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세형동검 시기
비파형동검 시기에서는 청동유물이 요하유역에 집중되어 있지만, 細形銅劍時期에 와서는 한반도지역으로 중심지가 옮겨진다. 그 중에서도 금강에서 영산강 그리고 낙동강유역으로 옮겨가다가, 바다 건너 일본 규슈지방에까지 이르게 된다. 전시기까지는 청동유물군의 공간적 영역이 요하유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있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대체로 한반도 이남에서 일본에 걸치게 된다.
이 시기의 이른 단계의 것으로 남한지방의 대전 괴정동유적의 예로 대표되는 槐亭洞類型을 들 수 있다. 이 유형은 앞서 비파형동검 단계의 정가와자유형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요하유역이 아닌 한반도 충남지방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 지역은 비파형동검 단계 청동유물군의 중심지인 요령지방의 발해 연안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서해안에 위치한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와 유물에 보이는 유사성을 근거로, 해상을 통해 요령지방의 청동기가 이 지역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여러 학자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0078) 물론 유물갖춤새가 정가와자유형 복사판 그대로가 아닌 것은 지역성과 시기적 차이를 고려할 때 당연하다.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유적이 대전시 괴정동, 아산 남성리, 예산 동서리 돌곽무덤이며, 이 유형의 유물군은 기본적으로 동검과 거울, 그리고 공구와 마구로 구성된다. 대전 괴정동에서는 세형동검 1점과 粗細文鏡 2점, 防牌形銅器·劍把形銅器·圓形銅器, 그리고 말방울이 공반되고, 남성리에서는 동검 9점과 함께 역시 기하학무늬동경, 방패형동기·검파형동기·원형동기 등의 異形靑銅器, 그리고 동서리에서는 나팔형동기의 말장식이 추가로 공반된다.0079)
한편 괴정동유형과 비슷한 단계에 있으면서, 이형청동기가 공반되지 않는 蓮花里類型이 있다. 부여 연화리, 전주 여의동과 연해주 이즈웨스토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동강유역에서는 동검과 공반하여 출토하지 않았지만, 성천과 맹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조세문경과 그 거푸집이 있으므로, 이 유형이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부장 당시부터 동경이 공반하지 않는 유형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계군 정봉리 무덤, 대전 탄방동, 백운리 출토례가 대표적이다. 정봉리의 경우 남성리유적과 같이 석곽무덤에서 출토하였는데, 동검 1점 이외에 창끝 1점과 도끼 1점만이 공반되어 있다. 이러한 정봉리유형과 비슷한 구성의 갖춤새는 비파형동검 시기의 쌍방유형에서 확인된 바 있다.
괴정동·연화리, 그리고 정봉리의 각 유형은 유물의 형식으로 보아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갖춤새의 다양성에 차이가 있는데 이는 피장자간의 신분 차이를 보여준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은 앞의 것보다 한 단계 늦은 것으로, 정교한 잔줄무늬거울 혹은 한국식꺾창을 공반하는 여러 유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가장 간단한 갖춤새로 거울은 없이, 단검 이외에 투겁창과 꺾창을 공반하는 龍堤里類型이다. 서북한지방에는 배천 석산리, 남한지방에는 공주 봉안리, 연기 봉암리, 익산 용제리, 삼천포 마도동유적의 출토례로 대표된다. 이에는 銅金㐌와 같은 끝이 뾰족납작한 尖頭形靑銅器를 공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용제리유형에 속하는 유적은 청천강 이남으로 남한지방 그리고 일본에까지 퍼져 있다.
다음은 잔줄무늬거울이 공반되는 유형으로서, 다시 단검과 투겁창 그리고 꺾창을 여러 점 갖춘 부여 구봉리를 비롯해서 갖춤새가 단순한 북한의 봉산 송산리, 함흥 이화동, 남한의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당진 소소리, 양양 정암리, 일본 규슈 요시타게타가기(吉武高木) 등이 있는데, 일단 이들을 묶어 松山里類型이라 할 수 있다. 송산리유형에는 청천강 이북의 이른바 蓮花堡-細竹里類型의 철기유물군에 공반되는 철제 주조도끼가 공반되는 예가 있지만, 청동유물군 자체는 청천강이 북쪽 한계가 된다.
다음은 儀器類인 청동방울구를 갖춘 유형이 있다. 청동방울은 八珠鈴·二頭鈴·竿頭鈴 등이 있으며 이는 다시 방울만 발견되는 예와 검·투겁창·꺾창 등의 무기류가 공반되는 예가 있다. 전자에는 예산군 덕산과 논산 출토로 전하는 예가 있고, 후자에는 화순 대곡리, 함평 초포리 등의 예가 있다. 전자의 경우 유물 출토 상황에 대해서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후자처럼 무기류가 원래 공반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 못한다.
청동방울을 공반하는 이들 대곡리유형은 대동강유역에는 보이지 않고 함남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에 위치한다. 이러한 청동방울이 앞선 세형동검 초기 단계 이전의 유적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청동방울은 앞서 괴정동유형의 방패형동기나 나팔형동기 등의 청동기가 요령지방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과 달리, 북방 시베리아지방의 유목민 사회의 샤먼들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들과 계통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늦은 시기에 공반하는 세형동검의 검자루맞추개에 북방계통의 오리모양 장식, 동물장식 버클도 대체로 같은 북방계통의 것으로 이해된다.
잔줄무늬거울을 공반하는 유형 중 가장 가장 늦은 것으로 入室里類型이 있다. 공반하는 투겁창은 다양한 형태로 의기화되거나 中細化되었으며, 꺾창은 杉枝무늬가 장식된 중세형으로 바뀌었다. 간두령과 같은 청동방울도 공반하며, 경주 입실리·경주 구정동 이외에 대구 신천동·경주 죽동리 등 낙동강유역의 한반도 동남부지방에서 집중 분포한 것으로 보인다. 서북한이나 서남한 지방에는 이 유형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서남한지방에서는 청동방울이 없이 前漢鏡과 함께 중세형투겁창이 공반하는 것으로 익산 평장리 예가 있다. 이 밖에 거울·방울 없이 중세형투겁창 등의 무기만 공반하는 것으로서 상주 낙동리의 예가 있어 독자적인 유형이 설정될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입실리유형 속에 포함시킨다.
남한의 입실리유형에 시기적으로 대응되는 청동유물군은 북한에서는 꺾창·잔줄무늬거울이 없어지고 투겁창 또한 소형의 퇴화형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漢의 문화 영향을 직접 받아, 그렇지 않은 남한지방과 달리 漢式철기문화가 전 단계의 청동기문화를 바로 대체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평양 夫租薉君墓유적의 출토례가 대표적이며, 동대원리 허산·평양 석암리·상리·갈현리·부덕리 등의 출토례가 있다. 이러한 서북한의 부조예군묘유형에는 철제장검 등의 철기와 함께 또한 車衡金具 또는 馬面 장식이 공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대동강유역에서는 세형동검 시기의 마지막 단계에 피홈이 있는 말기형 동검과 퇴화형 창끝이 있을 뿐, 다른 금속유물은 철제품 일색인 黑橋里類型이 등장한다. 高常賢墓, 정백동 88호, 대성리 10호 무덤, 청룡리 등의 출토례가 이에 속한다. 남한의 낙동강유적에서는 철기가 공반되면서 대동강유역과 달리 청동기가 대형화되고 다량 공반되는 坪里洞類型이 된다. 동검은 피홈이 있는 흑교리식 혹은 퇴화된 소형의 평리동식이며, 투겁창·꺾창 등의 다른 무기도 전단계의 입실리유형에서 시작된 대형화·의기화가 더욱 진행되어 나타난다. 대표적인 유적은 대구 비산동·지산동·만촌동·평리동, 의창 다호리 등이 있다.