 중심으로 집터가 만들어졌던 입지를 살펴보면, 대개 큰 강가나 바닷가의 고운 모래퇴적지 또는 강안에 면한 경사면에 형성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의 집터는 낮은 습지대나 널찍한 평지에 만들어지기도 하나, 대부분 구릉지대 특히 그 경사면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간혹 조가비층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보인다.777)
움집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대개 시기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고 있다.778) 집터의 모습이 시기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주거생활이 달랐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움집의 평면형태는 둥글거나 혹은 네 모서리를 줄인 네모꼴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차츰 네모꼴로 바뀌며 후기에 이르면 긴네모꼴의 형태로 바뀌어진다. 움집의 크기는 지름 또는 1변이 6m 내외의 것이 대부분이다. 깊이는 60㎝ 정도가 가장 많으며 얕은 것은 30㎝ 내외이고 깊은 것은 1.2∼1.5m 정도의 것도 발견되고 있다. 이로 보아 면적은 20∼30㎡ 내외가 일반적이다.
움집의 바닥이나 벽은 진흙을 깔고 이를 굳게 다진 것이 일반적이나 서포항 제3호 집터의 경우779)는 진흙을 깔고 다진 위에 불을 때어 매우 단단하게 하였다는데 이것은 집터 바닥이 조가비층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집터의 바닥이나 벽의 전체를 짚 또는 풀 등을 깐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앉거나 누울 때는 그 곳에만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자리 같은 것을 깔고 생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집터 바닥에는 크고 작은 구멍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처음에는 움집의 벽에서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벽을 따라 둥글게 배치된 기둥구멍이 발견되지만 후기에는 집터의 한 변, 특히 긴네모꼴의 집터에서는 기둥구멍이 긴변을 따라 평행하게 2줄 또는 3줄 등으로 배치되어 나타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원추형의 집과 원통형의 蒙古包式집의 주거형식780)으로 시베리아·몽고 등 북방아시아의 특징적인 주거형식이며, 후자는 중앙의 기둥을 중심으로 하여 양쪽으로 경사진 지붕을 이루는데 이른바 맞배지붕의 주거형식을 나타낸다.
집터 내부에는 화덕자리·저장공 및 출입을 위한 시설 등이 있는데 화덕의 경우는 대부분 둥근모양·타원모양 또는 네모지게 바닥을 약간 파고 주위에는 길쭉한 강돌을 돌린 것이 대부분이나 진흙을 쌓아 둑을 돌린 것도 있다. 크기는 길이 1m 내외이다. 이른 시기에는 집터 바닥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나 늦은 시기에는 중앙에서 약간 떨어져 바닥 한쪽으로 치우쳐 배치된다. 간혹 집터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화덕을 집 밖에 설치하거나 취락 전체의 공동시설로서 따로 만들어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화덕은 주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이거나 굽기 위한 조리용 시설이며, 한편으로는 짐승이나 적의 습격을 막는 방편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781)
화덕 곁에는 저장공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간혹 저장공내에 모래를 깔고 그 속에 곡물이나 때로는 석기들이 넣어진 채 발견되고 있으므로 음식을 조리하는데 필요한 도구나 식량을 보관해 두었던 시설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자료가 된다. 때로는 집 바깥에 땅을 파고 큰 항아리의 밑을 떼어내어 거꾸로 묻은 것을 이용하기도 하였다.782)
또한 집안으로 출입하기 위한 시설로는 간단한 계단이나 경사로가 남아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시설이 없는 경우에는 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이용하였거나 또는 나무토막·큰돌을 이용하여 출입시설을 대신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출입시설은 낮은 채광을 고려하여 동남쪽과 서남쪽의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만들어져 있다.
집터 안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분포상태로 보아 신석기시대에 이미 주거내에서 공간기능의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지탑리 제1호 집터의 경우783) 출입시설이 있는 곳에서는 돌살촉·돌창·돌도끼 등이 발견되었고 움집의 가장 안쪽의 화덕 곁에서는 갈돌 등이 출토되고 있어, 그 분포상황으로 보아 화덕을 중심으로 입구의 반대쪽 깊숙한 곳은 주로 여자들이 취사 등의 작업을 행하던 공간이고, 출입구 부근은 남자들이 간단한 석기를 만드는 작업을 행하던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주거 내부를 필요에 따라 적당하게 공간을 분할하여 생활하였던 것으로서 주거의 기능이 잠을 자고 비바람을 피하는 원시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보다 다목적인 용도로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기에는 주거의 면적이 넓어질 뿐만 아니라 작업대가 흔하게 발견되며 남성들의 작업공간으로 생각되는 화덕과 출입구의 사이가 넓어진 점 등은 남성들의 주거내 활동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韓永熙>
768) | 任孝宰, 앞의 글(1983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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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9) | 김용간,<미송리 동굴유적발굴 중간보고>(≪문화유산≫ 1961-1·2). |
770) | 손보기, 앞의 글. 홍현선, 앞의 글. |
771) | 손보기,<단양 도담리지구 유적발굴조사보고>(≪’84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略報告書≫, 1984). |
772) | 충청북도,≪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1984). |
773) | 金廷鶴·鄭澄元, 앞의 글. |
774) | 釜山大博物館,≪淸道 梧津里岩蔭遺蹟≫(雲門댐水沒地域 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 1, 1994). |
775) | 金元龍, 앞의 글(1963). |
776) | 韓炳三 外,<昭陽江水沒地區 遺蹟發掘調査>(≪八堂·昭陽댐水沒地區 遺蹟發掘綜合調査報告≫, 文化財管理局, 1974). |
777) | 김용간·서국태, 앞의 글(1972). |
778) | 김용간·서국태, 위의 글. |
779) | 金正基, 앞의 글(1987), 122∼130쪽. |
780) | 도유호, 앞의 책. 金鴻植,<先史時代 살림집의 構造에 대한 硏究(假說)>(≪文化財≫ 11, 1977). |
781) | 도유호·황기덕, 앞의 글(1957b). 김용남,<궁산문화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 8, 1983). |
782) | 金廷鶴, 앞의 글(1990). |
783) | 도유호·황기덕, 앞의 글(1957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